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산제때 우연히)
청계산에서 시산제 끝나고 회식하는 자리에서 내 옆에 우무일이 앉아 있었다.
박미자회장이 이리저리 술도 따르고 왔다갔다 하더니 한참뒤 그 앞으로 와 앉았다.
박회장이 우 전전회장이 풀어가는 썰을 듣고 맞장구도 치고 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요즈음의 세태와 세대간의 문제등 포괄적인 얘기가 주제였다.
옛날에 박태근이 우리 신문에 한번 비춘 얘기도 섞여있다.
옆에 있었지만 술먹느라 다른 쪽에 신경쓰다 대충 들은 얘기로만 그저
역시 꼰대들 생각이 비슷한거라는 속생각을 가졌다.
우무일에게 그 옳은 얘길 우리 싸이트에 글로 올리면 좋지 않겠냐 했다.
난 한 얘기도 없는데 우무일이 나보고 글쓰라 했다. 근데 어느 대목에서인가 우리 세대가
그래도 가장 복받은 세대라는 말 참견을 딱 한 번 했더니 박미자가 동감이라 했다.
우무일이 나보고 글을 올리라 했고 난 자발적으로 그 날 저녁에 올려 놓으마 했다.
"오늘"이라 한 일자는 어겨서 며칠 지났지만 그래도 올리겠다고 한 약속은 약속이니
지키긴 해야겠다.
(전에 떠들었을 때의 기억)
몇 년전 어딘가 갈 때였는데 같은 차 타고 몇 시간을 가는 코스니까 우리끼리 모처럼
재미있게 떠들고 가자고 하다가 차 안에서 정태영이 나에게 어려운 주제를 제기해
얘기가 길어진 적이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우리 세대가 지금 현 시점에서
우리 앞의 세대, 그 앞의 세대들과 비교해 그리고 우리 후배들 세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행복한 세대이냐 아니면 불행한 세대에 속하는 것이냐에 관한 문제였다.
획일화하여 이야기할 만한 주제도 아니려니와 논거를 대는 일이나 접근하는 방식이
쉽지 않은 문제이고 얘기를 풀어나가기도 어려운 주제였으므로 이건 도무지
그냥 어물쩡 넘어 갔던가 아니면 간단하게 넘어갔어야 함이 맞는 일이었을 터인데
그리도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그 때 내가 주제넘게도 그리고 건방지게도 떠들었다.
마침 당시에 내가 생각해 보고 있던 주제와 내용이라 그랬겠지..
그 때 내가 단언하고 한 주장은 우리 세대가 가장 행복한 거라는 것이었다.
내가 떠들면 정태영이 의문과 반론을 제기하고 그러면 다시 설명하고 했으니 아마
토론하며 간 시간이 족히 한시간 이상은 되었을 거다.
아니 재미있게 가지고 했으면 가볍고 편한 주제로 히히 껄걸 했어야 했는데
왜 무거운 얘기가 토론으로 갔지?
근데도 당시 우린 히히 했었다.
그럼 그 때 어딜 같이 갔던가? (중부고속도 타고 멀리 갔었는데.이상훈이가 동석하고..)
허 참!! 그걸 잊었다.
그 시절 그 때의 그 주제 말고도 기회 있을 때마다 정태영은 왜 이것저것 나에게
말을 많이 시키려 했을까? 이래도 저래도 다 좋고 그립다.
(우리 세대의 경험)
각설하고
난 쭈욱 우리 연배의 세대가 한국사회에서
복받은 세대에 속한다는 생각을 해 왔다.
해방 전후에 태어나 학교 다니기 전 6.25를, 중고생 때 4.19 /5.16을 겪고,
대학때 한일회담파동을 겪고 사회에 나와서는 월남전쟁과 중동특수를 기반으로
경제발전을 하던 시기에 가정도 가지고 경제생활을 했던 세대가 우리이다.
그리고 IMF체제를 겪고 난 이후부터 서서히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기 시작한 세대이다.
이렇게 세대구분을 하는 건 주어진 조건이지 선택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겪지 않았다.
6.25 전쟁과정을 지나긴 했지만 큰 틀로는 직접 겪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
혹 직접 겪은 거라 주장함에 동의하더라도 우리 윗 세대들보단 나은 입장에서 겪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때 인민군이 되었다거나 국방군이 되었던 것도 아니요,
슈샤인 보이가 되어 보았거나 하우스 보이가 되어 본 세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또 살아남기 위해 피란을 갈까 말까 결정을 하거나 식구들의 식량과 땔감을 구하던 하는 일의
주체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 나아가 "장백산 줄기줄기.."로 시작되는 김일성찬가를 부르긴 했어도 직접 배워
부른 것도 아니다.
학교가 피란 가서 천막학교를 다닌 일도 없었다.
( 이 얘기 부분에선 세대라는 말을 관념적으로 5년이나 십년 정도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우리 아래 세대들과 비교하더라도 전쟁의 참화 후 복구과정에서
고생된 점이야 큰 차이 없이 비슷한 것이고 전쟁의 후유증은 아랫 세대 사람들에게도
이어진 뒷 문제라고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모든 세대가 다 같이 겪어 온 일을
겪은 것이다.
우린 어린시절 팽이치기, 연날리기를 알고, 자치기와 고무줄도 알고 공기놀이도 하며
땅따먹기도 해 본 세대요 썰매와 스케이트에서 스키까지 다 섭렵할 기회가 있던 세대이다.
우리가 지나 온 학창시절은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희망이 있었고 의욕이 있었다.
Sad Movies를 부르며 The End of the world를 부르면서 반대로 공부가 재미있기도
했다. 잘 먹지 못했으면서도 철봉대에 매달리며 그리고 아령이나 곤봉을 만지며
신체단련을 했고 어렵던 아니던 인쇄물이 있으면 읽고 더구나 책이 있으면 무조건 읽었지 않는가
그래서 삼국지와 서유기도 만화로 읽지 않고 톨스토이의 인생론을 읽고 앙드레 지드와 모파쌍을,
괴테와 하이네를 알고 펄벅과 써머셋모옴을 논했던 세대였지 않은가.
우리 세대는 부모의 도움없이 가정을 이룬 세대요 셋방살이부터 시작해 내 집을 마련했던
기회를 가졌다. 연탄도 때어 보았지만 편안한 난방의 쾌적함도 누려 보는 세대요
경제규모가 그저 팽창하고 고속성장만 하는 시대에 살았고 그래서 일자리 걱정도 없었다.
직장에서도 고속승진을 한 마지막이 우리 세대라 본다. ( 아니면 마지막 하나 전일 것이다.)
또 이런 기회나 저런 기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나라 밖의 사정을 알고 많이도 체험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세대는 농경사회와 산업화사회를 거쳐 정보화사회로 이행된
우리 사회의 압축성장과정에서 생긴 변화과정을 몽땅 다 겪은 세대다.
그래서 우리는 벼 보고 쌀나무라 하지 않고 농사의 원리나 방법도 이해하는 마지막 세대이고
그런가 하면 자판을 두드리는 꼰대 세대에 속한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시절에도 우리처럼 농경부터 정보화사회로 이행하는 수 백년의
변화를 한 세대에 겪은 일은 없었다. 이것은 정도의 차를 갖지만 한국사회에 같고
각 세대에 공통된다. 하지만 어느 세대가 모든 것을 몽땅 짧은 기간에 다 주체적으로
맛 보았냐고 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우리 세대에 해당하지 그 윗 세대나 아랫 세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부모의 도움없이(크게 얘기해서) 독립하였지만 부모를 돕고,
그리고 자식을 건사해서 독립시키고도 자식을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을 주게 한 것도
개개인이 똑똑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시대적 상황이 다른 세대보다 여건이 좋고 다른 세대보다
복받아서라고 보는 것이 더 바른 시각이 아닐까.?
한국사회에서 우리 연배의 세대가 큰 틀에서 다른 세대보다 복받았다고 보지만
다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교육경험이라는 틀에서 보면 우리 친구들이나 주변은 같은 세대 안에서도 더
복받았다고 생각한다.
천하부고를 나온 사람들이 수혜받은 계층에 속한다는 생각을 난 가지고 있다.
(시대가 다를 때)
5.16때 소위 혁명주체세력으로 끼었다가 반혁명사건으로 투옥되고 쫏겨낫던 인사중
박창암이란 에비역장군이 노년에 쓴 소설이 있었다. 꽤 오래 전 읽은 건데 책의
제목은 잊었지만 내용인즉슨 근년에 시비거리가 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와도
연관이 있는 줄거리의 미래소설이다.
우리나라의 국운이 크게 융성하여 고구려의 고토였던 지금의 만주
즉 중국 동북 3성이 중국의 중앙정권 약화시기에 하나하나 주민들의 강력한 요구로
통일한국에 복속해서 한국의 영토로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이런 미래의 사실을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깨어나서 알게 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시대상황이 2020년이나 2030년쯤 되는 얘기다.
주인공은 몇십년만에 깨어나서 만주에 가 보게 되고 그동안 있었던
한반도 주변의 움직임을 몽땅 과거사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원 주제는 다물사상과 한민족의 밝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소설의 본 주제는 아니면서도 주인공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이 소설에서
부수적으로 제기된다. 주인공이 해동되어 보니 냉동되기 전 어렸던 자기 아들이
옛날 자기보다 더 늙어 주인공인 아버지는 더 젊고 아들은 더 늙은 모습의
어색한 가족관계가 이 소설의 중간부분부터 나온다.
저자도 문제를 제기했지만 과연 이런 일을 정말로 현실에 대입한다면 인간의
의식이란 측면에서 주인공의 생활이나 그 사회에서의 관계란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될까?
주인공은 1920년대 출생자이니까 20세기의 후반부에 한국사회에서의 역할을 한 사람이고
주인공의 아들은 20세기 후반기에 태어나 21세기 중반에 사회의 리더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 상황에서 부자는 겉모습으로 역전되어 만나고 있는 것이다. 즉 관계의 문제가 제기된다.
두 번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 경험이 다른 이 주인공이
수십년이 지난 새 시대상황에 어떻게 적응해 살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과연 주인공은 연속성이 없이 뚝 떨어진 미래사회에 처음 가서 무엇을 새로 학습할 것이며
그래서 무슨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또 누구와 벗하고 살게 될 것인지 하는 문제다.
더구나 그 때 같이 사는 사람들은 자기와 기왕에 알던 자기또래의
사람은 없고 다 자기 친구나 후배의 자식세대 사람들인데..
사람마다의 생각이 다르겠지만 만약 이 소설을 나보고 이어 가 보라 한다면 난 주인공이 그의 새 삶의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자연스런 설정으로 생각하고 이야기 전개를 해 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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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하고 산다는 문제)
박씨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동면하고 있는 동안 나라는 발전한다.
그런데 그는 그 시절에 살아 있지 못하고 동면하고 있다.
그러다가 뒤늦게 발전된 우리나라의 모습을 결과로만 본다.
그리 오래 살아 좋은 세상을 누려 보려 했던 주인공은 살아서부터는
필시 그와 반대로 그 미래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말지 않을까 싶다. 소설을 이어 간다면 말이다.
주인공은 그의 세대가 있고 그것은 이미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해가 높고
아무리 적응이 되더라도 벗하고 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공유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생각이다.
동시대인(同時代人)이어야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래야 이해도가 높고 벗하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끼리의 벗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끼리의 공감대여야 의미가 강한 공감대라는 생각이다.
30년뒤 동면에서 깨어나 그때 우리 연배에 속하는 사람들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어울릴 수 있다면 모르되.
이것이 세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리니 세대의 차이는 인정하자.
친구들이여
우리는 지금 졸업이 40년 되었다는데 큰 의미를 두고 작년 한 해 특별히
더 모이고 특별한 일들을 더 했다. 그건 앞으로 20년, 30년 동안 더 친해지자고 하는 초석이다.
금년은 회갑을 중심으로 의미를 두고 더 친해지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이길래 우리라고 하는가?
같은 세대가 같은 시대를 걸어 와 비슷한 경험과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우리인데
그 중에서도 동문이라는 질긴 끈을 가지고 있으니 더 더욱 우리라 하고 그래서 앞으로
30년을 얘기하는 것이고 그러니 공감대가 형성되고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행복한 세대에 속하는 우리들 연배에서 우리 친구들은 좋은 학교 다닐 기회까지
있었던 더 복받은 사람들이요 거기에다 그 중에서도 남녀공학에 다녔던 축복까지 있으니...
나의 친구들이여~ 앞으로 우리끼리 더 잘 지내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