警句: 아무도 인간을 가르칠 수 없다 다만 인간 스스로가 자기 안에서찿는 길을 도울 뿐이다
알을 스스로 깨고 나오면 생명이지만 외부에서 깨뜨리면 死物이다.
나이 들면 오나 가나 환영해 주는데 없고 소일거리 찿은들 받아주는데 없으니 시간과의 전쟁에서 7월이 가는구나..한때 툭하면 노닥거리던 修身齊家. ...平天下 고대 중국 4서중 대학편에 나오는 '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인데 사물의 현상를 끝까지 파고 드어가면 이치를 꿔뚫는다는 것인데 이치를 안후(사유) 마음을 닦고(수심) 몸을 추스려(수신) 세상만사에(수행) 바르게 임하라는 성현 말씀이 이제사 선명이 들어오니 나이도 들만하구나.
세상만사 순서는 思惟-修心-修身-修行(닦으며 행한다)이란 것이다.사유가 그토록 중요하다는 애기다.
위대한 사상가- 인류의 스승 붓다
고타마가 출가하여 제일 먼저 찿아간 스승은 '알라라 칼라마'였다 그가 고뇌했던 생사의 근본 문제에 해답을 구하고저 당대 최고의 仙人을 마나 無所有處定(아무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경지)을 배웠으나 근본 해결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웃다까 라마붓다'라는 선인을 맟나 非想 非非想處定(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삼매에 들었으나 깨어나면 평상심으로 돌아와 고뇌가 여전함에 이제까지 경험한바 없는 6년 고행 길을 떠나는데 먹지 않으니 유체이탈로 탈진상태,사경을 헤매다가 '이건 아니다"라면 유미죽을 얻어 먹고 기운을 차린후7일간의 선정에 들어 깊은 思索끝에 확연이 들어나는 존재의 원리를 터득한다.
바로 緣起다. 이것이 있슴으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니 저것 또한 없나니...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 관계를 맺음으로서만 ,조건 지어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논리다.
불교의 존재론은 자연상태로서의 물자체는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고정 불변의 實體는 없다는 것,諸行無常이 곧 그것이다. 찰라 생 찰라 멸하는데 고정된 실체가 어찌 있겠는가!
고타마가 연기됨을 깨달은 것도 사색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부처는 8정도(깨달음에 이르는 8가지 길)에서 正見(올바로 보라,있는 그대로 보라)을 존재의 근거를 제시하셨고 正思惟(올바로 생각하라)을 불교 인식론으로서의 輪廻를 말씀하셨고....어김없이 강조하신 正精進하여 해탈할 것을 당부하셨다.
마지막 유언에도 '스스로 등불을 밝히고(自燈明) 스스로에 의지하여(自歸依)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가 전부였다.초기 경전에'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가 바로 이것이다.
불교의 구원론은 깨달아 해탈함이다.기도해 극락가는 종교가 아니다.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어리석은에서 벗어남이며 解脫은 걸림없는 대자유를 얻는 것이다.어리석음은 한마디로 緣起됨을 모르는 것-나의 의식공간에 억겁의 세월속에 요지부동하게 자리잡고 있는 '있다'라는 實體관념에 사로잡힘이다
나, 나,나하는 살체관념을 깨뜨려 버리는 방편으로 禪僧들이 붙잡고 있는 화두 역시 非我=곧 나 아님을 깨닫기 위함이다.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물은 물이로다'역시 대상을 인식할 때 분석적 사고가 아니라 통채로 삼킴으로 '있는 그대로 如如헤게 볼 뿐이라는 의미다. 시시비비하지 않고 物自體를 보다는 뜻이다.
부처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대 전제는 누구나 갖고 있는 불변의 마음자리(自性)가 있기 때문이며 연기원리를 깨달으면 곧 그자리가 극락정토요,장엄한 화엄세계임을 설하신 것이다
인생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이라면 思索은 하던 일 잠시 멈추고 깊은 숨 들이 내 쉬는 것.-그래야 멈추면 비로서 보이는 것이 있다. 너나없이 습관적인 삶에 중독되어 반사적인 삶을 산다면 유감스럽게도 신이 주신 은총을 걷어차는 것이다.심하게 말하면 신의 축복을 악마의 誘惑에 몽땅 떨이하는 것.
가만 있으면 불안하고 혼자이면 우울하다는 고질병,순간순간 말초적 욕정에 헐떡여 촉수를 곤두 세운들 속 시원한 해법을 찿았는가!
얼마남지 않은 인생,이대로 간다면 억울하지 않은가! 허무하지 않은가! 단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천재지변인가? 혹독한 가믐이다.대지가 타 들어간다.고사직전의 생명에게 단비가 내린다.
思索하라! 그것이 단비다
사색의 極点은 기도다.
神性과 佛性의 만남이다
그것이 진정한 기도요,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