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지만, 좋은 친구들과 함께 떠날줄 아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들이리라.
동창들과 함께 하는 여행을 생각하며 집을 나설때면, 삼사십년 된 묵은지를 뒤로 하고 가을 남자들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라고 표현하면 좀 섭할 사람이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9시에 압구정역에 도착하니 환한 얼굴의 우리 16회 멋쟁이, 맛쟁이들이 모두 모여들 있었다.
가을 여행을 빨리 신청하지 않으면 빼 버릴 수도 있고, 짤라 버릴 수도 있다는 한동건 회장의 으름장에 버스 한 대가 넘쳐 곤란할까 걱정했었는데, 하루밤새 12명이 줄어 드는 바람에 총 인원은 남자 12명, 여자 20명 총 32명이 떠나게 되었다. 여행갈 때 마다 늘어 났다가 줄어 드는건 우리 16회 남학생들의 특징인가 보다.
김 용호와 이후영은 전주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30명은 가을 바람따라 서울을 출발했다.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버스안에서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모든 근심 걱정을 길가의 흔들거리는 억새풀 손짓에 흘려 보내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단풍여행겸 먹거리 여행이란다.
서울을 벗어나자 회장단이 준비해 온 말랑 말랑한 쑥떡과 한동건 와이프가 정성들여 싸준 간식이 벌써부터 풍성한 먹거리 여행을 알려 주는 듯 싶다.
감까지 깎어서 준비해 온 현 영의 정성은 감동이다.
먹고 났으니 박 상규의 사회로 이번 여행에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우리를 즐겁게 해줄 기쁨조로 재판을 두건이나 연기하고 여행에 참석한 이원구를 등장시키고 버스안은 웃음 바다로 채워진다.
이에 질세라 원조 재담가 이 재상의 연륜있는 입담은 과연 원조의 자리를 아무나 넘볼 수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번 여행에서 얼마나 웃어야 할지 가늠하기도 어려워 진다.
전주로 들어 서니 전통이 살어 있는 도시의 면목이 보여진다.
특히 부녀자들의 음식솜씨가 빼어나고, 음식에 들이는 정성이 지극한 곳이기에 맛과 또 명창의 소리로 유명한 곳이 아니던가.
시내로 조금 들어 가다 보니 절벽위에 아담한 누각이 보이고, 그 아래로 맑은 진주천이 흐르는데, 유명한 오모가리탕집들이 모여있고, 물가에는 평상들이 놓여져 있었다.
우리 보다 미리 온 김 용호와 이 후영이 평상위에 점심상을 보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초순이라지만 따뜻한 날씨덕에 한벽루 옆 강가 평상에서 억새풀을 마주하고 벗들과 소주한잔 곁들이며 먹는 민물고기 매운탕은 행복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로 옆 산기슭 절벽위에 세워진 한벽루 누각 아래로 사시사철 맑은물이 흐르는데,
바위에 부딪쳐 흰 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 하여 <한벽당>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시인 묵객들이 쉴새 없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으며, 길 가던 나그네들도 쉬어가곤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옛 그대로의 모습을 찾긴 어렵지만 주변과 조화를 이룬 단아한 모습과 탁트인 시야로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버스에 오르면 재담과 웃음소리는 자동으로 이어진다.
춘향의 고장 남원에 도착했으니 이도령과의 사랑이 꽃피던 광한루 산책을 빼 놓을 수는 없는 코스다.
남도 문화의 대표적인 곳인 이곳은 누각과 연못, 정원이 결합되어 있는데, 호수를 끼고 돌아서 오작교를 건너다 보면 큰 나무 그늘까지저 연못에 드리워 지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이다.
이도령과 성춘향의 복장을 빌려 누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여행객들이 보인다.
화엄사로 향하는 길가에는 빨갛게 매달린 감들이 늦가을의 정취를 더해 준다.
우리나라 화엄경의 종찰격인 화엄사는 국보와 보물, 지방 문화재와 천연 기념물이 12점이나 있는 대 사찰이다.
특히 화엄경석이 수장되어 있다는 각황전은 뛰어난 건축기법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서니 지리산의 주봉들이 한눈에 들어 온다.
42년전, 1964년 대학 1학년때, 우리는 한일 회담 반대 데모로 여름을 열었고, 박정희 정부는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는 바람에 강 인자, 박 미자, 이 후영, 박 부강, 이 희주, 그리고 나는 대책없이 여행을 떠났다.
전주 금산사를 시작해서 열흘이 넘게 전라도 사찰들을 거쳐서 화엄사에서 기거를 하고, 아침에 노고단으로 향했다.
안개가 짙게 드리웠던 산봉우리를 헤치며 노고단에 함께 올랐던 희주는 벌써 유명을 달리 한지도 12년이 지났고, 미국서 살고 있는 박 부강은 몇 년에 한번꼴로 보고 있으니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런지.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환갑을 넘긴 나이로 여기에 서 있다.
산사에서 맞는 저녁 어스름은 여행자의 낭만을 고조시켜서, 저녁을 예약한 식당까지 모두가 계곡따라 낙엽진 길을 걸어서 내려가기로 했다.
각황전의 재건을 위해 애쓰던 화주승에게 장육전을 지어주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노파의 불심을 되새기며 깊고 청정한 계곡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리산 주봉사이로 보름달이 그림같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재상이 월출봉에 달이 뜨니 즐겁지 않으리오 하고 노래로 우리의 감상을 대신해 준다.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다녀 가셨다는 유명한 구례 백화 회관에는 산채 정식이 전라도로 맛여행을 왔음을 실감케 해 준다.
특히 김 광현이 친구를 동원해서 공수해온 신선한 가리비 조개 선회와 쫄깃한 참꼬막과 함께 하는 산향기 듬뿍밴 더덕주, 이걸 먹고도 오늘밤 무슨일을 벌어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자면 목욕부터 하는게 순서겠지.
노고단 자락에서 뿜어 나오는 깨끗한 게르마늄 온천에 몸을 담근후 생각해 보자고.
최 완숙 동문은 오랜만에 만나도 단아한 모습 그대로 과하거나 요란하지 않고도 융숭하게 우리를 맞는다.
대온천탕은 저녁 8시반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내일 아침 일찍 온천욕을 즐기기로 했다.
노래방 공연은 언제나 흥겹지만, 버스안에서 너무들 웃어대는 바람에 목들이 모두들 잠겼지만 그게 대수일 수 있겠는가? 의상까지 준비해온 박정애와 박상규의 사회, 그리고 큰소리 뻥치는 남자, 여자 가수 현영, 김 윤경, 김 양자까지 있으니 시간가는줄 모르게 밤은 깊어 갔다. 더 깊은밤 무슨일이 있었던 것 같긴한데 아직 단서를 못 잡었으니 글로 올릴 수도 없지만 사실 확인이 되는대로 알려 줄 셈이다.
다음날 아침일찍 온천수에 몸을 담그며 낙원탕 음양 조화를 설명해 주는 조각상들을 감상했다.
최 완숙이 준비해준 시원한 북어국 정식은 정갈한 상차림으로 또한번 친구의 정성을 느낄수 있었다.
완숙이는 조각상에 대한 내 농담에, 정색을 하며 6.25당시 이 지역은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를 하는 수차례 수난을 겪었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남자들 씨가 말랐다는 표현을 할 정도의 슬픈 사연을 대변하고 있는 조각상이라는 설명에 잠시 숙연해 지고 말었다.
지리산 순환도로 입구에 위치한 천은사는 수려한 계곡속에 자리잡은 절로 지리산의 빼어난 산수와 풍광, 그리고 천년 고찰의 풍취로 가을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이번 여행의 뜻밖의 선물인 듯 싶도록 인상적인 사찰이었다.
성삼재를 버스로 통과해서 뱀사골 자연 탐방로를 산책할 수 있는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오색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 뱀사골은 산과 물과 사람의 마음까지도 붉게물들인 계곡으로 짧은 거리의 자연 탐방로 산책이었지만 기암절벽으로 어우러진 비경은 우리 모두를 황홀경에 빠져들게 해 주었다.
절정을 이룬 11월 초순의 뱀사골 단풍은 순환도로 구비 구비마다 붉게 물들여 져서 계속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빠듯한 여정이지만 실상사를 들려 보기로 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 명성에 비해서 절의 모습은 너무도 소박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많은 문화재를 지니고 있는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고 한다.
사찰 앞쪽에 우뚝 서있는 아름다운 두 그루의 소나무 앞쪽으로는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 온다.
6.25때 전화를 피해 남은 사찰 주위에는 찬란했던 옛 영광을 그리워 하며 놓여 있는 주춧돌 사이로 무심한 여행객들이 카메라를 눌러 대고 있었다.
함양으로 버스를 돌려서 청학산 식당에서 숯불 도야지 고기를 겻들인 콩잎 곰탕으로 또 한번 사치를 누려 보았다.
맛의 고장 답게 된장에 박은 고추를 씻는 맛은 일품이었다. 맛고추라고나 표현할까.
콩잎 장아찌와 된장찌개에 반해서 식당에서 파는 된장들을 하나씩 버스에 들고 오는 된장녀들이 되었다.
메모까지 꺼내 들고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이 재상의 완숙한 재담과 무궁 무진한 입담의 달인 이 원구의 수준 높은 개그보다 우리를 더 배꼽 잡게 해 주는 사람은 옆의 사람들이 왜 웃는지 이유를 몰라서 설명을 해 주어도 감이 안 잡혀 하는 심 항섭이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도 참 다양하다.
관광버스에서 노래가 빠질 수 있겠는가?
가을 빛을 잃어 가는 들판을 뒤로 하고 명가수들의 가요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게 애 썼던 한 동건, 주 현길. 현 영, 김 명현, 방 유정 회장단,
숯불 도야지 고기로 포식을 하게 해준 이 원구, 재담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 이 재상, 여행을 기획하고 뒤에서 애 쓴 김 광현, 사회를 맡은 박 상규, 참석하기 어려운 일정으로 하루 일찍 상경한 황 정환, 전주에서 만난 김 용호, 개그를 이해 못해서 우리를 더 많이 웃게 해 준 심 항섭, 여행의 무게를 실어준 정 기봉, 박 효범, 장재원,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안겨 주는 박 정애, 고운 노래로 우리의 마음을 청량하게 해준 김 양자, 김 명현, 귀여운 여인 정 영경과 이 현주, 웃기는 사람이 기대한 이상으로 웃음 보따리를 풀어서 신나게 재담을 하게 해 준 이 후영과 김 윤경, 또 그들이 있음으로 여행의r품격이 더해지는 강 인자, 김 성은, 백 창숙, 유 정숙, 유 정순, 이 향숙, 정 채영, 한 춘자, 가는 절마다 명쾌한 설명으로 이지적인 여행이 될 수 있게한 박 미자, 여행에 참여는 못했지만 성금으로 풍성하게 해준 친구까지 모두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제 아쉬운 이별을 뒤로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가을과 함께 들렸다 온 여행의 추억은 삶이 녹녹치 않을 때 잠시의 휴식을 제공해 주는 청량제가 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잔인하리 많큼 즐거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