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능산 산행기(182회)
이 성 희
이제 곧 초겨울 추위가 닥칠 것이라는 예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따스하고 밝은 햇살이 내려쪼인다. 初秋의 陽光이라! 그러나 그 10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체육대회 여파인지 오늘은 인원수가 현저히 줄었다. 뒷산을 마다하고 먼 길을 허위단심 달려온 김정차를 끝으로 모두들 배낭을 챙겨 메고 일어선다. 모두 17명이다.
산 初入 주변의 텃밭에선 시퍼런 배추와 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한동안 배추파동을 겪은 직후라 그런지 김장배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짙은 녹색의 잎들은 엷게 물든 단풍의 색깔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그러나 길 한 편에는 지난여름 몰아쳤던 태풍으로 뿌리째 뽑혀 넘어간 나무들이 무수히 많아 보기에도 걷기에도 불편하다. 손을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보이는 곳이 우선이어서일까.
이내 주변은 고요해지고 다른 사람들이 눈에 뜨이지 않으니 우리들끼리만 소풍 온 것 같다.
<소풍>하니까 갑자기 지나간 시대의 불행한 詩人 천상병이 생각났다.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을 때까지 聰氣를 잃고 바보처럼 살았지만 시 만큼은 아주 아름답게 써서 사람들은 놀라게 했다. 고문조차도 시인의 감성을 빼앗아가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다 알다시피 유명한 시 <歸天>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중략)....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고 노래하지 않았는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을 소풍처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만이 그리 할 수 있을 것이다.인사동 한켠 좁은 골목 안에 그의 부인이 운영하는 전통찻집 <귀천>이 있었는데 여생을 어린 아이 같은 남편을 돌보며 살았고 남편 사후에는 어렵사리 그 찻집을 운영하면서 유고집도 발간하는 등 성실하게 세상과 교통하다가 얼마 전 타계했다. 年前에 친구들과 함께 가서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주인 문순옥씨가 손수 재배해서 만든 모과차를 마셨던 일이 생각난다. 투박한 찻잔의 따스한 감촉과 함께. 부부가 모두 하늘로 돌아갔으니 찻집은 주인을 잃었다.
이제 저 아래 작은 골짜기에는 쌀알을 흩뿌려놓은 듯 흰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으니 그로써 작은 위안을 삼는다.
정상으로 가는 언덕바지에서 휴대폰 하나를 주웠다. 방금 지나간 산악자전거팀원 중 하나가 잃어버린 것이라고 짐작했다. 의자가 달린 테이블 위에 오색찬연한 간식 상을 펼쳐놓고 먹으며 주인을 기다리기로 한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산길을 달리는 것은 본인들은 신나는 일이겠지만 산을 훼손하는 첩경일 터이니 삼갔으면 싶다. 모두 일어서 내려가려던 참에 헐레벌떡 휴대폰 주인이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갔던 길을 되짚어 올라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는 그 청년을 뒤로 하고 먼저 내려간 친구들을 뒤따른다.
저 아래로 혼자 걸어가는 한 친구의 뒷모습에서 외로움이 아득히 묻어난다.
때마침 김윤종이 스마트폰에 저장된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익은 익숙한 멜로디가 발 밑으로 질펀히 깔린다. 황금빛 햇살과 찬란한 낙엽과 우리들의 다정한 노래. 금상첨화다. 발걸음은 저절로 가벼워지고.
아랫마을은 조용하다. 전에도 온 적이 있는 단정한 한정식집 <토지>로 들어선다.
가벼운 산행에 비해 오늘 점심은 좀 과하다 싶다. 이름도 잘 모르는 요리가 자꾸만 들어와 과식했다. 어쨌든 여기 참석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후식으로 얼린 홍시까지 먹는 호사를 누렸으니. 어쨌든 우리 모두 2022를 위하여 건배!
참석자 ; 김정차 박효범 정기봉 우무일 심항섭 이상훈 김윤종 민일홍 주환중 남득현 장용웅 이영식 권영직 위광우 정영경 정숙자 이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