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갑산 산행기(176회)
이 성 희
잔인한 달 4월이 가려 한다. 오늘, 그간의 우울했던 장막의 한 끝을 걷어 올리고 잠시나마 모처럼 찾아온 따뜻한 햇볕을 반가이 마중해 본다.
더구나 이번엔 여학생들이, 멀리 제천에서 올라온 신덕애를 비롯하여 대거 열 세 명이나 참가하여 한결 힘이 난다. 올 봄은 이렇게 더디게 더디게 왔으니 부디 게으름을 부리며 우리 곁에 오래도록 머물러 주기를....
충남 청양군에 자리 잡은 七甲山은 차령산맥줄기에 (해발 561m) 솟아 있는 백제시대의 鎭山으로 제천의식이 행해졌다고 한다. 이 산은 동쪽의 두솔성지와 도림사지, 남쪽 금강사지와 천장대, 남서쪽 정혜사 그리고 서쪽 長谷寺와 연대된 百濟人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란다. 하기야 이 땅 어딘들 역사의 숨결이 배이지 않은 곳이 있을까.
터널까지의 길이 막혀 산 중턱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가는 길은 아주 평탄하다.
한 발씩 내딛는 걸음걸음 마다 꽃잎이 하늘거리며 떨어진다. 바람은 서늘하고 공기는 맛있다. 가슴 깊숙히
숨을 들이마신다. 주변의 모든 그림이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대로라면 마냥 걸어도 좋을 것만 같다.
그러나 산은 언제나 그렇듯이 만만치 않은 부분이 있게 마련, 정상으로 연결된 계단이 결국은 한바탕 땀을 빼게 한다. 정상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나서
어디로 내려갈지 몰라 대장(!)을 한참이나 찾았다. 미리 내려가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마치 목자 잃은 양떼들 같이 우왕좌왕 했다. 표현이 좀 지나쳤나?
하산 길은 오르막보다 조금은 거칠다. 콩가루같이 부서져 흐트러지는 흙을 밟으며 명현이와 얘기하며 부지런히 걷는데 웬 남도 아저씨 하나가 사이사이에 자꾸만 끼어들어 가르치려 해서 한동안 곤혹스러웠다. 친절도 이 쯤 되면 병이랄 밖에. 또 어떤 사람은 <콩밭매는 아낙네야...>하며 칠갑산노래를 고래고래 악을 쓰며 부른다. 귀를 막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나보다. 이윽고 長谷寺에 이르렀다.고개 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절집은 의외로 조촐해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역시 담백하다는 느낌이다. 때가 그러한 만큼 고즈넉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번다하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요즘은 큰 절들이 대다수 그렇듯이 새로운 건물을 짓느라 마치 경쟁을 벌이는 것 같은데 이렇게 자갈마당은 비어 있고 오래되어 이끼가 낀 돌계단은 예스러우며 정답다. 구태여 가득 채우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매 또한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머리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그 경관만은 어디다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몇 백년은 되었음직한 고목들이 사방에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어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조차 들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대숲은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번갈아 허리를 굽히며 쑤와아쑤와아 일렁이는데. 누군가 그 소리를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마음 한 켠에 쌓여 있던 묵은 상념들을 씻어내고도 남는다.
앞산은 온통 애플그린(오늘 배운 말임)으로 물들었는데 사이사이 연분홍과 흰 꽃들이 숨어들어 조화롭게 들어앉았다. 우리는 그 어쩌지 못할 정도로 고운 파스텔화속으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깊이 빠져 걸어 들어갔다.
늘 다니는 익숙한 길에서는 매양 대하는 바위나 나무 또는 새 그리고 구름에게까지라도 인사말을 주고 받기도 할 수 있다는데. 나는 언제쯤에나 그렇게 속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자갈길을 얼마쯤 걸어서 외진 곳에 자리잡은 식당에 도착했다. 마침 보령 사는 김정식이 쑥떡과 매실주를 가지고 와서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참으로 기쁘지 아니한가!> 이 말이 저절로 나온다. 너무 지체한 탓에 변변히 이야기도 못하고 바로 돌아간 것이 못내 섭섭했다.
식당 아래에는 산그림자를 안고 연두빛 강물이 끝없이 일렁이고. 우리들의 마음도 저절로 푸르게 푸르게 흔들린다. 늦은 점심인 탓도 있지만 유명한 곳으로 납품을 한다는 민물참게 요리는 별미중의 별미여서. 아줌마가 퍼 준 사발의 고봉밥을 모두 비우고 무쇠솥의 누룽지까지 싹싹 긁어 먹는다. 식후에 식당 앞 노천 의자에 앉아 두 마리의 타조가 노니는 광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니 대도시의 멋쟁이 카페가 부럽지 않다.
장곡사 앞산의 말할 수 없이 고운 숲의 빛깔과 연두빛 산그림자를 품고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의 흔들림, 뱃속을 다 드러내놓고 바싹 여위어가면서도 의연히 잎을 피워내는 고목의 풍경은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참석자명단
남자 ; 이상훈 황정환 심항섭 김두경 박찬홍 주현길 박효범 우무일 강기종 정만호 송 인식 정기봉 김성광 박태근 주환중 변병관 남득현
여자; 전행선 이현주 김명현 백창숙 김성은 강인자 김양자 유정숙 방유정 진영애 정 숙자 신덕애 이성희 (김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