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소장의 가을’
지난 주말, 미국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큰 놈이 비자를 갱신하려고 2년 만에 돌아왔다. 공부에, 취업에 정신 팔려, 서른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아직 짝을 맞아 들이지 못한 노총각이어서, 요번엔 꼭 마땅한 색시감을 정해야 한다고, 아내가 벼르던 참이었다. 이 애 귀국에 맞춰 뿔뿔이 흩어져 살던 둘째 내외와 막내 내외가 모두 우리집에 와서 모처럼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주말을 보냈다. 절 집처럼 적막했던 집안에 활기가 돌고, 식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하였다.
밥을 먹으며 나는 이 아이들에게 계획된 제안을 하나 내놓았다. 혹 가볍게 들어 넘기지 않을까 하는 기우에서 ‘숙제’라는 말까지 들먹이며 권고한 일은, 3시간짜리 TV 드라마 ‘홍 소장의 가을’을 함께 보라는 거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다시 보는데 필요한 돈을 미리 SBS 홈페이지에 적립해 놓고 꺼낸 말이었다. “이야기기의 템포도 느리고 아마 주제가 너희들 취향이 아니어서 좀 지루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너희들에게 내는 첫번째 숙제니까, 졸지 말고 끝까지 보도록 하라”는 말까지 덧붙였으니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었을 게다.
얼마 전, 우연히 SBS에서 방영한 이 드라마를 아내와 같이 보았다. 돈이라는 모티브를 끌어들여 이야기를 이어 갔지만, 부부, 부자, 형제 관계의 진정한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이게 바로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주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작가 김수현과 같은 필재가 우리에겐 없어 그런 감동적인 극본을 쓸 수 없고, 배우 최불암, 김혜자와 같은 재주가 없어 그런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줄 수 없을망정, 이 드라마의 주제는, 우리세대 이전의 한국 사람들에겐 공통적인 감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드라마를 보지않았다 해서 이런 공감대가 훼손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나에겐 있다. 그러나 이런 정서가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도 이어져 내려왔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보지않아도 될 사람은 눈물 찍어내며 청승맞게 TV 앞에 앉아있고, 정작 보아야 할 애들은 다른 채널로 돌리지 않았을까?” 라고 아내에게 물은 까닭은 바로 이런 의문 때문이었다.
한눈 팔지않고 일생을 외곬으로 살아 온 홍상수, 어려운 살림살이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순경으로 취직하여 파출소 소장으로 정년 퇴임하고 아파트 경비라도 하려고 알아보는 중이다. 그러나 부모의 뜻에 따라 머리 좋은 동생, 상준을 대학까지 뒷바라지했다. 일류대학을 나온 상준은 대기업에 취업하여 회장의 심복으로 자리잡고 승진을 거듭하여 40대에 사장에 이른다. 상수는 그런 동생에게 ‘누가 될까 봐’ 형제라는 내색조차 하지 않고 산다. 회장이 죽자 2세에게 넘어간 회사에서 상준은 하루 아침에 내쫓긴다. 더구나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 당하여 막대한 손해를 입고 실의에 잠긴다. 상준의 아내는 남편의 처지야 어떻든 자기 체면과 과시욕을 유지하려고 남편과 불화가 싹튼다. 음식점 주방 일을 하며 아이들을 남부럽지 않게 기르고 가사를 빈틈 없이 꾸려 온 상수의 아내, 남편을 존경하고 온 가족의 화목을 위해 희생해온 주부였지만, 아들 결혼축의금을 두고 갈등을 일으킨다. 드라마는 이 장면으로 시작된다. 겉으로 표현도 못하는 온갖 고민으로 양 어깨가 짓눌린 집안의 기둥, 그렇지만 오히려 매사에 감사하며 사는 상수, 그런 남편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아내, 이기심과 자만심으로 살아 온 상준과 상준의 아내, 부모의 걱정은 아랑곳 없이 눈 앞의 이익만 보이는 상수의 자식들, 그리고 그 집안을 둘러 싼 가족 사이의 갈등으로 이 드라마는 전개된다.
요즈음 들어 부쩍 세대간의 갈등이란 문제가 두드러졌다. 상대방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을 때 갈등이 생긴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갈등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족간에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따지기란 여간 구차스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가족관계는 서로 공통적인 정서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려면 서로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다면 비록 피를 나눈 가족이라 하더라도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증폭되기 쉽다. 우리세대의 가족관계에 대한 공통적인 정서, 부부, 부자, 형제의 의미를 간접 경험으로라도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까닭은, 바로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한가지도 없는데 우리세대의 감성이 자식세대까지 변함없이 이어가기를 바란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바람일 터, 그러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경제 성장에 따른 물질적인 풍요,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생활수단의 향상, 통신수단의 변화에 수반된 정보와 지식의 확산 등, 날로 새롭고 편하게 바뀌는 게 이루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고, 이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생각이 바뀌어 가는 건 어쩌면 아주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국문화에 익숙한 외국 사람들조차 입이 마르게 칭송하던 좋은 전통, 우리나라의 가족관계를 이렇게 허물고 버려야 할 이유는 없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남편, 혹은 아내가 어떤 처지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고 설사 알아도 외면한 채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고, 부모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형제들이야 밥을 굶든 말든 우리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점점 만연되어 가는 게 요즈음 세태가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마음의 가책도 없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 탓이 아니라 모두 세상이 변화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바뀐 거라고 합리화 시킨다.
“이러는 게 아니지… 니가 이런다고 누가 알 거라구… 이누무 세상이 그런 걸…” 동생의 주검 앞, 상수의 절규가 귀에 쟁쟁하다. 이 가을이 스산한 건 홍 소장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에서, 이웃에게 버림받고, 마침내 믿었던 가족, 아내로부터, 자식들로부터, 형제들로부터 외면 당한 채, 잊혀져 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진대, 그들이 무슨 희망으로 이 가을을 따스하게 보낼 수 있으랴.
우리집 아이들이 이 드라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지 숙제 검사 받을 나이는 지났다. 스쳐 지나가는 단면이라도 마음에 담았다면 좋을 일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이런 숙제를 내는 일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나이 오십이 지난 지 이미 오래, 육십 고개로 넘어가는 지금까지, 하늘의 명을 알기는커녕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있는 내자신을 돌아보면, 자식들이 우리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기대는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든다.
(2004. 11. 30.)
이튿날 아침을 먹으면서 그 드라마의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태영이는 작자가 현실을 너무 편향된 시선으로 과장하고 있다고 심하게 비판을 했다. 예컨대 김혜자의 자녀들이 결혼부조금 요구를 하는데 실제로 그런 젊은이들이 몇 퍼센트나 되겠는가,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전체적인 풍조인양 부풀리는 것은 작가로서 문제가 있고, 그 작가(김수현)는 우리 사회의 불륜이나 부정적인 가치들을 옹호하고 센세이셔널리즘에 경도되어 어떤 인기몰이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밤늦도록 지리산자락의 한 콘도에서 청승스럽게 김혜자에 빠져있던 나의 <홍소장의 가을>옹호론과, 평소에 매우 정감어린 태영이의 그러나 매우 논리적인 비판론이 부딪쳤던 25일 아침의 지리산에서의 토론은 재미있었다. 지금 병근이의 드라마 해석, <이 드라마의 주제는, 우리세대 이전의 한국 사람들에겐 공통적인 감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해서 이런 공감대가 훼손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나에겐 있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의 친애하는 태영이의 날카로운 비판도 좀 들어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