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명한 선시 한 편을 감상하려 합니다. 逍遙太能(1562~1649)의 宗門曲이란 시인데,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水上泥牛耕月色
雲中木馬掣風光
威音古調虛空骨
孤鶴一聲天外長
아래 감상할 본문은 釋智賢 編譯의 [禪詩(현암사, 1976년, 증보재판)]에서 따온 작품입니다. 편역자에 의하면 소요태능은 조선조 명종 17년(1562), 전남 담양 출생으로 13세에 白羊寺에 입산하여 浮休大師에게 經을 배우고, 묘향산에 들어가서 西山대사를 親見하여 公安參究 20년만에 公安打破를 했으며, 인조 27년(1642) 담담히 앉아서 入寂하신 분으로 西山, 鏡虛, 靑梅印悟와 더불어 한국 禪詩의 국보적 존재라고 합니다. 저서로는 <逍遙集>이 있습니다.
선시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읽고 나면 뭔지 느낌은 오는 것 같아서 한 번 골라본 것입니다. 불교신자들에게는 매우 낯익은 작품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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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진흙소가 달빛을 밭간다
구름 속 나무말이 풍광(風光)을 고른다
위음(威音)의 옛곡조 허공 저 뼉다귀라
외로운 학(鶴)의 소리 하나 하늘 밖에 길게 간다.
소요태능(消遙太能, 1562-1649), [종문곡(宗門曲)] (석지현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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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대선사의 잘 알려진 선시입니다. 선시는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논리(언어)나 관념(언어)을 넘어서면 시적으로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흙소가 물 위에서 달빛을 밭갈고, 나무말이 구름 속에서 풍광을 고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논리를 버리고 이미지를 그대로 보면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설령 진흙소(泥牛), 나무말(木馬), 위음(威音王) 등 불경에 나오는 얘기를 잘 몰라도 익숙한 관념의 벽을 깨뜨리면 그 너머 밝은 빛이 느껴집니다. 어린이의 상상력보다 어른들의 그것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바로 언어(논리)에 묶여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시는 언어가 끝나는 데에서 출발한다지 않습니까?
이 진 흥 - 매일신문, 2005/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