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을 기다리며
아침 산책길, 개구리의 몸 조각 몇 개가 길바닥에 흩어져 있다. 경칩이 지났어도 꽃샘추위인지 아직 날씨는 싸늘한데 성급한 개구리가 밤길을 나섰다가 변을 당한 모양이다.가슴을 파고드는 한기에 춥다 춥다하며 몸을 움츠리는 동안에도, 계절의 톱니는 조금씩 조금씩 돌아가고, 거기에 맞추어 모든 자연 생물들의 생명을 향한 열정은 쉬지 않고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었는가 보다. 마당 화단에는 쌓였던 눈이 녹고 보니 어느새 튜울립 새싹이 소복소복 나와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 겨우내 칙칙하던 앞산의 소나무 잎들이 칙칙함에서 벗어나 푸르른 색감으로 한층 밝아져 있다. 자연의 풍광은 이렇듯 변함없이 반복하여 계절을 품어내건만, 자연속의 나는 그렇지도 못한 것 같다. 아침에 눈 뜨면 밤새 전신에 고인 기가 불끈불끈 근육의 힘찬 기백과 파동에 몸이 튕겨져 일어나곤 했는데, 이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에 나서는 일이 귀찮아지고, 걷는 것도 속도가 떨어져 천천히 걷게되고, 어슴프리 땅거미 지는 때에 가까운 사람들과 어울려 잡다한 화제로 술 마시는 일도 꽤나 큰 즐거움이었는데 그마저도 활력이 떨어지는 듯하다. 먹던 량에 비해 훨씬 적은 량에도 취기가 빨리 오고, 속으로 이건 아닌데 하고 당황스러움에 자신을 되짚어 보곤 한다.개개인 간에 약간씩 다르긴 해도 거의 유사한 유효기간을 가진 1회용 배터리의 용량이 바닥을 향해 다가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게도 허전해지는 느낌이다.
2주쯤 전에 지역 산악회에서 시산제를 한다고 해서 좀 일찍 나섰다. 시작 전에 용문산에 오래간만에 다녀오려고....쌓인 눈이 채 녹지 않은 산에는 안개까지 끼어 좀 어둑한 편이고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산행하는 사람이 없어 고요한 가운데, 눈이 흘러내리며 돌과 돌 사이 계단을 메운 채 얼어서 경사진 상태의 빙판이 도처에 갈려있어 미끄럽고, 아이젠을 착용했는데도 다리에 긴장감이 고조되어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오른다. 숨도 가빠오고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듯 눅눅한 개운하지 못한 느낌에 발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며 보니 아이젠 한 쪽이 풀어져 없다. 50여m나 되돌아 내려가 아이젠을 찾아 착용하고 다시 오르며, 사람이 생각에 빠져있으면 오감을 통해 전달 돼 오는 감촉을 인지하지 못 하는 구나하는 것을 새삼 느끼며, 약간 얼은 채 하얀 성애를 뒤집어 쓴 소나무 잎, 시 꺼멓게 그을린 바위들, 말라버린 초라한 몰골의 산 풀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수북수북하게 눈이 쌓여있는 골짜기를 훑어 내리는 바람소리, 그리고 시야를 점점 좁혀오는 안개 때문인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 생각이 나며 마음이 착잡해진다. 몇 해 전인가 이 코스를 오르던 그 친구의 모습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에 이름을 크게 불러본다. 연거푸 서너 번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아! 아! 아!...하고 산울림 되어 골짜기를 가득 채우는 메아리뿐.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에 바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빠져든다. 삶에서 힘들고 지쳐있을 때 진정어린 따뜻한 마음으로 지지, 격려를 해주지 못했던 것 같은 자책감, 남은 삶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픈 자괴감이 휑하니 가슴을 관통하며 골짜기 속의 안개만큼이나 어둡고 무겁게 닥아 온다. 미소 짓던 그 모습이 그립고 보고 싶지만 만나질 수 없는 현상이기에 마음이 아파오고 슬픔이 저 밑에서부터 고여 올라온다. 마음이 심드렁해지니 더 오르고 싶은 마음도 삭으러든다. 마당 바위에서 돌아섰다. 한 참을 내려오니 그제 서야 낮선 등산객 2~3명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안녕하세요, 수고 하십니다 하며 올라온다. 거의 다 내려와 이제는 됐다하고 안심하는 순간 미끌 하더니 기어이 한 번 넘어지고 말았다. 어디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손목에 통증이 오는 것을 느끼며 그나마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에 몸을 털고 일어나 일주문 앞에 오니 많은 회원들과 지역 인사들이 대 여섯 군데의 화덕을 중심으로 서로 환담을 나누며 고기를 굽는 연기를 피어내고 있다. 아는 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이곳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떡국과 술과 고기를 대접하는 번잡스러움 속에 반갑게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과 더불어 소주 몇 잔 하면서 조금 전 까지 계곡 속에 잠기어 있는 짙은 안개처럼 답답하고 우울하게 머물고 있던 감정을 조금씩 걷어내고 있다.
諸行無常이라 했던가? 세상 모든 존재의 생성과 성장, 노화는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는데 지금 여기에 머물고 있지 않은 과거의 일에 매몰되어 있음은 하나의 집착이겠지! 지난겨울 동안 나 스스로가 채색한 마음속의 어두운 색감을 훌훌 털어 벗겨내고, 밝고 따뜻한 색감으로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여 아름다운 꽃향기가 가득한 어느 봄날 산 넘어 남촌 이란 노래처럼 시간적 공간적으로 거리가 멀어져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시 안겨오길 기대해 본다.
2010.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