죽마고우 영준이를 보내며,
어떻게 이리 조급히 자네가 갈 수 있는가?
이래도 되는건가?
며칠전 자네 딸 결혼식에 못나온 것은 그래도 가벼운 폐렴을 앓아서 그랬거니
했지 그게 이렇게 이별의 장이 될찌는 누가 알았으리요!
2년9개월간의 혈액암과 맞서 굳건이 싸운 결과가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나? 내가 한달전에 자네에게 그랬지. “내년에는 완치해서 옛날에 카자흐스탄 의
天山을 넘듯이 Himalaya의 Gogyo Peak에 같이 가고 내려와서는 Meridian Resort에서
Golf를 하자”고.
평소에 약속 잘지키는 자네가 이래도 되는건가?
얼마나 투병에 답답했으면 몰래 나가 홀로 포장마차에서
해삼을 곁들여 소주 한병을 비웠겠는가?
면역이 떨어진 자네 몸에 이게 가당치 않은 것은 자네가 잘 알면서도
그리했어야 하는 심정 내가 설령 옆에 있었더라도 차마 막을 용기가 있었을까?
아무리 인명재천이라도 해도 그래서는 않되는 거였네.
슬프다. 너무슬프다.
이렇게 가는게 아니였는데…
18대 1일의 경쟁을 뚫고 들어간 중학교에서부터 우리의 추억은 시작됐지.
그때 때때로 자네집에 가서 탁구치고 놀고 배고프면 자네집에서
하는 “뉴서울제과”에서 빵 얻어 먹고, 그때부터 자네는 만년 “문학소년”이었다네.
그래서 우리는 치기어렸지만 “Vine Club”을 만들어 문학의 흉내를 내며 중학생활을 보냈지.
중3때는 학교에서 유도복 공짜로 받아 “청년도장”도 같이 다녔어.
그런 연유로 자네는 고등학교에서도 나와 같이 유도를 열심히 한적도 있었어.
자네 부친께서 어느 날 상업강사로 오셔서 우리를 친아버님같이 가르치실 때
자네 예를 드시며 훈육을 하셔서 자네가 민망해 하는 것을 보고 우리 중학생 악동들은
즐거워 했었어.
세월이 지나 서울대 입학해서는 자네는 법대 나는 약대로 갔으나 길건너 이웃이라
중간에 있는 문리대에서 만나 그냥 아무 얘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엊그제 같애.
서울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해서는 “병원System”에 대해 석사논문을 쓴다고 할 때 나는
제약회사에서 영업직을 한답시고 출입했던 서울대 병원에서도 자주 만났었네.
그러고는 자네는 드디어 경영학박사까지 취득을 했지.
성실한 자네는 학업을 계속해서 서울대 AMP과정도 끝내고 드디어는
AMP회장과 동시에 서울대 총동창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우리고등학교 총동창회 부회장을
떠나는 날까지 했네.
정말 수고많았어.
그래도 우리부고의 총동창회 회장까지 했어야 하는데 뭐가 급해 그리도 빨리 갔나!
Korea Research Center설립하고는 우리나라 여론조사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자네아니고는 아무도 할 수 없었던 훌륭한 업적이었네.
평소에 쌓은 인간관계. 그리고 자네의 내공이 이룬 결과라네.
다만 아쉬운 게 있었다면 자네와 같이 세웠던 “Survey Plus”를 중간에 접어야 했던 것이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시대를 너무 앞서 갔기 때문이었을꺼야라고 자위하겠네.
아까 얘기했지.
몇몇이서 3박4일에 걸쳐 3400meter의 카자흐스탄/기리기스탄을 같이 넘은 것 생각나나?
그것이 한국사람들로써는 처음이었다는 것도 기억하고나 있나?
그때 이상훈, 정영경, 조동환등이같이 있었지.
민병훈이는 밑에서 우리를 기다려 줬고…
어느 날 갑자기 수염을 기르고 나타나서는 우리를 놀래켰지.
처음에는 자네가 스스로 “멋있지” 하길래 즉시 면박을 줬지만
이제는 그”멋있는” 수염기른 모습이 내가슴에 수많은 추억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고 고백하겠네.
일찍이 심각했던 간염까지 자네의 의지로 이겨내고 “禪학”의 도사지경까지
이르렀던 자네야 말로 백세를 넘겨야 당연한건데
뭐가 급해 이리도 빨리가는가?
원통하고 너무슬프다.
이제 어쩌겠는가?
인명이 재천한 걸.
천주님의 보호 아래 저세상에서 편안히 계시게.
이승에 남아있는 가족도 계속 보살펴 주시게.
남아 있는 우리도 최선을 다 하겠네.
God Bless you & your family!!!
슬픔에 쌓인 자네 죽마고우 김윤종이가
이별의 인사를 대신하며..
2007년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