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한 두 번 있을 법한 황금 연휴 기간, 설상가상 온 천지의 꽃과 신록이 ‘가족 친지들과 날 보러 와요~, 날 보러 와요~’하고 한창 유혹하는 그 손짓을 외면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5월의 연휴. 첫날도 아니고 끝 날도 아닌 중간에 가족들을 외면하고 마음을 내어 산행을 하기에는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을 듯하다.
지난 2년간 산을 멀리하고 지내다가 청개구리 심정으로 산행을 결심하고 수서역에 부지런히 도착하니 남학생들 여러 명이 웅성거리고 있다. 이상훈 회장과 한동건 남득현 등등.
차에 오르니 여학생들이 반긴다. 멀리서 부지런히 온 이석영과, 이성희 부회장, 내 당구 짝이었던 진영애, 정숙자, 전행선, 이현주, 겨울에 팔을 다쳤던 남영애, 김양자가 앞 좌석에 포진해있다. 중간 이후 좌석엔 남학생들. 모두 남학생 14명, 여학생 9명, 용기있는 오늘의 꾼들 합 이 23명이다. 모두 반갑다.
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건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회장은 김건택이 10분 늦겠다는 연락이 왔으니 기다리자고 말하고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고 연락도 두절, 할 수없이 예정보다 15분 늦게 출발했다. 차가 좀 달렸을 때 김건택이 수서역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온다. 결국 우리는 그를 못 만났다. 선농 축전 때 만났으니 그리 오랜만도 아닌데 서로 대화하느라고 창밖 경치 구경은 뒷전이다.
10시 조금 넘은 후 축령산 휴양림 입구에 도착. 어찌나 관광차가 많은지 우리는 매표소 훨씬 전에 내려서 걸었다.
축령산 반대편에 있는 서리산은 철쭉 군락지가 있는 아름다운 산으로 알려지면서 이맘때면 성시를 이룬다는 곳이다.
산행이 늘 서투른 나는 전날 홈피에 회장이 올린 글에서 등산 코스 와 하산 코스가 같다고 한 구절에 “힘들면 중간에 혼자 되돌아오자.”고 용기를 낸 것인데 이 말은 하얀 거짓말임을 차차 알게 됐다. 그러나 이 하얀 거짓말에 속아서 결과적으로 정상까지 무사히 오른 힘을 얻었으니 회장 땡큐! 늘 수고 많은 회장단 고맙다.
서서히 걷는 동안 길가에 앙증맞게 피어난 애기똥풀, 하얀 꽃을 피우고 있는 클로버 군락, 기타 이름 모를 풀꽃과 잡초들의 향기가 그윽하다. 노랗고 조그만 꽃을 피운 애기똥풀이란 이름은 유진희한테 배웠는데 요즘 어머니 간병하느라 바빠서 오늘 못 온 게 아쉽다.
시기적으로는 철쭉꽃을 보기에 늦은 때지만 올해는 이상 저온 탓으로 개화가 늦어져서 지금이 만개할 때라니 이때를 놓칠 새라 여기저기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초만원이다.
매표소부터 등산로는 평탄하고 돌부리가 없는 육산이 계속된다. 소나무 낙엽이 쫙 깔려서 융단처럼 푹신하니 발바닥에 느껴지는 촉감이 부드럽다. 그런데 역시나 오래 동안 산행을 쉬었던 내 체력이 문제다. 속이 울렁거려서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그래도 철쭉은 봐야한다고 복식호흡으로 힘을 기르며 걷고 또 걸었다. 나와 실력이 비슷한 행선이와 서로 돌아보면서...
날씨는 오후에 비가 온다던 예보처럼 비가 올는지 약간 흐려서 산행엔 도움이 됐다.
좌우에 도열한 갖가지 나무들에서 품어내는 피톤치드의 향을 음미하면서 앞만 보고 오르니 900m 지점, 여기서 2Km 더 가면 철쭉 동산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완만한 능선이라 훨씬 쉽게 걸을 수 있다.
어느 새 철쭉동산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꽃동산에 도착한다. 내 키보다 큰 철쭉들이 하늘을 가리고, 그 아래 오솔길이 한없이 뻗어있어 머리 위로 만개한 꽃을 보며 환성이 터졌다. 여기 철쭉은 특이한 종류 같다. 진달래 같은 모양에 빛깔은 벚꽃처럼 밝은 분홍이다. 얼핏 보면 진달래로 착각할 정도인데 “가운데 꽃술이 좀 진한 색이니 나는 철쭉”이라고 외친다.
이쯤에서 은발의 사진작가 한동건이 여학생들만 두 명씩 세우고 사진을 찍어준다. 꽃 속의 꽃들 아홉 송이 모두 예쁘다.
철쭉 동산 끝에서 정상까지는 350m이고, 여기서 하산 코스가 있지만 힘들지 않으니 모두 정상까지 가자고 회장이 격려한다. 행선이와 나도 OK. 숨을 몰아쉬며 거북이 걸음으로 올랐다. 드디어 정상. 해발 832m.
자리를 펴고 간식꺼리를 내놓는다. 이재상은 오가피주를, 작은 이종건은 체코산 보드카를 꺼낸다. 보드카의 브랜드 명은 ‘쇼팽’. 이름답게 병에 오선지가 그려있고 병 모양도 예술적이다.
여기서 단체 사진을 또 한 방 박고 서둘러 하산 길에 오른다. 하산 길은 오솔길이 아니라 넓은 산책 코스. 작은 풀들과 완만하고 고운 흙이 피로를 잊게 하는 길이 이어진다. 철쭉 동산에서 하산했으면 고생했을 텐데 이 길은 산길이 아니라 들판길이다.
조금 내려오니 포장도로. 林道, 나무를 베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란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차도를 따라 주차장까지 와서 좀 더 가니 전망대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본다. 건너편 축령산이 보이고, 사방의 봉우리가 발 아래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 봉우리마다 빼곡하게 채워진 나무들이 신록에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난다.
산에는 왜 고생하며 오르는지? 자문하며 올랐던 서리산. 지금 그 해답을 얻는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작은 세상, 그 세상속의 나는 더 한 없이 왜소하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지기 위하여 오른다.”고.
전망대를 지나 식당에 도착하니 벌써 모두 앉아 식사를 시작하고 있다. 비빔밥에 해물파전. 반찬들이 모두 너무 맛이 있다. 열무김치는 주인이 직접 산에서 채취한 고로쇠 약수로 담갔단다.
식사가 끝나고 장용웅이 마석 다윗동산에서 커피를 쏘겠다고 하여 차는 다윗동산으로 향한다. 몇 년전 체육대회를 할 때 가본 다윗동산은 그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곳곳에 통나무집이 신축 됐고, 우리가 바비큐를 먹던 자리는 잎사귀가 손바닥 만 한 후박나무들이 큰 키로 하늘을 가리며 노천 카페를 만들고 있다. 후박나무는 흡사 목련꽃 비슷하지만 더 크고 품위 있는 순백의 꽃을 한창 자랑하는 중이다. 거기서 차를 마시고 경영주인 장용웅의 매제 안내로 가벼운 산책을 했다. 양지쪽에 반달곰 새끼 두 마리가 껴안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게 너무 귀엽다. 그 뒤 우리에는 그들의 엄마 아빠 반달곰이 조용히 휴식 중이다.
다윗동산에서 잠시 휴식으로 피로를 잊은 후 서울을 향해 GO, GO!
차 안에서 재담꾼 이재상은 노준용이 최근 목 디스크 수술을 받고 노래를 못 부른다면서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한국과 관계있다고 얘기를 푼다. 프랑스인 구노는 원래 신부가 되려고 신학교에 갔는데 신부보다는 음악가가 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의 절친한 급우 엥베르는 신부가 되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 최초로 천주교를 전파한 신부로 오게 됐다. 당시는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기라 엥베르 신부와 2명의 보좌 신부는 결국 순교했고, 이 소식을 들은 구노는 참담한 마음을 담아 ‘아베마리아’를 작곡했다는 설명. 그 세 명의 유해는 지금 명동성당 지하에 안치됐다고 한다.
가슴 아프고 미안해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오는 동안 즐겁고 꿈같은 서리산 산행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