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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6 12:40

죽음의 공포

조회 수 3454 추천 수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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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포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발톱을 감춘 고양이처럼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극도의 공포와 혼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매우 무겁고 생각하기 조차 기분 나뿐 명제임에 틀림 없지만 어찌하겠나,넋 놓고 당하기보단 준비하며 받아 드리는 마음가짐, 종교관, 인생관이 확실히 정립된다면 공포의 충격에서 벗어나 수용하는 쪽으로 전이되지 않겠나.얼음이 물에 녹듯 서서이 용해되여 물이 되듯 말이다

.

소크라테스-그 는 왜 현자인가?

 

그 의 친구가 델포이에 있는 그리스 신전에 가서 ‘신에게 위탁하여 묻기를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답을 구하자 ‘소크라테스 보다 현명한 사람은 없다’라는 대답을 듣고 소크라테스에게 전함에 그는 자신보다 훌륭한 현자를 찾기 위해 당대 사상가 정치가 등을 두루 만나면서 내린 결론은 남들보다 하나 더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 것이 바로 ‘자신이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소크라테스는 인식했다는 것 이였다.남들은 다 자신을 잘 아는 것 처럼 애기하지만 우리가 흔히들 잘 못 이해되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다 속된 말로 주제 파악을 하란 애기가 아니라 나란 존재에 대한 미스터리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나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다

 

끊임없는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그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했다는 가설도, 당시에는 체계적 신학도 없었지만 생과 사는 독립되고 분리된 현상이 아니라 달이 차면 기울고 다시 차듯 변화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혼은 영원하다는 불멸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편안하게 독배를 마실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죽음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닥쳤다. 우리는 두 길을 간다. 이제 나는 죽고 자네들은 산다. 어느 길이 더 좋은지는 신만이 안다 영혼불멸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 건강하게 산 것에 감사한다. 의술의 신이 보호해 준 덕택이기 때문이다‘

크리톤,나는 아클레피오스(의술의 신)에게 닭 한 마리 바치는 것을 깜박했네. 미안하지만 자네가 그 일 좀 대신해주게. 부탁하네’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의 담담한 유언이다

 

그가 늘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아테네 인들이여, 이 말을 기억하라.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였다

깨달음을 얻은 선승들은 죽음을 어떻게 맞았을까?

 

선승들의 죽음을 초탈한 극적인 표현이 좌탈(앉은 채로 죽음) 입망이다 좌탈한 스님 말씀

서암대선사:임종을 앞둔 스님에게 제자들이 물었다

스님 열반송은 어떻게 할까요?

나 그런 것 없다. 굳이 누가 물으면 그 노익장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갔다고 전해라. 그게 내 임종게다

만공 대선사

목욕 단좌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자네와 나,이별할 시간 되었네’ 껄 껄 웃으면서 임종하였다

 

효봉스님:새벽 예불할 때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나 오늘 갈란다’라 하시며 이따금 ‘無라,無라’하시다 가셨다

 

그것은 우리 범부들이 언감생심인들 할 수 있냐?고 반문하지만 그 가능성은 제대로 명상을 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경우는 아니다. 외람되지만 남보다 조금은 죽음에 관심을 가졌고 나름대로 경전도 보고 임사체험 경험담도 듣고 이전부터 깊은 사색도 한 덕분에 죽음에 대한 통찰력도 생겼다. 나에게 깊은 감명을 준 스승과 책과 심리학자의 생사관을 중심으로 논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죽음은 왜 두려운가? 내가 극심한 공포를 경험한 것은 암 발병이후 2차 전이 검사였다

전립선 암은 특이하게 다른 장기보다 뼈로 전이되는데 뼈로 번지면 손을 쓸 수 없는 말기 시한부로 1년6개월이 고작이다. 6년전 엉치뼈 아래 간헐적 통증이 왔고 몸 무게가 6kg정도 빠져 혹시 암이 아닐까 의심되여 만성위염이 암으로 번지지 않았나 싶어 조직 검사를 한 결과 문제 없었으나 전립선 조직검사에서 암 판정이 나왔고 2차 전이 검사인 뼈 스캔과 MRI검사를 진행하였다. 결과가 나오는 7일간이 고비였다. 불면증으로 약을 먹고 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비장의 무기를 가동하였다.나의 생존기간을 1년6개로 상정하면서 극한의 상황에 무엇인가 대처할 방안을 찾는 작업이였다.

 

첫번째는 스승의 생사관이였다 죽음이 오면 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열해 보라는 것이다. 많을 것 같지만 5개 정도였다 진지하게 걸리는 것을 분석해 보니 그 자체가 부질없는 망상이였다. 예컨데 자식이,손주가,마누라가,하고 싶은 그 무엇이? 있기에 지금 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가 있었다

 

죽으면 마누라 고생 덜 시키는 것이요,자식 또한 마찬가지다. 몇 푼 안 되는 재산 병수발로 탕진한다면 넘겨 줄게 그만큼 줄어들 것이고 못 다한 꿈이 있다면 그 것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 이였다

.

70평생 꿈도 많았지만 오늘 이 모습 그대로가 내 인생 전부임을 깨달은 것이다. 인생이 별 것 아님은 명상을 통하여 ‘하루가 내 인생 전부임을 깨달은 것이다. 냉정히 생각해 보자. 잠자고 깨어나서 하루 일과를 나열해 보니 놀랍게도 일상의 일과는 반복 되풀이 됨을 자각한 것이다

 

. ‘내일은 뭔가 있을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에 인생을 맡기고 있음에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발견한 중요한 사실은 설령 그런 기대가 이루어 진다 해도 한 방이면 훅 날라간다는 사실이다. 즐겁고 괴로움이 맞물려 돌아가도 우리의 기억은 잔인하게도 즐거움보다 아픔을 더 강하게 기억한다. 그것도 오랫동안..

 

나는 여기서 하루가 내 인생 전부이고 아픔이 먼저 기억되는 24시 인생은 고단함과 피곤함 이였음이며 즐거움은 휘발성이 강하니 그런 면에서 죽음은 고단한 인생 청산이란 생각에 이르렀고 이 사실이 확실하고 명료하게 인식되는 순간 죽음이 거부할 수만 있는 게 아니라 받아 들이자로 전환하게 되였고 자연 수면에도,마음의 평정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나만의 불교관이다 내세가 있다면(윤회) 이 생에 내가 만든 業대로 달게 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옥 갈 정도로 악업을 지은 것도 아니고 천상에 태여 날 정도로 선업을 쌓은 것도 아니니 뭐 걸 맞게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남들처럼 소원 들어 달라고 부처 괴롭힌 적도 없고..의외로 담담해 졌다.

 

나의 스승은 죽음을 직면할 때 딱 두 줄로 명상한다. ‘여기까지 내 몫이다 변화가 있을 뿐 죽음은 없다. 온다 간다 걸림없다’ 이것이 전부다.물론 이 경지는 생사를 초탈한 도인의 生死一如觀이고 그렇게 살아 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나에 대한 선입견이다. 불교 신자이니 그렇겠지라는 안경을 쓰면 진실을 바로 볼 수 없다. 나는 어느 누가 묻더라도 이렇게 대답한다 ‘부처님은 나의 師父이지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인류역사상 가장 수승한 혜안 법안 천안을 갖은 世尊이고 그분이 깨달은 연기를 제대로 알면 모든 고통에서 解脫할 수 있다가 전부다

 

죽음 앞에서 왜 우리는 두려움을 갖을까?

 

두려움을 덜 느낀다면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확고한 신앙관이다.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소천)는 기독교인들은 원죄에서 벗어나 영생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 가니 두려움 보다는 오히려 경건함이 있을 것이고 불교도는 생과 사를 독립된 실체로 보지 않기 때문에 왔으니 가는 것이 순리로 받아 드리는데 또 다른 부류는 애시당초 나는 죽음과는 별개라는,생각조차 경원시하는 ,회피하는 부류라고 하겠다.이들은 대부분 斷滅論(죽으면 끝)자이다.

 

.대 다수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불행은 나와는 무관한 별개의 것으로 치부한다.예를 들면 벼락에 맞을 확률이 몇 백만분의 일이라면 분모 몇 백만에서 자기를 제외한 몇 백만으로 기준하고 나와는 無關한 일이 발생한 것 처럼 착각한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불행의 범주에 속하기를 의식적으로 회피한다.잘 못된 계산의 오류다.삶의 전제는 죽음이다.70억 인구중 150년후에 살아 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누구도 예외 일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불안을 숨기려고,망각하려고 감각적 욕망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냉정히 말하자면 5분후의 운명도 확실히 담보할 수 없다.죽음은 생리학적으로 심폐기능 정지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는 부처님의 전유물이 아니다. 學적으로 증명된 보편 타당한 自然法則일 뿐이며 단지 2600년전 원소,원자,소립자 개념조차 없던 시기에 부처님은 모든 원리를 思惟를 통해서 꿰 뚫은 것 뿐이다

.

죽음이 두려운 이유

 

우리는 질병중 불치병,암등을 두려워 한다.이유는 간단하다.삶을 담보할 수 없는 병이기 때문이다.경험칙상 웬 만한 병은 의술로 완쾌됨을 안다.걸려도 낫는다는 안도감이 있다. 자연사는 왜 두려운가? 인류역사 300만년이래 누구도 죽었다가 살아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태여 나기 이전의 세계를 아무도 경험하지 못 함이고(막연히 무엇인가에 의하여 주어졌다고 생각함) 또 다른 하나는 죽음 후의 그 무엇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있지 사후를 경험하지 못함 때문이다

生과 死를 구태여 직선으로 표시하면 태여나기 이전은 빈 공간이고 죽음 이후 역시 텅 빈 여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이전,이후의 無를 체험할 수 있는 실재로 착각하여 삶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삶인 有가 사라지기에 그 死後의 無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는 명제는 善이 있기에 惡이 있는 것 처럼,좋음이 있기에 나쁨이 있다는 것은 별도로 낱낱히 獨立적으로 실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緣起 관계에 있는 개념 雙이란 사실이다

 

쉽게 납득이 안갈 것이지만 큰 놈이 인식 되려면 반드시 주위에 대칭으로 짧은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달랑 하나가 있으면 존재로서 의미를 상실하기에 불교에서는 일러 연기라 하며 空하다라고 한다.공이라 함은 존재 自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實體를 부정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생사중 내가 선 뜻 납득이 안 된 부분이 ‘죽음이 있으니 생이 있다’는 논리가 쉽게 납득이 안 되었으나 사색 끝에 찾아 낸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죽음이 전제되지 않은 생은 永生이란 의미인데 이 세상에 그런 생은 없다였다.막힌 가슴이 뻥 뚫렸다.그러니 윤회설도 이해가 되였다

 

생이란 태여나기 이전의 그 냥 무가 아니라 업에 의하여,전생의 업보로 인한 이 생의 과보를 받은 것으로,죽음 이후는 이 생의 업에 의하여 조건 지어진다는 인과응보를 받아 드린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은 알든 모르든 죽음이 전재되지 않고는 성립 될 수 없는 개념이다.한 묶음인 개념 쌍이란 점이다 삶이 원인이 되어 지금 이 순간 삶과 죽음이 되풀이 되고 變轉한다.인식되든 말든 삶 속에 죽음이 죽음 속에 삶이 반복되는 것이다.

 

청담 대종사는 우리 말인 ‘살다’의 원어를 ‘사르다’로 해석하며 생사에 관한 법문을 생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사르다는 태운다-불 사르다-태워 없애 버린다는 뜻으로 산다라는 生속에 이미 죽음이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다.

 

생과 사는 둘이 아니다.심리학 박사인 전 교수는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미리 豫斷하기 때문이란다. 예기 불안을 심리학적으론 원하지 않는 사항을 일어 날 것 처럼 상정함으로서 불안을 자초한다는 논지인데 아직 발생하지도 안 했는데 발생할 것 처럼 생각함에서 오는 불안이다

 

해소 방안으로 그는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고 한다.지금 하는 행위에 마음을 기우리면 미래불안이 비집고 들어 올 틈새가 없다.산만하고 들 뜬 마음은 전부 지금 여기에 가 있어야 할 마음이 딴전을 부림에 기인한다.

 

지금 여기란 개념속엔 시간을 구획하는 과거,현재,미래를 따로 떼어 생각하는 2分法 논리는 철저히 배제된다.이해를 돕자면 시간을 線 개념으로 생각하자면 직 선위에 중심선을 횡으로 긋고 왼 쪽X선을 지나 간 과거로 규정하면 오른 쪽y선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즉 미래다.지나간 것과 오지 않은 것을 제외한 지금의 시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 사이에 현재가 있다면 시간은 멈춰야 한다.정지된 시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변적으로 흘렀지만 생과 사도 똑 같은 논리다

 

죽음-극복할 수 있는 두려움

어짜피 언젠가는 부디칠 운명,죽음이 현실로 다가 온다면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마누라일까? 자식일까? 친구일까? 아니면 스승일까? 의사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라.나는 죽음앞에서 호흡이 가쁘다.거부할 수도,저항할 수도 없는 극한상황이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신이 내린 위대한 선물을 가동하는 것이다.思惟다.기독교 신자라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영광의 순간을 명상을 통하여 다가가는 것이다.마치 아기가 본능적으로 엄마를 향하여 기어 가듯 천천히 아주 서서히 영혼을 맡기는 기도다

불교인들은 ‘조건이 성숙하면 생하고 조건이 흩어지면 멸하는 緣起 원리를 觀하는 것이다.조건들이 모여 태여 낳기 때문에 그 조건들이 소멸되면 가는 원리를 받아 드린다면 마음의 평정이 찾아 올 것이다.

 

나의 경우는 “연기되어 짐으로 空하다” 그러니 나란 실체는 없다.主體라고 생각된 내가 감각기관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하니 客體 또한 실체가 아니라 내 감각기관이 만들어 낸 虛構다’를 수시로 반복 관행한다.

일러 我空,法空이라 한다.인식 주체가 공한데 인식되여 지는 객체 역시 공하다는 논지다.

 

세상 살아 나가는데 이 이상의 妙藥은 없다.반야심경에서 이 경지에 이르니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 났다로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제3의 부류-도피 중독층은 어떤 명상을 수 없이 반복해야 하나? 끝까지 감각 마취 중독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제발 突然死하게 해 주십사’는 기도를 달고 살아야 한다 아,그 놈 죽음 복은 타고났어를 연발하면서..

 

결론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잇빨로 씹어야 맛을 알듯 스스로 해보고 경험하고 체득해야 참된 眞髓를 아는 것처럼 예수가,부처가,희대의 석학이 불멸의 길을 제시해도 그건 그 사람이고 나는 나다라는 꼴통 보수(잘 못된 邪見에 집착하여 어떤 것도 허용하지 못하는 정신장애) 我執을 갖는한 평생 그들에겐 救援도,解脫도 없슴을 명심하라. 그리고 자연의 섭리인 生住離滅에 순응할 때까지 명상을 통해 뇌 세포를 온전히 바꿔라. 여명이 비치듯 죽음의 공포도 사라질 것이다.

  

 

 

 

 

 

 

 

  • profile
    이재상 2016.07.16 13:35
    無念 無常 아무 생각 없이 천진 난만 하게 살다 살며시 가면 좋겠죠.
  • profile
    김경욱 2016.07.19 17:12
    그저 자연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어머니의 품과 같으니까요.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품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틀린 생각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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