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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은 동두천시 소요동에 있으며 한수 이북 최고의 명산, 또는 경기의 소금강 등으로 불린다. 소요산은 해발은 낮아도 수목과 폭포, 봉우리가 줄지어 있다. 소요산에는 곳곳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원효가 수도했다는 원효대도 있고 그 원효를 흠모하며 한곁에 머무르던 요석공주의 별궁터와 제일봉 의상대 옆에 있는 공주봉(원효가 요석공주를 두고 지은 이름)도 있다.
산 중턱의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도를 깨친 곳으로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이 있은 후 심산유곡인 이곳을 찾아와수행하다가 절을 지었다고 한다. 수행 도중 관세음보살과 친견하여 자재무애(自在無碍)의 수행을 쌓았다하여 자재암이라 했다고 한다. 자재암 주변엔 아담한 물줄기의 폭포가 널려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혼란한 시기에 생존하였던 원효(元曉 617-686)는 의상과 더불어 당나라에 유학하려 두차례(34세, 650년 및 45세, 661년)나 시도하였으나 자신의 마음밖에 따로 법이 없음을 깨닫고 혼자 되돌아와 보편적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왕성한 저술,선교활동을 펴,그 사변력, 통찰력과 문장력에 대한 명성이 항간에 자자하였다.
그는 광대들이나 쓰는 무애박을 치고, 무애가를 부르며, 무애춤을 추며, 광대, 백정, 기생, 시정잡배, 몽매하고 늙은사람들 사이를 방방곡곡 떠돌며 춤추고 노래하며 술마시고 거문고를 켜며 무수한 대중에게 불법을 전하였다. 코흘리개 아이까지도 부처에 대해 알게 되었다한다.
김춘추의 둘째누이인 요석공주(瑤石公主)는 첫남편을 백제전투에서 잃고 홀로 되었는데 불심이 깊었던 공주는 인격이 고매하고 화랑시절 백제전투에도 참가했던 원효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는 667년 문무왕 7년경 부왕인 태종 무열왕의 과부 공주인 요석과 만나 얼마 후 설총을 낳았다.
요석 공주룰 먼나기 전 원효는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소요산에 가면 원효가 과연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자취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