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낙엽지는 가을은 늘 나를 쓸쓸하게 한다. 학창 시절에는 가을이면 샛노란 은행잎이 학교 캠퍼스에 융단처럼 깔려 구루몽의 시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를 읊으며 낙엽을 만끽했는데 이젠 가을이면 낭만보다는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의식이 앞선다.
그래도 몇 년 전 등산을 시작한 이래 매년 10월에는 친구들과 1박 2일 원거리 산행을 떠나서 버스가 떠나가도록 떠들고 웃고 마신 산행이 있어서 위안이 되고, 그 쓸쓸한 우수를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10월 산행은 몸을 아끼지 않고 등산회를 위해 헌신한 정태영 회장을 호올로 안동 땅 병원에 둔 후 맞이하여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날씨는 우리 마음은 아랑곳 않고 쾌청하여 갈아앉은 기분을 고조시켰다.
야탑역 대합실에 9시 20분 경 도착하니 박효범 총무가 7시 반부터 서둘러서 벌써 와서 맞아주고 황정환 김두경 강기종 등 분당 팀과 김윤종 권영직 천주훈 최진석 우무일 등의 모습도 보인다. 최진석은 서울에 장기 체류하느라 서너 번 째 우리 산행에 동참하고 있어 이젠 국내 동문처럼 친근하다.
천주훈은 2년만에 참가하여 환영을 받았고, 잠시 후 꼭 20개월만에 방유정이 캡과 썬그라스를 쓰고 사뿐사뿐 걸어오자 일제히 환성을 지른다. 등산회가 생긴 이후 늘 개근하던 모범생이었는데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보이며 여학생들과 일일히 기쁨의 포옹을 나눈다.
이어서 김상건 민일홍 이재상 남영애 박정애 이석영이 산뜻한 차림으로 나타나 인사하느라 분주하다.
마지막으로, 먼데서 온 이성희와, 1년만에 참여하는 아담 싸이즈의 유미희가 도착하자 더 이상 기다리기를 마치고 9시 40분경 산행에 나선다. 모두 19명.
단골 얼굴들인 신해순 이상훈 정만호 심항섭 이종건(큰) 이명원 김영길 김용호 노준용 김진국 송인식 이승희 정영경 유정숙 정숙자 등이 불참하여 이가 빠진 듯 허전하다. 근래에 계속 불참 중인 위광우 주환중 전 회장과 송인식도 속히 복귀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다. 결혼식 등 행사가 많은 달이라 참여 성적이 저조하지만 가족적인 분위기로 오손도손 오르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하다.
회장도 양치기도 없는 산행이지만 길 잃은 어린 순한 양들은 초입부터가 가파른 곳이 없이 완만한 흙길로 삼삼오오 회포를 풀면서 부담없이 오를 수 있었다. 전날 내린 비로 길이 촉촉히 젖어있어 먼지도 일지 않아 더욱 쾌적하고 발 아래의 낙엽들만 사각사각 가락을 연주한다. 우거진 숲속에서 언뜻 언뜻 보이는 조각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청명한데 그 나무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하이얀 햇볕은 눈이 부시다.
대학 동기 등산회 회장인 권영직은 겨울 눈이 쌓일 때의 설경이 장관이라고 설명한다.
집에서 나올 때는 오늘이 올 가을 최저기온이라는 일기 예보를 듣고 모두 옷을 두툼하게 차려 입고 왔지만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하고, 금세 땀이 솟아 '도중에서 벗을 수 있는 만큼, 옷을 벗느라 법석을 떤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은 진초록의 장원인데 좁고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굽이돌아 가는 동안 왕년의 산꾼 이재상이 어지럽다고 호소하고, 모두들 걱정을 해준다.
혼자 하산하여 점심 장소인 티볼리에서 기다리라고 이구동성 권유하는데 자존심이 있지, 어찌 그리 수치스런(?) 도중하차를 할 수 있나.
이재상 왈" 알아서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갈게. 만약 내가 사라지면 티볼리에 있거나 하늘 나라로 간 줄 알아."라고 아주 비장하게 선언한다.
우리는 "무슨 그리 심한 말을?" 하며 발걸음을 늦춰 이재상을 옹호하고 두 시간 만에 정상에 무사히 올랐다.
해발 414m라고 이정표에는 표시가 됐건만 김윤종의 고도 측정 시계는 455m 라고 한다.
널직한 정상에 자리를 펴고 박정애와 남영애 표 배를 깎고, 이재상의 참이슬과 부침개, 여기저기서 김밥과 금강산 표 땅콩, 그리고 귤과 감 강정 곶감 등이 푸짐하게 한 상 차려진다.
등산회 부회장 박정애가 긴급 선언을 한다.
"총동창 산악회가 지난 주 등산 때부터 하산 후 식사 때 술값은 각자 부담키로 했다. 회비로 술 값을 내는 건 부담을 주므로 우리도 이제부터는 각자 부담으로 할거다."
착한 어린 양들인 우리들 중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어 결국 즉시 시행키로 통과. 땅땅땅.
그 시각 후 이 날의 화두는 '각자' 로 결정됐다. 술 값도 '각자' 부담이고, 가이드도 없으니 '각자' 가이드고 '각자' 회장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 '각자' 는 하산 길의 운명을 결정한다. 처음 예정했던 코스는 새마을 연수원 방향인데 누군가가 태재 방향으로 바꿀 것을 제의하여 일부는 태재 방향으로, 일부는 율동 공원 방향으로 '각자' 흩어지게 됐다.
나는 중간 그룹에 끼어 하산하는데 한 시간 후 쯤 철조망을 끼고 내려오다가 얼핏 삼거리에서 주춤하는데 어지럽다던 이재상까지 머리와 꼬리 그룹이 도마뱀처럼 잘려 감쪽같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들어갔는지, 모습도 안 보이고, 말 소리도 안 들리는 채 몸통인 황정환, 방유정, 나, 셋만 오도마니 쳐졌다.
하릴없이 앞만 보고 내려가는데 어느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갓 지어진 전원주택인데 입주전 청소가 한창이다. 마당에 폭신하게 깔린 잔디를 무참히 등산화로 짓밟으며 유유히 대문을 나와 동네 개가 모두 요란히 짖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비탈진 포장길로 한 참 내려간다. 가도 가도 억새풀 밭이고 인적은 보이지 않는다.
황정환이 누구에겐가 핸드폰을 건다.
"야, 그 집 대문을 나와서 개가 지랄하는 길로 한참 내려왔어..." 유정이와 나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잠시 긴장을 푼다.
할 수 없이 아까 마당으로 들어간 집으로 다시 가서 길을 물으니 대문에서 우측, 산으로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가라고 한다. 우리가 처음 간 방향과는 정 반대다.
오늘 등산에는 회장이 없이 각자 행동하느라 길을 헤맸다고, 이 자리에 없는 회장의 빈자리를 새삼 크게 느끼며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갔다. 만나는 여러 명의 등산객에게 길을 물어 겨우 율동 공원까지 당도했다. 공원 안의 넓고 넓은 호수에는 잔잔한 수면이 지친 심신을 달래주고 공원 산책로의 가로수들은 노랑 빨강으로 단풍이 들어 산에서 못 본 허기를 채워주었다. 분당 시민들이 사랑하는 산책로이며 조깅 코스라는 율동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우리 셋도 산책을 하고 정문을 나왔다.
다리는 후들후들, 하산하는데도 두 시간, 오늘 등산은 등.하산 합쳐 4시간 정도 걸린 강행군이다. 맨발로 걸어도 좋은 편편한 흙산이지만 산행 시간이 만만치 않은 산이다.
공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우리 셋은 다른 동문들은 벌써 식사를 마쳤겠다고 추측하는데 웬 걸? 다음 정거장에서 우리와 헤어진 꼬리 그룹 10여명이 우루루 버스를 타는 게 아닌가. 그들도 율동 공원으로 하산했다는데 공원 안에서 우리와 달리 각자 행동한 것이다.
버스가 푸른 마을을 지나 수내역에 이르렀을 때 하차하여 2-3분 가량 걸으니 강기종 박정애 이성희 유미희 등 머리 그룹이 유유히 걸어온다. 이리하여 각자 하산한 세 팀은 다시 한 팀으로 뭉쳐 티볼리로 들어선다. 그렇지! 우리는 언제나 '따로 그러나 같이' 뭉치는 16회가 아닌가.
이석영의 가게인 이 집에서 컴비네이션 스파게티, 칠리 소스 스파게티 등 네 종류의 스파게티를 골고루 맛 보고, 오늘만은 술 값을 각자 부담하는 대신 이재상이 자기 것을 준다면서 인심 쓰는데 위광우가 뒤늦게 나타난다. 아버지 간병으로 시간을 못 내다가 뒤늦게 동생에게 인계하고 달려왔다나. 또 다시 위광우 정태영이 효자라는 찬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다음 달에는 심항섭을 회장으로 선출하자는 결론을 낸다.
끝으로 이날 탁월한 맛에 비해 엄청 싼 값을 치르게 해준 석영이에게 감사한다.
위광우는 늦게 온 죄(?)로 노래방을 쏘겠다고 하지만 합창 연습이 있기 때문에 '각자' 집으로 향하여 4시경 출발!
아침의 선선함은 포근함으로 바뀌고, 차에서 내려 구름 한 점 소요하는 푸른 하늘 아래로 걷는 귀가 길은 참으로 행복했다.
참석못하고 읽는 맛도 별미이네. 가금 빠져서 별미를 맛보는 재미를 갖어? 다음 번에는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