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漢山城 탐방기(258회)
이 성 희
개통된 지 20년이 넘었다는 마천역. 이쪽에서 출발하는 것은 꽤 오랜만이다. 현재 개발이 진행중이어서 그런지 들머리까지의 주변 풍경이 어수선하다. 허물다 만 집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어지럽고 부서진 건축재들이 발끝에 채인다.
성불사앞까지 와서야 겨우 진정이 된다. 미세먼지까지 보태 사방이 답답한 안개에 둘러싸여 시야도 부옇다.
봄철이면 늘 겪는 일이지만 비가 내리지 않아 물기없는 목마른 산등성이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검정색 바짓가랑이가 회색빛으로 변했다. 요즘은 푸른 하늘 본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옛 시인이 노래했던 <옥색 空氣>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전통색인 <옥색>이란 말만 떠올려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곤 했는데.
뒤에 오는 친구들을 기다리기 위해 서서 물을 마시다가 무심히 앞을 바라본다. 갑자기 전면에 노란색을 흩뿌려놓은 듯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회갈색 바탕 위에 선명하게 수놓아진 꽃들은 아마도 생강나무의 群落인 듯.... 눈을 크게 떠 한참을 바라본다.
자세히 보아야만 눈에 띈다. 이 가뭄 속에서도 저들은 저렇게 치열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구나. 해마다 맞는 봄이면서도 그 때마다 생명력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마 해가 갈수록 더울 그 느낌은 强度를 더해질 것 같다.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안타까움. 곱고 고운 꽃들의 향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계단이 새로 여러 군데 생겼다. 사람들이 다니기에 편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은 틀림없는데 어느 산이나 예외 없이 계단 옆에는 늘 샛길이 새로이 생기곤 한다. 아마도 이는 自律과 他律이 相衝일 것이라 짐작한다.
힘이 있을 때는 편함을 마다하고 미끄러지면서도 계단을 거부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리에 힘이 빠지면 편리함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順理일 것이다.
西門옆 빈터에서 간식상을 차린다. 오늘은 단연 이종건 전 회장의 깨강정이 인기만점이다. 한 상자를 통째로 가져왔는데 순식간에 동이나고 말았다. 다음에는 박스째 들고 오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사명(?)이 주어진다.
바야흐로 산성 내 식당가는 초만원이다. 미세먼지가 나쁨 단계인데도 가족동반한 나들이객들과 등산객들이 합쳐져 주차장마다 차들이 넘쳐나고 남한산성은 이들을 머리에 이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들의 단골집 <재넘어 주막>에서 다리쉼을 한다.
말의 성찬은 음식을 차려놓으면 더욱 다양해지는 법, 가볍게 내뱉은 한 마디의 말에 여러 가지 깊은 철학적(!) 해석이 덧붙여져 좌중이 허리를 잡고 웃게 만든다. 한 사발의 <웃음의 보약>은 마음의 건강으로 스며들고 적막하기조차 한 일상을 따뜻이 보듬는다.
긴 줄을 서서 버스를 타고 山城역에서 내려 지하철로 가락시장까지.
오로지 커피를 마시기 위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끝에 별다방 한 구석에 자리잡고 앉는다. 드디어 한 잔의 향기로운 커피와 한 조각의 케익으로 우아하게 마침표를 찍는다.
지하철에서 내려 우리동네 재래시장인 제일시장으로 들어선다. 인근에서도 이름난 큰 시장이어서 언제나 산더미같은 상품과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번듯한 야채상 점포 옆에 쪼그려 앉은 할머니한테서 봄나물을 두어 가지 산다. 달래도 한 웅큼.
검정 봉지를 손에 쥔 채 흔들거리며 부용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물속에 오리 가족이 한데 모여 물장구치며 놀고 있다. 오늘 하루 이렇게 또 저문다.
참석자
김윤종 이명원 박상규 허창회 이종건 장용웅 강기종 황정환 정기봉 이상훈 신해순 박효범 정만호 변병관 정숙자 남영애 진영애 이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