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일보/CEO칼럼]우리 모두는 하나이다
공동체를 떠나선 누구도 만족할 수 없어
수많은 이들 도움으로 오늘의 내가 존재
갈등·분열하기보다 공생하는 삶 살아야
2014년 12월 03일 (수) 경상일보
수많은 이들 도움으로 오늘의 내가 존재
갈등·분열하기보다 공생하는 삶 살아야
2014년 12월 03일 (수) 경상일보
인간은 오랫동안 공동협동생활로서 종족을 보존하고 이어왔다. 육체적·환경적 악조건에도 명맥을 유지한 원초적 힘은 끈끈한 종족간의 협동심이었다.
약 700만년전 아프리카 동부지역에서 원인류의 조상은 다른 영장류에 비하면 숲속에서 나무타기와 열매 섭취 등에 있어 순발력도 모자라고 털도 없으며 몸집도 작아 생존경쟁에서 밀려 메마른 벌판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약 6000년 전만 하여도 인간은 다른 동물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야생적 존재이었다.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덩치가 훨씬 큰 맘모스나 고래에 대항하여 살아야 했던, 비참한 존재였다.
비로소 인간은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하게 되었고 문명화를 시작하면서 점차 다른 동물들을 사육하며 자연을 다스리는 지혜를 갖게 됐다. 이에 따라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수백만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요구하는 협동인자가 깊숙이 각인되어 인류의식의 숙명적인 핵이 됐다.
그러나 산업혁명 후 인간사회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보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인간의 공동체 의식이 와해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의 변화가 나타났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경쟁과 벽이 생기고 군중 속에서도 고독으로 괴로워하게 됐다. 행복하기 위하여 많은 욕망을 채우지만 소유의 정도에 관계없이 누구도 만족스럽지 않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의 유전인자에 각인된 공동체의 목표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물과 탐욕이 인간의 연결고리를 파괴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를 떠나서는 어떤 존재도, 소유도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 이 혼란된 사회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우리 원조 때부터 이어 온 공동체 의식 회복에 있다. 수많은 동료들의 도움으로 나의 오늘이 있거늘 결코 그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돌이켜 보면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의식주 어느 하나 타인의 도움 없이 해결할 수 있겠는가. 쌀이 우리 밥상에 오기까지 88가지의 공정을 거친다고 하지 않는가. 밥 한알 속에도 햇빛, 달빛, 별빛의 기운이 있고 땀흘리는 농부의 구부정한 손길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고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남의 도움이 필요치 않은 부유한 사람도 없고 남을 전혀 도와줄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다.
베품이 없는 인생은 참담하고 나눔이 없는 마음은 메마르다. 힘든 이웃을 바라보고 손을 잡아주면 시들어가는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뿐 아니라 나에게도 온기가 남는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공감이 우선이다. 어느 광고에서 보았듯이 암치료 중인 한 어린이가 머리가 깎은 뒤 우울해 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자 그 어린이를 위하여 친구들이 모두 머리를 깎고 하나되어 위로해주지 않던가. 이웃에 베푼 웃음은 어떤 진통제 보다 효과가 강력하다. 매사 감사하는 마음은 어떤 항암제 보다 치유력이 우수하다.
우리는 개개인의 낱생명이 아니라 공동으로 이뤄진 온생명의 일부일 따름이다. 심지어 다른 동·식물과 더불어 자연도 한데 어울려야 할 운명체이다. 날마다 쏟아지는 밝은 햇살은 자신을 나눠 주는데 한 번도 인색한 적이 없다. 아름다운 꽃과 푸른나무는 싱싱한 생명력을 전해 주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다고 온생명의 질서를 무시한다면 결국 자기에게 업보가 되어 돌아올 수 밖에 없다. 우리 삶에는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삶의 은혜이다.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온생명이 온전할 수 없다. 이타적 이기주의 즉, 온생명을 위하여 나의 적은 보탬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내 안에 우리, 우리 안에 내가 함께 공명하며 살아야 할 운명의 공동체가 곧 인간이다.
조현오 울산시티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