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事物)을 볼 때 단선적으로
봄으로서 실상(實像)은 왜곡되며
입체적 사고로 통째로 봄이며
전체를
분석하여 본다는 얘기다. 고질적인 ‘나’를 분석적으로 보자.
나를 구성하는 몸은 각종
장기와 뼈 피부로 구성돼 있다.내 심장이 ‘나’인가? 내 소장이 '나'인가? 눈이,코가,팔,다리가
‘나’인가? 피가,침이,뼈가 ‘나’인가?
시간을
소급해 보자.70세인 내가 ‘나’인가? 40세인 내가,10세인
내가,갓 태여난 내가 '나’인가?
어머니
난자가 ‘나’인가? 아버지
정자가 나인가? 조부(祖父)가,증조부(曾祖父)가,고조부(高祖) 가 나인가? 도무지
‘나’라 할만한 독자적(獨自的)인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란 무엇인가? 조건(條件)지여진 연기(緣起)에의한 부산물이다.불교에선 지(地)수(水)화(火)풍(風)이 몸이요 그 안에 자리 잡은 영혼(靈魂)은 수(受)상(想)행(行)식(識)의 총화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여 나는 순간 ‘나’로 이름지어지고
‘나’로 살아간다.제법(諸法)이<인식되어지는 모든 대상> 무아(無我)인 것을…
수행(修行)이란 한
마디로 고질적인 ‘나’를 해체시키는 작위(作爲)이다 참나의 본질적인 합일(合一)의식(意識)을 통하여 ‘걸림없는 자유(自由)’를 얻는 것이다. 이를 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입체사고란 분별적 사고 즉 분별심을 없애는 것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고 본래 무(無)일(一)물(物)인 ‘것이며 일(一)즉(卽)일(一) 一卽一切의 不二사상이다.
한정된 공간에 공(空)의 심오한 철학을 어찌 다 투박한 필설로 갈파하겠는가만 어렴푸시나마 느낌은 있을 것이기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공의 진면목으로 여행할 시간을 몫으로 남기고 서로 상충되는 듯하면서ㅡ공사상과 양립(兩立)하는 대승불교의
윤회(輪廻)사상을 가볍게 집어보자.
생멸(生滅)의 문(門)-윤회
불교의 생사(生死)관은 한
생(生)이 끝이 아니라 거듭거듭 생(生)과 사(死)를 반복한다는
윤회사상이다. 행위(行爲)자(者)가 지은 업(業)-신(身)구(口)의(意)-은 인식을 총괄하는 의식(意識)이전,심층(深層)의식인 아뢰아식에
저장되여 있다가 어떤 인연(因緣)을 만나냐에 따라 6도윤회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행위자는 소멸되지만 행위 자체는 아뢰아식에
씨앗으로 저장되며 이는 마치 제사때 피운 향(香)이 다 타고
없어도 그향기(香氣)는 남아 있어 옷이면 옷,벽이면 벽,몸이면 몸에 스며 냄새로 되 살아나듯 종이 연(緣)을 만나면 종이가 냄새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도솔천(극락(極樂)에 갔을
지라도 때가되어 어떤 연을 만나면 그 인연에 따라 다시 그 업에 따라 환생한다는 것이다.
반야사상은
불멸후 500년경 인도의 위대한 사상가 용수보살이 그의 저서 중론을 통하여 개념(槪念),언어의 오류를 조목조목 실증 반박함으로서 논리(論理)의모순을
뿌리채 뽑아내여 가히 논리학의 ‘코페르니쿠스’혁명을 일으킨
반면,유식사상은 그후 세친선사가 의식의 무한(無限)공간을 유영(游泳)하다가 20세기초 푸로이트,융이라는 심리학자들이 밝힌 무의식(無意識)개념을 초월한
선험적 의식세계를 증득하여 유식30송으로 풀어 해설한 것으로 무려 서양의 의식분석체계 보다 2000년이나
앞선 지혜의 산물이니 이 또한 놀라운 쿠테타적 발상이 아닌가!
모든 사물이 조건지어져 생멸(生滅)하므로 그 인(因)이 있어
그 과(果)를 낳는 순환고리로 연결되는데
인과(因果)법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신앙을
갖고 정(正)법(法)을 수호할 수 있는 것이니 그에 상응하는 처절한 정진과 공부도 없이 쉽게 편승하여 무임승차로 복락을
누리고 사후 입맛대로 환생하길 바란다면 그 순간 그가 산 복권(시주돈)은
당첨율 0에 몰빵하는 결과는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윤회(輪廻)는 전생,현생에서 지은 업(業)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요행은 업식인 아뢰아식을 부정하는
것이니 그 인에 그 과(果)는 애초 없는 것이다.
기도로 업장이 소멸된다는 해괴망측한 요설에 속아 장님
문고리 잡듯 더듬거리는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대가 아니라 자동문이 회전하는 시대가 아닌가? 온 갖 못된
행위를 하고 부처앞에 참회한다고 행위가 소멸(消滅)된다면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살도는 종말이고 부처는 쇠붙이요,관세음은 화강암 돌덩이로 그 순간 전락할뿐 부처도 보살도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잘 못된 신앙은 自身뿐만 아니라 인연을 함께했던 중생까지
무간지옥으로 인도 할 수도 있다.참회란 지은 죄를 세세생생 선업을 닦고 닦아 저울 추의 균형을 ,지렛대를 보살행 쪽으로 들어 올려 회향하는 것 밖엔 없다.불교는
철저한 ‘아’와의 피나는 싸움이요,무문관(無門關)의 ‘나’아닌것과 단절된 고행이요,단계별
선정속에서 궁극에는 아라한의 경지의 과(果)를 얻어
윤회의 경지까지 걷어내는 천하를 얻어 무장무애의 대 자유를 얻고져 함이 궁극의 목표다.
공사상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인류 역사상 이처럼 역동(力動)적인 종교도 드물 것이다.원융(圓融)무애 사상이니
나와 나 아닌 것이 둘이 아니요,일(一)즉一切니 동체(同體)자비(慈悲)인 것이다.
"나와 나 아닌 것 놀음에 남은 여생,해는 지고 짧기만 한데
오늘도 허둥대고 아우성이구나!"
사제와 스님등의 욕심과 편견 욕망이 참신앙 생활을 호도하고 그르칠 수 있다고 봄니다. 어리석은 대중은 그것을 가르치는데로 편향된 신앙생활을 하는 수가 굉장히 많은 것이 현대 신앙생활의 현실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