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계 산 산 행 기 (168회)
이 성 희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화물터미널 앞 횡단보도. 녹색 불이 들어오기를 목늘이고 기다리는 동안 7월의 태양빛은 머리 위로 사정없이 내려쪼인다. 건너편 그늘막에서는 먼저 온 친구들이 손짓하는데 신호등은 바뀔 줄을 모르고 시간은 아득하고 멀기만 하다.
길 가에 있는 다 낡아빠진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의 <농사꾼> 김영길 동문이 새벽에 자신의 밭에서 직접 따고, 쪄서 가지고 온 따끈따끈한 옥수수를 한 자루씩 나누어 준다. 친구의 정성이 합쳐져서 몇 배나 더 맛이 있다. 무겁고 힘이 들었을 터인데... 그 정성이 늘 고맙다.
청계산은 여러 번 올랐지만 오늘 코스는 초행이다. 비에 씻긴 鋪道는 티없이 말끔하고 주변에는 세련된 쇼핑센터가 즐비하며 과천으로 나 있는 널따란 신작로에는 차량통행이 적어 멀리 소실점이 보일 정도로 시원스레 뚫려 있다.
일행 스물 여섯 명은 물류센터 쪽으로 꺾이어 산의 들머리 쪽을 향해 걷는다. 대형 트럭들이 줄지어 서 있는 뒷길은 청소를 하지 않는 휴일이라 대로변과 달리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각종 쓰레기가 발길에 채인다. 얼굴만은 빤드르르하게 단장했는데 뒷목에는 땟국이 흐르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그러나 숲길로 들어서자마자 그러한 불쾌감은 곧바로 잊혀진다. 가까운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이므로(!). 더구나 하늘은 쾌청하고 습도도 낮아서 서늘한 기운마저 감돈다. 발밑의 흙은 떡메로 다져진 찰떡반죽처럼 부드러웠고 길은 탄력있게 뻗어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길이 저절로 가벼워진다.
높이 올라야 맛인가. 오늘은 여기까지다. 옥녀봉 바로 아래 자리 잡고 앉아 좌판(?)을 벌이고 먹을거리 보따리를 끌른다. 아무리 짧은 코스라도 때가 伏中인지라 모두들 땀에 흠뻑 젖어 상기된 모습들이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그저 단순하게 웃고 먹고 마시고. 꿀맛같은 휴식.
내려오는 길. 장마철이라 그럴 것이다. 淸溪라는 이름에 걸맞게 맑고 시원한 물이 계곡에 넘친다. 소리만 들어도 좋다. 늘 듣기만 했었는데 오늘은 그냥 흘려버리고 가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 몇몇이 아래로 내려간다. 서두를 것이 무엇인가. 지금 이 시간이야 지나가버리면 그만인 것을.
양말을 벗고 물에 발을 담근다. 후끈거리던 발에 찬물이 닿자마자 <아이고시원해>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내친 김에 무릎까지 차도록 들어가 본다. 머리 끝까지 냉기가 전해지는 것 같다. 친구가 옆에서 물을 끼얹는다. 아이처럼 哄笑가 터져 나온다. 저 아래에서 젊은 남자가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조금 민망하다.
오랫동안 같은 시간을 공유해온 가까운 친구들이 지우개로 지워지듯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일은 한없이 쓸쓸한 일이다. 가족을 잃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그저 마음 속에 묻어 둔 채 말하지 않을 뿐이다. 동무들아 우리 오늘은 웃음으로 보내자.
참석자 : 이상훈, 송인식, 김두경, 김영길, 황정환, 민일홍, 주환중, 이재상, 장용웅, 정기봉, 변병관, 우무일, 강기종, 박찬홍, 이영식, 심항섭, 권영직, 김윤종, 신해순, 정만호, 김상건, 박효범, 류진희, 정숙자, 정영경, 이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