哦嗟山 有感 (284회 산행기)
이 성 희
광나루역 1번 출구 주변은 혼잡하기 이를 데 없다.
혼자 서서 한참을 찾았는데 아는 모습이 눈에 뜨이지 않고 젊은이들만 떼를 지어 모여 있 다.
이달은 잦은 행사 탓에 모두 피로감을 느낀 듯하다. 예상은 했지만 다 합해야 고작 열 명밖에 되지 않는다. 우려가 현실이 된 듯하여 안타깝다. 이제 우리 산행 팀의 몸집은 여윌대로 여위어 앙상해지고 말았다.
아카시아는 지고 넝쿨장미가 한창이다.
땅에 떨어진 꽃잎에서는 아직 향기가 남아 있는데 어느새 新綠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초록이 완연하다.
광나루 역에서 출발하여 江北 특유의 구불구불한 옛 골목길을 돌아 산입구로 들어서니 후텁지근하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시원한 그늘이 눈에 들어온다. 숲의 고마움일 터이다. 인근의 주말농장에선 채소와 들꽃이 어우러져 자라나며 아기자기한 풍경을 연출한다. 각 이랑마다 이름이 나란히 붙여져 있다. 흙을 만지고 있는 아이와 젊은 부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哦嗟山, 해발 295m의 야트막한 산. 광진구 광나루 북쪽에 위치하며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와 광주산맥의 끝자락을 이루고 있다.
三國時代에는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戰略上으로 매우 중요한 한강을 가장 오랫동안 차지한 국가는 단연 백제였다. 고구려에게 한강을 빼앗기기 전까지 약 500년 동안 이곳에 터를 잡고 있었다. 475년, 한성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함락되면서 개로왕은 전사하고 551년,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 한강 유역을 되찾지만 진흥왕의 배반으로 도로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590년, 온달장군이 한강 땅을 찾으러 전투에 자원했다가 화살을 맞아 전사하는 비극을 낳은 곳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패권국을 이루려면 꼭 한강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에 광나루는 늘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 옛날 그 시절, 戰死한 三國 병사들의 시신은 모두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그대로 방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면 이곳에는 千年 전의 고혼들이 방황하고 있을 터이다.
될 수 있는 대로 편편한 길을 찾아 천천히 올라가다 낙타고개에 이르러 아이스께끼(!)를 하나씩 입에 물고 아이들처럼 먹으며 걷는다. 얼음이 너무 단단하여 철썩 달라붙는다. 안쪽 깊은 곳까지 잡화상들이 들어와 장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번잡스러워 보였다.
오늘의 종착지는 대성암이다.
천년 사찰이라고도 한다는데 대웅전도 종각도 퇴락하여 누추하고, 안내판마저 반나마 지워져 있다. 절 살림의 팍팍함이 짐작된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風光만큼은 그 모든 남루함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멀리 아찔하게 펼쳐진 나루 물결의 반짝임이 날카롭게 두 눈을 찌른다.
잠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내려오는데 길가의 바위 위에 볼 붉은 어린 三男妹가 땀을 들이고 앉아 있다.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아이들의 상큼한 미소가 꽃보다 더 예쁘다.
소나무 군락 아래 그늘에 모여 앉아 잠시 쉬기로 한다. 그래도 아직 5월이어서인가. 江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멀리 한강을 조망해본다.
말은 말로 이어지고 또 다른 이야기로 번지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육두문자도 줄줄이 새고....... 아슬아슬하다. 말릴 터수도 안되는 것이. 더구나 오늘은 여자 혼자여서 나는 바다 가운데 홀로 떠 있는 섬처럼 외롭기만 하다.
참석자.
김윤종 강기종 이명원 이종건 박찬홍 신해순 정만호 허창회 심항섭
이성희
산행 인원이 평소보다 적었지만 날씨 좋고 풍광이 좋았고 푸짐한 갈비로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문학과 역사가 어울어진 깔끔한 산행기가 그 즐거웠던 산행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