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되면 모기 입이 비뚤어질 정도로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해진다는데 이젠 옛말로 치부해야 할까보다. 처서가 지난 데다 8월 15일 이후로는 물이 차져서 수영하기에 부적합한데, 올해는 9월까지 수영장을 개장한단다.
이런 폭염 일기 예보에서 잔뜩 겁을 먹은 터라 지난 달에 이어 이달에도 산행을 포기하고 전날의 과로까지 겹쳐 오늘은 오랜만에 늦잠을 푹 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도 허용되지 않는지 요란한 전화벨이 울리고 꼭 와야 된단다. 오전 9시 5분. 나는 컨디션 따라서 대공원 삼림욕장이나 갈까하며 아무 사전 준비 없이 서둘러 대공원역 2번 출구에 도착하니 10시 5분. 5분 지각이다. 폭염에 아랑곳 않는 선남선녀들이 우글거리는 속에서 한참 우리 팀을 찾으니 위광우 김성광 변병관 셋이 손을 흔든다. 나머지는 벌써 출발했단다.
위광우는 빨간 베레모에 빨간 스카프, 흰 티를 입고 제법 빠리장 흉내를 냈다. 그런데 , 빠리장들은 위광우처럼 삐쩍 마르진 않았지.ㅎㅎㅎ. 늦는 나를 기다린 이 세 사람은 16회의 멋진 기사들이라고 생각하며 가는데 대공원 옆 등산로 입구에 다들 모여 있다. 그럼 그렇지. 다들 멋쟁이야. 모인 사람은 남자 17명, 여자는 만년 개근하는 이성희와 나 둘 뿐이다. 합이 19명. 오, 착한 친구들.... 박정애 남영애 정태영 정만호 강기종 등이 기다려졌다.
정태영은 요즘 혼자 등산 열심히 다니는 것 같은데 다른 바쁜 일이 있는지, 정애는 입원중인 어머니 문병 갔는지 두루 궁금하다.
6월 초 북한산에서 팔을 다친 송인식은 아직도 물리 치료중인 왼 팔에 파스를 잔뜩 붙였다.
자유롭게 팔을 쓰려면 6개월 걸린다니 앞으로도 3개월 남았다.
이상훈은 반바지로 드러난 무릎에 거즈를 붙였는데 7월 29일 사상자가 13명이나 났던 날, 북한산에서 벼락 치는 소요에 놀라 뛰어내려오다 넘어져 다친 영광의 상처란다. 휴우, 하마터면 오늘 못 볼 뻔 했네. 매년 2월에 시산제 지내는 덕에(?) 아직 산행에서 큰 사고 없이 지낸 것 같다.
모두들 섭씨 32도라는 폭염 속에 매봉 정상 정복은 포기하고 정상 아래 헬기장까지 올랐다가 인덕원 쪽 청계사로 하산하여 점심을 먹자고 한다.
아이쿠, 나만 대공원으로 가면 아침도 걸렀는데 점심밥도 굶게 생겼다! 죽기 살기로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됐다. 설상가상 이재상은 오늘 산행기는 내가 쓸 차례란다.
갈 데까지 가자고 오기로 따라간다. 오늘 코스는 매일회의 단골 코스여서 익숙하긴 한데 이재상이 안내하는 길이 오늘따라 낯설고 길게만 느껴진다.
초반부터 예상대로 나는 힘이 들었다. 결국 김상건이 내 배낭을 메고, 위광우는 지팡이를 빌려주었건만 비지땀이 흐르고, 숨이 턱에 차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짐만 말고 내 몸도 누가 반짝 들어서 목적지에 내려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농담을 했다. 농담이지만 진심이다.
다른 친구들도 힘이 든 건지. 깨갱깨갱하는 나와 한 두 명을 배려한 건지 오늘따라 여러 번 쉬어갔다. 그래도 나는 곱절은 더 쉬어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이 나그네길 안개 깊은 새벽 나는 떠나간다...” 노래를 속으로 부르면서 끝이 안 보이는 길을 가다 쉬다하기를 반복했다.
매봉 턱 밑에서 나타난 내리막 샛길이 어찌나 반가운지, 몇 명은 매봉으로 올라가고 후미로 쳐져가던 오늘의 내 수호천사 김상건과 나는 아랫길을 택해서 서서히 걸어갔다.
한참 갔는데 대부분이 평평한 곳에서 자리를 깔고 쉬고 간식을 먹고 있다. 부침개 단골이던 이재상은 날이 더워서 인가 부침개 대신 영지버섯 술을 꺼내고, 꺽정이는 양갱이를 꺼내고, 과자가 나오고 박정애가 안 오니 과일이 없다며 모두 아쉬워한다.
이번엔 내 발에 쥐 한 마리가 붙었다. 쥐가 나긴 처음이다. 날씨 탓인가?
신해순 위광우 황정환 김성광이 아직 안 보인다. 전화를 해보니 매봉 정상이란다. 한참을 기다리니 그들이 나타난다. 김성광은 지난 달에는 수박을 인왕산까지 가져가더니, 이번엔 앉자마자 동네 공장에서 샀다는 추억의 꽈배기를 꺼낸다. 꽈배기를 꺼내는 그의 모자에서 낙수가 뚝뚝, 모자를 물에 담갔다가 꺼낸 듯, 땀이 저 정도면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겠다. 하여간 김성광이 도착하자 방을 뺄 요량이었는데 땀에 젖은, 말랑말랑한 맛이 일품인 꽈배기를 먹느라 지체했다. 김성광은 힘겨워하다가 혼자 쳐져서 길을 잘못 들어서 정상 쪽으로 가는 바람에 땀을 더 흘렸단다.
한 아이가 부모 따라 오르면서 힘들다고 울고 아빠가 달래는 모습이 보인다. 걔가 내 나이가 되도 지금처럼 울까?
꽈배기에 힘을 얻어 하산 길에 나선다. 나는 쳐질 것을 염려해 선두 그룹으로 출발했다. 하산 길은 좁지만 완만한 편이라 견딜만하다. 제법 그늘도 많고, 날씨는 맑지만 따갑지는 않다. 내 컨디션이 회복되고, 다들 유쾌하게 얘기하며 내려온다. 여자들의 전매특허처럼 알려진 수다는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스트레스를 날리는 묘약이라지 아마. 그래서 얼마 전에 모 일간지 주말 판에 연예인 등 수다쟁이 남자들 인터뷰까지 났었다.
언젠가 시산제를 지낸 청계사 옆 공터를 지나 하산하여 무사함에 감사하며 기념사진을 찰칵. 찍는데 2초 정도로 후딱 끝났다. 그래도 잘 나오겠지 확신한다.
절 앞 주차장에 오니 식당 사랑채의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다. 10명 정도 차를 탔는데 아직도 올라오는 차들이 많고 외길에 주차한 차가 많아 시간이 걸렸다. 큰 주차장이 절 앞과 좀 아래에 있는데 길에 세워둔 차를 단속하는 벌금을 받으면 길 소통도 원활해지고, 나라 살림이 좀 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키가 작아서 안 보이는 내가 앞자리에 있는 걸 모르고 우무일이 차 속에서 일행을 웃기느라고 한 마디. “아무도 이향숙이 손은 잡지 않는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다들 의아해하니 “이향숙이를 업고 왔기 때문에 손을 잡지 않았다.” 우무일은 누가 나를 업어서 올라온 줄 알고 있는데 유언비어가 이렇게 생기는구나.
다시 한 차로 나머지 친구들이 도착하고 1시 35분 경 버섯 전골과 파전으로 포식했다.
패션 보이 꺽정이가 오늘은 안 움직이고 대신 김성광 송인식이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아직도 팔이 불편한 송인식이 나머지 한 손으로 회비 수금을 서두른다. 나는 박효범 총무가 안 걷고 왜 돈을 받느냐고 물었더니 그동안 안 나오더니 총무 바뀐 것 잊었냐고 항의가 빗발친다. 내가 잠시 인식을 잘못했다고 해명하자 잠잠해진 총무. 그러고보니 아범이 오늘 안 왔네.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고 대충 파장 무렵 심항섭 회장은 선농 100호 기념 자축연을 9월 7일 압구정동 오미가에서 6시 30분에 갖는다고 공지사항을 발표한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는지 이어서 이재상이 갑자기 심항섭 혈액형을 아느냐고 질문한다. 여러 명이 A형이라고 대답, 본인은 B형이라고 답변하며 왜 자신이 A형으로 보이는지 의아해했다.
이재상 왈, A형은 소세지(소심하고 세심하고 지X같은) 성격이라고 웃긴다. B형은 오이지(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지X)같다나.
O형은 단무지(단순하고 무지하고 지X같고), A B 형은 지지지 (지X가 반복).
혈액형으로 보면 좋은 성격이 하나도 없네.
아까 탔던 승합차로 인덕원역까지 와서 손자가 보고 싶어 일찍 간다는 송인식 등 몇 명을 제외하고, 전철을 타고 사당역으로 향했다. 목적지 콩다방(커피 빈)이 초만원이라 호프집으로 가서 권영직 회장이 호프 한잔씩 쏘았다. 신해순은 배낭에서 한참 부스럭거리더니 백두산 갔을 때 사온 타로반을 먹어보란다. 밀가루를 한지처럼 얇게 부친 전병이라고 한다. 종이를 찢듯 찢어서 조금씩 맛보았다. 그저 밀가루 맛이다.
호프집에서 나온 후에도 그래도 정이 남았는지 이대로는 못 헤어진다나. 이성희는 집으로 가고,
결국 일요일 휴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 모씨의 전화를 받고 달려와 문을 연 선한 양치기 소년 이승희의 선양으로..... 내기 당구에서 이긴 신해순이 게임 값을 내고 나를 제외하고 양떼들은 양치기 소년이 안내한 식당으로 가서 피날레를 장식했다.
집에 와서 샤워하니 언제 산에서 고생했냐는 듯 가뿐하다. 그래 이맛이야! 산에 다니는 건.
참석자 : 심항섭 이성희 이향숙 우무일 정기봉 주환중 이영식 이상훈 송인식 황정환 변병관 민일홍 위광우 장용웅 김상건 이재상 김성광 신해순 권영직 등 19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