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 있던 날 앞 며칠간 짬을 내어 우리 부부는 나주에 사는 큰동서 부부와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12일은 오금동 우리 집에서 두 가족이 모여 저녁 한 때를 같이 보내며 저간의 얘기를 나누고 휴가일정을 논의 하였다.
다음날 늦은 아침 하남시 초이동에 있는 주말농장에 들러 오이와 옥수수를 따 담고 '마'의 생장상태를 살펴본 뒤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영동선 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달린다.
단양 IC를 빠져나와 말로만 듣던 아름다운 석순이 무성한 고수동굴을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나오니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터널을 통과할 때 켠 헤드라이트를 켜둔 채 주차시켰던 모양이다. 30분가량 서비스차량이 올 때 까지 드넓은 주차장 나무그늘에서 준비해 온 맛있고 시원한 복숭아를 쪼개 먹으며 더위를 식히는 재미도 별나다. 단양팔경중 석문과 구암삼봉을 둘러보고 국도를 이용하여 영주시내로 진입하여 영주 재래시장 인근에 있는 '알프스 모텔'에 방 두개를 얻어 여장을 푼다. 일박에 3만원인데 면도기도 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니 넓은 침대에 냉온수기에 냉장고, TV, 에어콘, 현란하고 복잡한 무드조명까지 모든 장치는 리모컨 한개로 조작하게 되어 있다. 소위 러브호텔인 셈이다. 접수대도 1층이 아닌 2층에 있어서 출입이 지극히 자유롭다. 새벽잠이 깨어 주차장 자동차 짐칸에서 개스렌지와 큰 남비를 모텔방 샤워실에 옮겨 놓고 몰래 옥수수를 쪄서 네식구가 가져온 떡과 함께 이른 아침을 해결할 수 있었다.
소수서원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보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대원군시절 서원철폐 후에도 경상도에는 일곱개나 되는 서원이 남아 있어 오늘날에도 당시 경상도지방의 학구열풍을 느끼게 한다.
어릴 적 중학교시절 수학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나는 전라북도 전주에 있었던 지금은 폐교된 전주북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경상남도 진주지경을 지날 때 한 아주머니가 어디서 오느냐고 물어 전주에서 온다고 하니 대뜸 하는 말씀이 "아, 전라도 개땅쇠!"라는 것이다. 이 때 바로 나가는 댓구가 "경상도 문둥이!"였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경상도에는 문둥이촌이 있어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소수서원을 들르고, 안동 하회마을 가까이에 있는 유서깊은 '병산서원'을 보면서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늦게야 깨달음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옛부터 학자가 많고, 서원이 많았던 경상도 지방에서 어린 자녀들은 대부분 글을 읽고 배우는 가정이 많았고, 이런 어린이들을 집안이나 이웃에서 애칭으로 글 읽는 아이라는 뜻에서 '문동(文童)이'라고 불렀고 이 말이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레 "야 이 문딩아!"라고 하지 않았을 까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이렇지 않고서야 어찌 내 새끼를 문딩이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지역감정을 다스리고 융화하는 길은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애정을 크게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전라도 개땅쇠'라는 말도 서해안에는 간만의 차가 커서 바닷가 갯땅(뻘)이 넓게 발전하여 먹을 것이 풍부하였고 그곳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고 보여진다.
하여튼 영주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둘러본 뒤 안동으로 이동하여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탈춤으로 유명한 하회(河回)마을의 고택과 마을길을 두루 돌아볼 수 있었고, 헛제사밥은 못 먹었지만 안동 간고등어 정식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연하여 병산서원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금년 여름의 커다란 수확이었다.
비교적 도로가 막히지 않아 계획하였던 일정을 1박2일 동안에 미진하나마 다 소화할 수 있었다.
다음날 늦은 아침 하남시 초이동에 있는 주말농장에 들러 오이와 옥수수를 따 담고 '마'의 생장상태를 살펴본 뒤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영동선 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달린다.
단양 IC를 빠져나와 말로만 듣던 아름다운 석순이 무성한 고수동굴을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나오니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터널을 통과할 때 켠 헤드라이트를 켜둔 채 주차시켰던 모양이다. 30분가량 서비스차량이 올 때 까지 드넓은 주차장 나무그늘에서 준비해 온 맛있고 시원한 복숭아를 쪼개 먹으며 더위를 식히는 재미도 별나다. 단양팔경중 석문과 구암삼봉을 둘러보고 국도를 이용하여 영주시내로 진입하여 영주 재래시장 인근에 있는 '알프스 모텔'에 방 두개를 얻어 여장을 푼다. 일박에 3만원인데 면도기도 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니 넓은 침대에 냉온수기에 냉장고, TV, 에어콘, 현란하고 복잡한 무드조명까지 모든 장치는 리모컨 한개로 조작하게 되어 있다. 소위 러브호텔인 셈이다. 접수대도 1층이 아닌 2층에 있어서 출입이 지극히 자유롭다. 새벽잠이 깨어 주차장 자동차 짐칸에서 개스렌지와 큰 남비를 모텔방 샤워실에 옮겨 놓고 몰래 옥수수를 쪄서 네식구가 가져온 떡과 함께 이른 아침을 해결할 수 있었다.
소수서원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보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대원군시절 서원철폐 후에도 경상도에는 일곱개나 되는 서원이 남아 있어 오늘날에도 당시 경상도지방의 학구열풍을 느끼게 한다.
어릴 적 중학교시절 수학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나는 전라북도 전주에 있었던 지금은 폐교된 전주북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경상남도 진주지경을 지날 때 한 아주머니가 어디서 오느냐고 물어 전주에서 온다고 하니 대뜸 하는 말씀이 "아, 전라도 개땅쇠!"라는 것이다. 이 때 바로 나가는 댓구가 "경상도 문둥이!"였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경상도에는 문둥이촌이 있어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소수서원을 들르고, 안동 하회마을 가까이에 있는 유서깊은 '병산서원'을 보면서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늦게야 깨달음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옛부터 학자가 많고, 서원이 많았던 경상도 지방에서 어린 자녀들은 대부분 글을 읽고 배우는 가정이 많았고, 이런 어린이들을 집안이나 이웃에서 애칭으로 글 읽는 아이라는 뜻에서 '문동(文童)이'라고 불렀고 이 말이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레 "야 이 문딩아!"라고 하지 않았을 까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이렇지 않고서야 어찌 내 새끼를 문딩이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지역감정을 다스리고 융화하는 길은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애정을 크게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전라도 개땅쇠'라는 말도 서해안에는 간만의 차가 커서 바닷가 갯땅(뻘)이 넓게 발전하여 먹을 것이 풍부하였고 그곳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고 보여진다.
하여튼 영주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둘러본 뒤 안동으로 이동하여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탈춤으로 유명한 하회(河回)마을의 고택과 마을길을 두루 돌아볼 수 있었고, 헛제사밥은 못 먹었지만 안동 간고등어 정식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연하여 병산서원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금년 여름의 커다란 수확이었다.
비교적 도로가 막히지 않아 계획하였던 일정을 1박2일 동안에 미진하나마 다 소화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