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학생시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열중했던 기억이 나는지요?
오늘은 바로 그 괴테의 걸작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인데,
본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무대에서의 전희>에 등장하는 <시인>의 대사 중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어제에 이어 오늘 또 이런 글을 퍼오려니까 앞으로 우리 <자유게시판>에 <도배(?)>를 하게 될까봐서 걱정스럽습니다. 오늘까지만 한 편을 올리고 다음부터는 두 편 혹은 세 편씩 묶어서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읽어보고 자신들의 느낌도 짤막한 댓글로 달아주면 자연스럽게 시와 인생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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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끝없이 긴 실을
아무렇게나 감아서 물레에 쑤셔 넣습니다.
조화를 이루지 못한 삼라만상이
뒤죽박죽 어수선하게 소리를 냅니다.
이 끝없이 단조롭게 흘러내리는 연줄을 갈라내어
가락을 이루고, 생생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개개의 것을 보편적인 조화로 불러들여
아름다운 화음으로 울리게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 누가, 휘몰아치는 풍우를 정열의 광란이 되게 하며,
저녁의 붉은 노을이 엄숙한 뜻을 품고 타오르게 하는가요?
그 누가 사랑하는 이의 가는 길에
온갖 아리따운 봄철의 꽃을 뿌릴까요?
보잘 것 없는 푸른 잎을 엮어서
갖가지 공훈의 영예로운 관으로 만드는 것은 뉘일까요?
올림포스를 안정시켜 신들을 모으는 것,
그것은 시인 속에 계시되는 인간의 힘입니다.
괴테(1749~1832) '파우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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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은 그것에 이름을 붙여서 의미를 만듭니다. 그런 뜻에서 인간은 제2의 창조자로서 시인이지요. 사물에 이름을 붙여 의미(신화)를 창조하는 시인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올림포스라는 신화의 동산을 꾸며 신들을 살게 하겠습니까? 어둡고 무질서한 세계에 언어의 빛을 비추어서 질서와 조화를 이룩하고 우리의 삶에 의미를 창조하는 일이 바로 시인의 사명이라는 말이지요. 신화(의미)가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동물적인 생존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괴테는 언어로 사물의 이름을 붙여 삶의 의미를 만드는 시인이야말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닐까요?
이진흥(시인) -매일신문, 2005년 07월 0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