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용호야
우리 외조부의 옛날 이야기가 알고 싶다니, 간단히 적어 보낸다.
지난 9월 12일 이곳 Los Angeles 통합교육구(LAUSD)에서는 한인타운내에 신축된 초등학교 이름을 Charles H. Kim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Charles H. Kim이 나의 외조부가 된다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한인은 물론이고 아시아계의 이름이 미국의 공립학교 이름으로 채택되기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이 참으로 뜻 깊은 일인듯 하다. 17개의 이름이 후보로 올라 경선과정을 통해, 모든 다른 인종들의 이름 속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된 만큼 다민족 사회에서 한인 이민 선구자를 " 미국적 Role Model"로 받아들여 졌다는 사실은 100주년을 지낸 한인 이민 사회에 힘을 실어 주는 일이라 생각된다.
외할아버지의 본명은 김정진이나 한일 합방후 1912년 가족과 조국을 떠나 중극으로 망명시 김호로 개명하여 국경을 통과하였고, 1914년 미국으로 도미하면서 Charles H. Kim으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할아버지는 한성중학교(경기고의 전신) 1회 졸업생이며, 수학을 가르치다가 독립운동에 가담 하였다. 미국에 와서는 노동으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 중가주에 "김씨 형재상회(Kim Brothers)"라는 농장을 시작하였다. 자두와 복숭아를 접목한 털없는 신도 복숭아의 개발 및 판매로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크게 성공한 기업인이 되었다.
성공한 사업을 기반으로 해방 독립자금을 제공하였고, 수많은 유학생에게 직장을 주고 장학금을 주었다고 한다. 해방후에는 한국에 돌아가 과도 입법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당시 이승만과 뜻이 맞지 않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열성으로 일으키고 미국 국민회 중앙 집행위원장을 맡아 한인사회 발전에 봉사하였다.1962년 지금의 한인회의 전신인 한인 센터(Korean Community Center)를 LA에 건립함으로 초기 한인타운의 기조를 잡았다.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1963년 내가 미국에 도착한지 며칠이 되지 않아 17세의 소년을 화씨 100도가 휠씬 넘는 농장에 데려가 과일을 따게하는 엄한 면도 계시고, 1965년 내가 UC Berkeley대학에 입학할 때는 LA에서 샌프란시스코의 먼거리를 80여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손수 차를 운전하여 대학에 입학시켜주는 다정함도 보여주셨다.
1967년 84세로 세상을 떠나실 때도, 대부분의 재산을 학교와 사회에 환원을 하시고 가족들에게는 거의 남기시지 않으셨다. 그 때의 섭섭함은 더 깊은 차원의 인생을 사신 선구자의 깊은 뜻을 알게 된 후에 더 큰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가족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망명할 수 있을까?
30여년간 혼자 살면서 해방될 때까지 부인을 기다릴 수 있을까?
전 재산을 자식에게 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까?
위와 같은 어려운 숙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떠나신 분이다.
2003년 국가 보훈처에서는 할아버님을 외국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유성에 있는 국립현충원 묘역에 안장했다.
나는 내가 너무 쉽게 사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LA에서
안성주
우리 외조부의 옛날 이야기가 알고 싶다니, 간단히 적어 보낸다.
지난 9월 12일 이곳 Los Angeles 통합교육구(LAUSD)에서는 한인타운내에 신축된 초등학교 이름을 Charles H. Kim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Charles H. Kim이 나의 외조부가 된다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한인은 물론이고 아시아계의 이름이 미국의 공립학교 이름으로 채택되기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이 참으로 뜻 깊은 일인듯 하다. 17개의 이름이 후보로 올라 경선과정을 통해, 모든 다른 인종들의 이름 속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된 만큼 다민족 사회에서 한인 이민 선구자를 " 미국적 Role Model"로 받아들여 졌다는 사실은 100주년을 지낸 한인 이민 사회에 힘을 실어 주는 일이라 생각된다.
외할아버지의 본명은 김정진이나 한일 합방후 1912년 가족과 조국을 떠나 중극으로 망명시 김호로 개명하여 국경을 통과하였고, 1914년 미국으로 도미하면서 Charles H. Kim으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할아버지는 한성중학교(경기고의 전신) 1회 졸업생이며, 수학을 가르치다가 독립운동에 가담 하였다. 미국에 와서는 노동으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 중가주에 "김씨 형재상회(Kim Brothers)"라는 농장을 시작하였다. 자두와 복숭아를 접목한 털없는 신도 복숭아의 개발 및 판매로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크게 성공한 기업인이 되었다.
성공한 사업을 기반으로 해방 독립자금을 제공하였고, 수많은 유학생에게 직장을 주고 장학금을 주었다고 한다. 해방후에는 한국에 돌아가 과도 입법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당시 이승만과 뜻이 맞지 않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열성으로 일으키고 미국 국민회 중앙 집행위원장을 맡아 한인사회 발전에 봉사하였다.1962년 지금의 한인회의 전신인 한인 센터(Korean Community Center)를 LA에 건립함으로 초기 한인타운의 기조를 잡았다.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1963년 내가 미국에 도착한지 며칠이 되지 않아 17세의 소년을 화씨 100도가 휠씬 넘는 농장에 데려가 과일을 따게하는 엄한 면도 계시고, 1965년 내가 UC Berkeley대학에 입학할 때는 LA에서 샌프란시스코의 먼거리를 80여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손수 차를 운전하여 대학에 입학시켜주는 다정함도 보여주셨다.
1967년 84세로 세상을 떠나실 때도, 대부분의 재산을 학교와 사회에 환원을 하시고 가족들에게는 거의 남기시지 않으셨다. 그 때의 섭섭함은 더 깊은 차원의 인생을 사신 선구자의 깊은 뜻을 알게 된 후에 더 큰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가족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망명할 수 있을까?
30여년간 혼자 살면서 해방될 때까지 부인을 기다릴 수 있을까?
전 재산을 자식에게 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까?
위와 같은 어려운 숙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떠나신 분이다.
2003년 국가 보훈처에서는 할아버님을 외국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유성에 있는 국립현충원 묘역에 안장했다.
나는 내가 너무 쉽게 사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LA에서
안성주
凡常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