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산행기(158회)
이 성 희
9시 25분, 구기동 현대빌라 앞에는 이미 낯익은 친구들이 여럿 기다리고 있다.
며칠 동안 맑게 갰던 하늘이 오늘은 안개와 구름 탓에 낮게 내려앉았다.
열심히 문자를 보냈으나 여자는 역시 세 명 뿐이다. 거리가 먼 까닭일까?
오랜만에 건목회의 임승빈이 눈에 띄고 남득현은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고정멤버가 된 듯싶어 반갑고.
우리 일행 바로 앞에는 젊은 아저씨가 떡 목판에 쑥인절미를 올려놓고 칼로 재빠르게 잘라 열심히 콩가루를 묻히며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늘 끄트머리를 장식하는 신해순을 기다리기 위해 몇 명이 남고 나머지는 왼쪽의 약간 가파른 소로로 들어선다.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인가 예상과 다르게 그리 붐비지 않는다.
지금은 늦여름과 가을 사이, <여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대지의 숲은, 그 긴 꼬리에서 벗어나 이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한다. 조금씩 윤기를 잃어가는 나뭇잎들은 발밑에서 갖가지 색으로 피어나는 작은 풀꽃을 내려다보며 덕석같은 짐들을 내려놓고 깃털처럼 가벼워지려 한다.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생지를 찾아다니는 열정이 한 자락 이해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여전히 오르막에선 땀이 많이 나지만 잠시라도 쉴 때면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목덜미로 찬 기운이 서늘하게 스며들어 어깨를 움츠리게 되고 한줄기 땀방울이 등줄기를 훑어 내린다.
뒤돌아보면 허위단심, 벼랑 끝에 섰던 적도 있었고, 짧은 기쁨도 그리고 깊은 슬픔도, 절망도 있었으니. 무심한 세월은 물과 같이 이리 저리 부딪히며 흘러 흘러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엄밀하게 말하면 길은 뒤에만 있다고 한다. 앞에 펼쳐진 길은 앞 사람들이 걸어간 길이므로 내 길은 아닐 것인데. 자신의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우리가 어떤 상황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지나간 일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거는 과거의 현재이고 미래는 미래의 현재일 뿐이므로 우리는 그저 현재만을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다. 현재는 이리도 소중한데 이렇게 터무니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어느 저명한 여류소설가가 장편소설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렁뱅이로라도 살아 남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고.
이즈음 낙엽 따라 가버리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이제는 놀랄 것도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스산해진다. 우리는 지금 혹시 겨울의 초입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비봉을 스쳐 지나 사모바위로 가는 길목에서 지름길로 치고 올라온 신해순 일행과 만난다. 떨어질 듯 위태롭게 얹혀 있는 사모바위 옆에 서니 구름 걷힌 푸른 하늘 아래,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북쪽에는 백운대와 인수봉, 남쪽으로는 백악과 인왕, 남산, 그리고 관악까지. 서울의 하늘이 이렇게 맑게 갠 적이 별로 많지 않을 것인데.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한 번 해본다.
오늘 산행은 여기까지라는 권회장의 말에 모두 배낭을 내려놓는다. 마땅히 평평한 지역이 없어 적당히 바위 위에 둘러앉는다. 언제 보아도 늘 우리들의 식탁은 잔치 집같이 풍성하기 이를 데 없다. 각종 과일과 떡과 지짐과 그리고 슈크림, 호두까지.
점심은 구기동 아랫마을 [그 옛날 민속집]이다. 근처에 사는 여자 부회장 김성은이 반갑게 합류하고 주환중이 다 늦게 배낭을 메고 나타난다. 우리들과 같이 가지 않고 어드메 산엘 혼자만 다녀오시는지?
보쌈과 김치두부, 따끈한 비지, 그리고 복분자 술, 나른한 피곤과 함께 우울을 한 방에 날려버린다. 더구나 오늘 점심은 오랜만에 나온 김두경이 쏜다니 더욱 맛있고 행복하다. 복분자술 한 잔에 남영애의 얼굴이 도화빛으로 달아오르고, 옆에서 놀리는 친구들의 유쾌한 웃음, 웃음들......
점심을 끝냈는데 아직도 한낮, 흰 구름 떠가는 가을 하늘은 더할 수 없이 청명하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허공으로 퍼져나간다.
참석자 명단
이상훈 박효범 박상규 민일홍 송인식 이명원 정기봉 이재상 김두경 이영식 위광우 남득현 임승빈 강기종 정태영 변병관 우무일 신해순 심항섭 권영직 주환중 박정애 남영애 이성희 김성은
항상 건강이 무엇보다 우선인듯 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