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중부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위치한 요세미티 국립공원. 요세미티란 말은 인디언들의 말로 "곰이다 .조심해라' 라는 뜻으로 지금도 이 지역에는 곰이 많아 개체수가 2만 마리를 넘으면 사냥을 허용한다고 한다. 여기저기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말라는 경고문이 걸려있다. 짙은 안개에 잠겨있는 원시림 사이로 뻗어있는 깊고 비탈진 꼬불꼬불한 길을 버스가 더듬듯 헤쳐 나아간다. 원래 이 길은 기병대가 인디언들을 추적해 쫓던 길이라 한다. 안개 속에 잠겨있는 듯한 산과 깊은 골짜기, 쭉죽 뻗어오른 나무들, 우람하게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바위들이 보이지않는 영기가 서려있는듯 묘한 기분이 들게하고 안개 속에 꺼뭇꺼뭇하게 내 보이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흐르는 바람소리도 예사롭지 않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릿거리는 공포로 굳어버린 표정, 황망함이 발긑에 걸린 채 죽을 힘을 다해 울창한 숲 속으로 잦아드는 토착 종족인 아메리칸 인디언 , 그리고 개기름이 번지는 얼굴에 사냥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욕망의 눈망울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뒤쫓고있는 기병대, 산을 울리는 총성들 그리고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비명소리가 메아리되어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영상이 머릿 속에 흐르며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창피한 생각이 들며 한 편으로는 미움, 화, 잔잔한 분노가 피어오른다.
폭력을 휘들으며 침입하여 강탈하고 점령하고 쫓아내고 보호구에 몰아넣는 과정에서 자유와 인권은 누구를 위한 누구의 것이었나 ? 한 예로 14,000 여명의 채로키 부족이 척박한 땅을 걸어서 보호구로 이동하는 도중에 죽고 5,000 명 정도 남았다고 한다. 비교적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며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로서 맑은 영성을 지닌 채 소박한 삶을 평화롭게 살아가던 토착 아메리칸 인디언 들에게 백인들이 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서 지난 날들을 뒤돌아보면 얼굴이 따끔따끔 해짐을 느낀다. 서부 영화의 장면들..... 서부로 이주해 가는 백인들의 마차떼,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인디언들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던가!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했을 때 경쾌한 나팔 소리와 함께 산 모퉁이에서 나타나는 기병대들.... 그 장면에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신나서 박수를 보냈던가! 그러한 사건들의 원초적 빌미를 제공했던 컬럼버스를 위인전에서 읽고 꿈과 희망을 피어 올리면서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던가? 승자의 기록에 의존한 왜곡된 주관으로 이분화하여 인디언은 사악하고 잔인하며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백인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심적 자괴감이 든다.
3억 년 전 빙하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요세미티계곡, 해발 2,300 여 M에 높이만도 1,086 M나
되는 단일 바위로서 세계 최대라는 앨캐피탄 바위, 그 높은 수직 벽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햇빛이 골짜기를 환하게 비추이는 듯 하다. 한 여름이면 바위의 온도가 100℃ 가까이 오른다는 둥근 바가지를 반으로 잘라 엎어놓은 모양의 해발 2695M나 된다는 하프돔, 떨어지는 폭포가 바람이 불면 옆으로 퍼지는 모습이 신부의 면사포 같다고하여 붙여진 면사포 폭포, 739M나 되는 폭포가 3단으로 나누어져 떨어지는 요세미티 3단폭포 등이 아름답고 장엄하며 수십 만년 응축된 기가 서려 있는듯 웅대한 힘을 느끼게 한다. 오랜 세월 자란 테다소나무, 세코이야 등 쭉쭉 하늘을 찌를듯이 뻗어 올라간 나무들이 도전적이고 활기가 넘쳐흐르며 힘찬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우리 한국에선 산에 가면 기백과 품위, 당찬 기상들을 보이면서도 정적이며 포근히 감싸 앉는 맛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 포근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 만의 느낌일까? 계곡을 되돌아 나오는 차에선 가곡 금강산이 흐르고 차창 밖에서는 거대하고 장엄한 암벽과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쓴 채 우뚝우뚝 솟아있는 나무들이 답하는 듯한 힘과 에너지가 충만한 계곡이다.
인간의 욕망은 충족을 지향하고 충족 량을 결정하는 것은 소유다. 그리고 소유는 능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고(욕망은 늘 소유보다 크고 빠르게 증가하지만) 우리 자신이 그 능력을 움켜쥐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퍼부었던가. 날카로운 이성과 이성을 실천시키기에 충분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하서.... 아마도 이성과 지식만큼 인간의 오만을 키우는데 기여한 것도 적으리라. 인간의 지적 오만은 인간을 자연 존재 속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뛰쳐나와 신처럼 군림하며 모든 존재를 통제하고 지배하며 이용할 수 있다는 오만으로, 나 이외의 모든 것이 나의 정복 대상이 된다는 생각으로 선과 악, 정신과 물질, 주관과 객관 등 마주세워 대결시킴으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성을 앞세운 이분법적인 사고와 합리주의
그리고 과학을 앞세운 지식이 우리의 생활이고 삶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왔고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는 풍요와 편리함을 제공받아 희희낙락하지 않았나, 그래서 지금 우리는 행복하고 즐거우며 마음 편하기만 한가?
웅장하고 장엄하게 전개되는 대지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코끝에 스치는 자연의 향기에 맛을 느끼며 , 몸에 촉촉하게 다가드는 느낌에 마음이 움직여 여러 생각을 엮어내는 나 자신의 육감의 변화를 들여다 보며 인간의 내면 저 깊숙한 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쪼그라져 숨막히고 시들어 가고있는 영성에 숨통을 튀어주고 온기를 불어넣어 영적 정서가 다시 숨쉴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은 좀더, 즉
아름다워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잠겨 본다. 나 이외의 모든 존재를 아니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더불어 삶을 공유하는 파트너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 까?
죽음의 그림자가 어릿거리는 공포로 굳어버린 표정, 황망함이 발긑에 걸린 채 죽을 힘을 다해 울창한 숲 속으로 잦아드는 토착 종족인 아메리칸 인디언 , 그리고 개기름이 번지는 얼굴에 사냥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욕망의 눈망울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뒤쫓고있는 기병대, 산을 울리는 총성들 그리고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비명소리가 메아리되어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영상이 머릿 속에 흐르며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창피한 생각이 들며 한 편으로는 미움, 화, 잔잔한 분노가 피어오른다.
폭력을 휘들으며 침입하여 강탈하고 점령하고 쫓아내고 보호구에 몰아넣는 과정에서 자유와 인권은 누구를 위한 누구의 것이었나 ? 한 예로 14,000 여명의 채로키 부족이 척박한 땅을 걸어서 보호구로 이동하는 도중에 죽고 5,000 명 정도 남았다고 한다. 비교적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며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로서 맑은 영성을 지닌 채 소박한 삶을 평화롭게 살아가던 토착 아메리칸 인디언 들에게 백인들이 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서 지난 날들을 뒤돌아보면 얼굴이 따끔따끔 해짐을 느낀다. 서부 영화의 장면들..... 서부로 이주해 가는 백인들의 마차떼,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인디언들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던가!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했을 때 경쾌한 나팔 소리와 함께 산 모퉁이에서 나타나는 기병대들.... 그 장면에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신나서 박수를 보냈던가! 그러한 사건들의 원초적 빌미를 제공했던 컬럼버스를 위인전에서 읽고 꿈과 희망을 피어 올리면서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던가? 승자의 기록에 의존한 왜곡된 주관으로 이분화하여 인디언은 사악하고 잔인하며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백인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심적 자괴감이 든다.
3억 년 전 빙하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요세미티계곡, 해발 2,300 여 M에 높이만도 1,086 M나
되는 단일 바위로서 세계 최대라는 앨캐피탄 바위, 그 높은 수직 벽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햇빛이 골짜기를 환하게 비추이는 듯 하다. 한 여름이면 바위의 온도가 100℃ 가까이 오른다는 둥근 바가지를 반으로 잘라 엎어놓은 모양의 해발 2695M나 된다는 하프돔, 떨어지는 폭포가 바람이 불면 옆으로 퍼지는 모습이 신부의 면사포 같다고하여 붙여진 면사포 폭포, 739M나 되는 폭포가 3단으로 나누어져 떨어지는 요세미티 3단폭포 등이 아름답고 장엄하며 수십 만년 응축된 기가 서려 있는듯 웅대한 힘을 느끼게 한다. 오랜 세월 자란 테다소나무, 세코이야 등 쭉쭉 하늘을 찌를듯이 뻗어 올라간 나무들이 도전적이고 활기가 넘쳐흐르며 힘찬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우리 한국에선 산에 가면 기백과 품위, 당찬 기상들을 보이면서도 정적이며 포근히 감싸 앉는 맛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 포근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 만의 느낌일까? 계곡을 되돌아 나오는 차에선 가곡 금강산이 흐르고 차창 밖에서는 거대하고 장엄한 암벽과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쓴 채 우뚝우뚝 솟아있는 나무들이 답하는 듯한 힘과 에너지가 충만한 계곡이다.
인간의 욕망은 충족을 지향하고 충족 량을 결정하는 것은 소유다. 그리고 소유는 능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고(욕망은 늘 소유보다 크고 빠르게 증가하지만) 우리 자신이 그 능력을 움켜쥐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퍼부었던가. 날카로운 이성과 이성을 실천시키기에 충분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하서.... 아마도 이성과 지식만큼 인간의 오만을 키우는데 기여한 것도 적으리라. 인간의 지적 오만은 인간을 자연 존재 속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뛰쳐나와 신처럼 군림하며 모든 존재를 통제하고 지배하며 이용할 수 있다는 오만으로, 나 이외의 모든 것이 나의 정복 대상이 된다는 생각으로 선과 악, 정신과 물질, 주관과 객관 등 마주세워 대결시킴으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성을 앞세운 이분법적인 사고와 합리주의
그리고 과학을 앞세운 지식이 우리의 생활이고 삶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왔고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는 풍요와 편리함을 제공받아 희희낙락하지 않았나, 그래서 지금 우리는 행복하고 즐거우며 마음 편하기만 한가?
웅장하고 장엄하게 전개되는 대지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코끝에 스치는 자연의 향기에 맛을 느끼며 , 몸에 촉촉하게 다가드는 느낌에 마음이 움직여 여러 생각을 엮어내는 나 자신의 육감의 변화를 들여다 보며 인간의 내면 저 깊숙한 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쪼그라져 숨막히고 시들어 가고있는 영성에 숨통을 튀어주고 온기를 불어넣어 영적 정서가 다시 숨쉴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은 좀더, 즉
아름다워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잠겨 본다. 나 이외의 모든 존재를 아니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더불어 삶을 공유하는 파트너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