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되어 별이 되어>
동이 틀 무렵 닭울음 소리에 깼다. 산책길을 나섰다. 신선한 공기를 깊게 들이 마신다.
산과 강물과 구름과 나무와 새들 모두가 말없는 위안과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활력을 준다.
늘 같은 길을 걷는데도 날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씨를 달고 있는 풀들.
서리꽃 같은 모습의 꽃같지 않은 두릅꽃.
조용히 살고 있던 풀꽃들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하나씩 발견하고 돌아온다.
이젠 마루 창가 햇살이 비쳐 들어 오는 자리에 앉아도 그리 덥지 않다.
손바닥만한 고추 밭에서 하루에 서너 개씩 따는 빨간고추가 신문지 한 장에 널려 햇볕 따라 이동된다.
가장 먼저 눈길 가는 초가을 풍경이다.
더 두면 씨가 생기고 또 병들어 못 쓰게 된다는 말과 함께
어린 호박을 곧잘 따서 내게 선물로 주는 야학생집 어머니.
내가 미안해 할까 봐 덕담으로 한 말이기도 하고 사실이기도 하다.
애호박을 예리한 칼로 자르면 원이 된 단면 둘레에 방울방울 투명한 이슬이 맺힌다.
호박안에 들어 있던 진주알이라니!
보석을 먹는 느낌으로 여러 개 동그란 토막을 후라이팬에 굽는다.
뒷밭에서 여린 파 몇 잎 따와 흰깨, 다시마물+간장에 홍고추 다져 넣은 양념장을 얹어
그 반찬 한 가지로 밥 한 그릇을 다 먹는다.
매화당 모임 장면을 화사한 일기로 남기는 기록자, 채수인의 표현에 의하면 아직도 볼만한 꽃이 졌다.
유정숙꽃.
회고해 보면 흰 블라우스에 초록 스커트를 입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적십자 단원 봉사활동에 나섰던 그녀는 여인네의 멋스러움과 지덕체를 고루 갖춘 꽃이었다.
학창시절 좁은 교정 뒷마당에서 이루어지는 반별 배구 시합땐 가운데 자리에서 힘찬 공격과 수비로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었다.
정숙자는 "작년에 아픈 몸으로 가을 여행에 참석해서 모두 만나고 후에도 작은 자리에서 몇 번 보았지만 이렇게 갔다는게 실감나지 않아. 우리 모두 이별 연습을 해야 할 나이인가 보다. 그래도 열심히 살자."
이렇게 추억하며 다짐한다.
정숙은 여러해 동안 총동창회의 뒷살림을 정성껏 보살핀 일꾼이며 공로자이기도 하다.
최근에 남긴 기념 사진들 속에서 기분좋게 웃고 있는 얼굴.
8월17일 생을 마감하고, 이제는 천의 바람이 되어 들판 위로 날아다니고 있을까.
작은 별이 되어 을지로의 하늘 위에 떠 있을까.
변하는것들 사이에서 슬픈 마음을 한숨으로 뿜어낸다.
신덕애씨의 시상과 마음이 아릿다운 어느 문학소녀의 그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