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나와 바둑을 두어오는 동갑내기 직장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나던 날은 새로 부임한 신설학교 숙직실이었지요.
트윈베드에 비스듬히 누워 들여다보던 텔레비전이 무료해서 둘이 거의 동시에 생각해 낸 것이 옆에 놓여있는 바둑판이었지요. 바둑이나 한판 두자고 했던 그날 이후 우린 30년 넘는 세월을 맞수로 승부를 겨뤄왔답니다.
수백 번이나 마주앉아 겨룬 승부는 둘 다 은퇴한 지금까지 대국 장소만 바꿨을 뿐 매주 화요일 마다 계속되고 있습니다. 흔치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닐 겁니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게 가는 세월인데 이런 일을 아름답다고 멋지다고 하면 괜스레 거시기하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품성이 어디 갔겠어요. 이기면 조금 너그러워지고 지면 남 너그러운 것까지도 김새고 그랬거든요.
어느 날 승부를 겨루다 마주 보니 30년 넘는 세월이 아주 쉽게 빠져나간 자리에 머리 허연 이 친구가 앉아 있더군요. 지나간 날들은 참 빠르네요.
그래도 하루하루는 즐거운 거지요. 아침 동 트는 시간에 맞춰 산길로 접어들면 세상의 어둠이 서서히 거둬 지고 아무 색없는 그냥 새벽빛이 천천히 나타나고 그러고나면 숲 속에는 상처 하나 없이 쭉 뻗은 나무와 기분 산뜻한 내가 서 있습니다.
그럴 때는 늘 하던 것도 얼마든지 편하게 안해도 되고 늘 믿어왔던 것도 얼마든지 우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느새 색깔을 띠기 시작한 햇살이 촘촘하게 서 있는 나무기둥 사이를 비스듬하게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