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하면 떠오르는 감성들은 무엇일까? 저마다 다르겠지만 '기울음, 움추림'은 같은 색갈을 입혀도 무난하겠지. 우리는 하루에도 거울을 몇번씩 본다. 얼굴의 매무새를 만직이면서,옷 맵시를 다듬으며...
거울의 역사는 인류가 인식기관인 눈으로 대상을 인식하면서 인식 주체인 자신을 볼 수 없어 '저 놈은 저렇게 생겼는데 이 놈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호기심이 만들어 낸 발명품이 아니 겠는가.처음에는 물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어떤 괴물로 의식했을지도 모른다. 일렁이면 찌그러들고 고요하면 헛개비 처럼 머물고..
아름다워 지려는 본능에 상대평가까지 어우러져 열등감,소외감에 성형하는 세상이 되였고 스타킹에 출연한 연예인은 8번의 수술로 본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자화상을 만들어 왕성한 활동을 하며 외모 콤푸렉스에서 벗어나니 자신감에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데 투자 수율로 봐도 대박이니 한 두번 수리하는 것도 괞찬겠지.
요즘 습관적으로 거울을 본다.성긴 머리에 희끗 히끗 퇴색한 머리에 하루 다르게 생겨나는 검 버섯하며 골진 주름살은 깊이를 더해 가는데'다 그런거야' 초연해질 수 있을까? 체념하는 거지.번지르르한 외모에 위풍당당까지 더해지면 손주부터 여보까지 '당신 최고!'할게 않인가.외모에 대한 아름다움의 추구는 일정 한계을 초월할 순 없다.골조 자체를 뿌리채 바꿀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아름다운 美學은 무엇일까?
겨울-거울을 보자! 앞서 적시했듯이 겨울은 '기울다,기여들다'처럼 쏠림이기도 하지만 잔을 기울이다처럼 소진의 기움이고 1년 12달의 12가 없어짐이며 '움추림'은 울안으로 들어 온다는 공간의 영역을 표현이다. '나'는 중심이요 울의 울타리는 그 외연이다.울타리는 안과밖으로 경계이며 움추림은 곙계선 안으로 추수림, 즉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함축하면 겨울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중심인 자기자신에게 회귀한다는 의미로 자신을 내면의 세계로 걷워들임이다.한해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해가 바뀌는 送年,忘年이 아니다.자기자신에의 회귀는 회고를 넘는 통열한 자기성찰이다.단지 1년이 아니라 삶이란 시간의 연장선상이기에 생의 전체를 조망할 수도 있다.어떻게 살아 왔는가,어떻게 살 것인가? 본질적인 가치에 스스로 묻고 사색하며 내면의 고독한 인생역정을 반추해 봄도 값진 겨울이 않이겠는가! 눈만 뜨면 바깥 세상이다. 휘둘리다보면 허겁지겁 하루가 샌다. 자기 자신에게 머무를 시간이 없다. 머무르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앉으나 서나 스마트폰이다. 잠시 머물고 싶으면 90%로 오감만족 푸로그램이다. '내버려 둬!'요즘 이것이 나의 절규다.세월이 흐를수록 집 사람은 사사건건 잔소리다, 난 그래서 耳鳴에 걸렸다.이것이 비록 나만의 절규인가.내면의 여행을 떠나면 너무도 신비롭고 경이로움이 많다.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는 영성이 끝없는 시공을 나르며 卽心是佛이라는 깨달음의 세계로 遊泳도 한다.이 얼마나 신비로운 여행이냐! 見性은 선사나 도사의 전유물이 아니다.우리모두에게 自性(본래 갖고 있는 변하지 않는 성품)이 있기에 언제,어디서나 누구나 가능한 것이다.나자신에게 진정 유감이 있다면 하느님과 종속관계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영혼 觸手의 이상인가,미성숙인가? 만약에 만약에 누군가 나를 부처님 가피로 극락에 간다고 인도했다면 내가 왜 뗏몫을 타고 거친 강여울을 거슬러 험난하고도 먼 저 피안의 언덕으로 사서 고생고생하며 노를 저었겠는가. 뿐더러 단박에 내려 마하의 속도로 하나님과 교감했을 것이다.야고보로서 말이다. 허나 나는 누가 뭐라해도 나만의 하느님과 靈接하며 교감하고 있다.영성이 충만하고 영혼의 속삭임을 노래한다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합일하고 우주를 품는 영생을 누릴 것이다.
지구 구석구석 야수의 잇빨과 발톱으로 먹이감을 낚아 채는 실패작 마구니들에게 징벌적 제제도 없이 '숙주는 종국에는 제 몸에 있는 기생충의 먹이감이 된다'는 경고장으로 내버려 둬도 스스로 자멸한다는 진실말이다.부질없이 지옥간다 말하지 마라
하느님이 빚은 온전한 아름다움은 8번씩 대패질한 star-king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영성의 내면의 거울속에 있슴을---긴 겨울,이제 내면의 거울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