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날 아침 전용버스편으로 마닐라 남서쪽 2시간 거리에 있는 해발 700m 고지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활화산을 볼 수 있는 따가이 따이(Tagaitai)로 갔다.
마닐라에서 따가이따이로 가는 길도 아름다운 경치여서 열대림과 한참 흐드러진 갈대밭이며 각가지 색깔의 꽃들과 함께, 인간이 살고 있으리라 믿기지 않는 빈민촌을 지나기도 했다. 마닐라는 원래 파시그 강 주변에 살던 이슬람 교도들이 만든 마을로 시작하였으나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모든 문화가 파괴되어 식민지 전의 역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스페인의 극동지배의 근거로 카톨릭 포교의 중심지였으며 스페인의 또 다른 점령지인 멕시코 등에서 수탈한 물건들을 스페인까지 운반하는 중간 지역역활을 하였다고 한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서 상위 10%가 부를 다 차지하고, 하위 70%는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는 설명이다. 60,70년대에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잘 살았다고 하는데 어찌하다 이렇게 몰락한 나라가 되었는지 답답하였다.
화산을 둘러싸고 있는 따알 호수는 바다처럼 넓고 파랬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경치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와 아름다움이었다. 창조주의 오묘한 솜씨에 감탄하자 않을 수 없었다. 카누의 일종인 ‘방카‘라는 통나무를 파서 만든 필립핀 전통 보트를 타고 따알 호를 건너가는데 바람이 시원하였다. 호수 건너편에 도착하니 그 동네에 산다는 가난한 마부들이 말인지 당나귀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빈약한(내 느낌에) 말들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렸다. 해발 700m라면 걸어서 올라가기에도 별로 높지 않건만 이 또한 그들의 생업을 돕는 일이라서 1인이 말을 타고 1 마부가 도와서 올라갔다.
좁고 구불거리는 산길을 올라가는 말들과 내려오는 말들이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며 먼지 속을 통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마스크와 장갑을 샀지만 나는 말의 안장 앞부분의 뾰죽한 손잡이를 붙잡으려니 장갑은 미끄러워 빼고, 말 타는 것에 대한 무서움과 따가운 햇볕으로 땀이 나 답답해서 마스크도 벗을 수밖에 없었다. 마부들이 신은 신발은 발가락에 걸치는 조리라는 일본식 샌달이라 미끄러질 때마다 안타깝다. 애들도 많았는데 10살짜리 작은 여자애 마부도 있었다. 좁은 길에 여러 말이 맞다드리면서 우리 친구 하나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다행히 뼈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 걱정을 하였고 이 친구는 여행 끝날 때까지 되레 우릴 안심시키려고 애를 썼다. 이번 여행의 부상자가 두명이다. 첫날 독일에서 온 한 명희가 빗길에 미끌어져 내내 다리를 절어 휠체어를 타 남학생들이 경쟁적으로 간병인을 차청하기도 했다.
따가이 따이 전망대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주위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마부에게 음료수만 사 주라고 가이드가 말했지만 내려 갈 길을 위해 마부에게 음료수는 물론 팁도 주었다.
정상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우리나라 백두산 꼭대기의 경치와 비슷하다고 한다. 활화산이 마치 푸른 따알 호수위에 떠 있는 듯하고 주위를 둘러 있는 산의 모습이 어울러져 환상적이었다.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을 가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이 관수 동문이 송아지 바비큐를 하며 기다리고 있는 푸에르토 아즐로 가기위해 전망대까지만 갔다. 말을 타고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좀 더 무서웠지만 한번 이미 타 본 경험 때문인지 먼 산을 보면서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마부들은 “아줌마 팁 줘요”“장갑, 마스크, 물 일불”이라고 자연스런 한국말로 말한다. 내려오니 장갑을 달라는 애들이 있다. 아마도 빨아서 다시 팔려는건지? 가난이란 귀신을 본 듯하다.
푸에르토 아즐(Puertoazul아주 많이 푸른 이란 뜻이라고 함)이란 휴양지로 이동하는 버스에서의 즐거움은 역시 이 원구 동문의 특강 때문이다. “이러다 변호사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암만해도 동창회 명단에서 이름 빼야 될가 봐 겁난다” 또 “ 아예 이민 가야 되는건 아닌지”라는 말로 우리의 관심을 끌어가면서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는 정말 우릴 “쥑인다, 쥑여!”였다.(지면관계 상 이 부분은 갔다 온 친구들에게 개인적으로 문의 하시길) 푸에르토 리즐은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1시간 30분 거리나 우리가 갔던 따갈 호에서는 3시간이 넘는 거리였지만 우리는 웃고 또 웃고 지루한지 몰랐다.
우거진 푸른 열대 숲과 파란바다가 조화를 이룬 휴양지에 우리가 숙박할 방갈로와 18홀 골프장이 있는 한적한 별장같은 곳에 도착하니 이 관수동문과 예쁜 그의 부인이 우리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별장을 짓고 이멜다 여사가 해군함정을 동원해 보라카이 해변의 모래를 실어와 인공비치를 만들었고, 마르코스 정권 몰락 후 일반에게 공개되기 시작했으나 지금도 아무나 올 수는 없는 개인 휴양지란다.
식당을 앞에두고 여러채의 초가 방갈로 숙소가 있었다.바닷가에 바싹 붙은 방갈로에는 바닷물소리가 들리는 대신 에어콘이 없어 남학생들이 묵기로 하고 여학생들은 4명이 한 조로 에어콘이 달린 뒷켠방갈로에 숙소를 정했다.
바닷가에 나오니 해변엔 하얀 식탁보를 씌운 정결한 식탁들이 놓이고 유니폼을 입은 웨이타들과 송아지 바비큐 냄새가 식욕을 돋우는데 탁 트인 앞 바다엔 노을이 아름답다.
필립핀에 살고 있는 이 관수 동문이 우리들을 위해 푸에르토 아즐에 특별히 마련한 여행의 마지막 저녁은 잘 익힌 송아지 바비큐에 포도주를 곁드린 서양식 메뉴에, 이 관수 부인의 맘 씀이가 돋보이게 한 배추겉절이김치, 오이김치, 고추장아찌, 깻잎장아찌 까지 그야말로 풍성함과 행복 그 자체였다.그 많은 음식 중에서도 여기 저기서 "이 관수 고추가 가장 맛있다"고 해서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내일 귀국비행기는 밤 12시고 낮 스케줄도 마닐라 시내관광 뿐이어서 급할 것도 없는 밤이었다. 김 풍자와 윤 상진과 이번 여행 공동단장인 박 상규는 인사말에 무슨 주술을 걸듯이 이 밤을 계속 “광란의 밤”이라고 불렀다. 골프 코스만 빼고는 폐쇠가 된 이 휴양지는 온전히 우리들을 위한 곳이었으므로 마음껏 놀아보자는 뜻이렸다. 우리는 바닷가에 처음 나간 십대 애들처럼 먹고 마시고 목청껏 노래 부르고, 또 부르고 또 춤췄다. 모두 명가수이고 명 백 댄서들이었다. 모래 위에서 관광버스 속에서처럼 흔들기도하고, 각각 서있는 곳에서 추고 싶은 대로 춤을 추었다.
숙소에 돌아와 자려니 내 침대 옆에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붙어 있었지만 아침까지 잘 잤고 도마뱀도 아침까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방에서 잔 친구들이 모두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고 옆방 친구들까지 불러 현 영의 인도로 기도회도 가졌다.
마지막날 아침 11시에 모여 거창한 “광복 60주년 기념 및 회갑여행”이라고 쓰인 현수막아래서 기념촬영을 하고 여유 있게 마닐라로 돌아와 간단한 마닐라 시내관광을 했다.
16세기에 스페인 식민지시절 유적인 성곽도시 인트라무로스(Intramurous) 북서쪽에 위치한 산티에고 요새(Fort Santiago)는 스페인 총독 레가스피제독에 의해 강이 내려다 보이는 군사적 요충지에 지어진 석조요새이다. 이차대전시 일본군에게 점령되면서 미군, 필립핀 포로수용소이기도 했다. 바닷물이 강을 따라 들어오면 저절로 죄수들이 익사하게 한 수중감옥이기도 해 많은 필립핀인들이 목숨을 잃는 가슴 아픈 필립핀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한다.
1599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19년에 완성하였다는 산아우구스틴성당도 있다는데 가보지는 못하고, 필립핀의 독립운동가이며 영웅으로 추앙되는 호세 리즐의 묘(Rizal Shrine)이 있는 리즐 공원을 둘러보았다. 초생달 모양의 마닐라 시내 대표적 공원으로 우거진 수목과 각색의 꽃들이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리잘을 처형한 자리에 12m의 호세 리즐의 기념비가 서 있었는데 실제모습인지는 몰라도 잘 생긴 청년의 모습이었다.
시내관광이 너무 빨리 끝나서 저녁식사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문제였다. 가이드는 우리 모두가 필립핀 맛싸지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절반은 맛싸지를 받기 싫어해서 약간의 싱갱이가 있었다. 결국 맛싸지 받지 않는 팀은 커피숍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지만 기분들이 나빴다. 마땅히 다른 관광을 준비했어야한다고 항의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결국 마닐라의 교통사정을 생각하면 선택의 여지가없다는 것이었다. 저녁으로는 푸짐한 샤브샤브를 먹고 골프를 위해 남게 된 10명과 집으로 돌아가는 해외파들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 여행이 즐거운 것이 되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을 한 필립핀의 이 관수 부부, 윤 상진,김 풍자, 박상규와 회장단,그밖의 친구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미처 기억해 내지 못한 부분은 친구들이 더 써 줄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