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맞은 넷째 일요일이라 한번 쉬는 대신 짧은 코스를 골라 청계산 이수봉으로 정했다는 회장의 글을 읽은 후부터 나는 작은 갈등을 느꼈었다. 작년 9월에 마지막으로 등산한 후 만 1년간 건강 문제로 등산회 회식 장소에만 어울렸는데 이번엔 비교적 쉬운 코스이니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용기를 내어 아침 8시에 집을 나서서 차를 세 번 바꿔 타고 옛골로 갔다. 마지막 강남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누가 툭 치기에 돌아보니 왕십리 캠퍼스 고평자가 등산 차림으로 있다. 걔네들도 우리보다 30분 빨리 청계산 매봉에 간단다.
버스 안에는 마치 귀성 안한 사람들이 모두 청계산으로 집합하는지 버스가 초만원인데 옆에 있는 여자의 배낭에서 차가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린다. 강기종 김윤종 두 딸랑이도 없는데 웬 종소리인가. 처음엔 거슬리다가 차츰 종소리는 행운의 소리라는 생각으로 바꾸니 견딜 만 했다. 중국인들은 종소리가 행운을 불러들인다 하여 대문고리에 작은 종을 매다는 집이 많다고 한다. 종소리 덕에 오늘 산행에 행운이 있을지어다.
9시 30분에 집합 장소에 가니 걔네들이 서너명 있고 우리 팀에선 내가 1착이다. 조금 있으니 제일 먼 김포에서 7시에 출발한 박효범 총무가 맘좋은 아저씨 웃음을 지으며 나타난다. 이어서 김윤종, 그리고 정태영 회장이 운전한 차에서 대구에서 추석 지내려고 전날 역 귀성한 이진흥과 함께 내리고 분당팀 네 명이 심항섭 차에서 내린다. 황정환 강기종 장용웅등이다.
최근 부쩍 얼굴이 날씬해진 주환중 전 회장은 석 달째 어부인이 지방에 가 있어서 추석도 홀로 보내게 됐다는 김수관과 함께 택시에서 내리고, 이성희도 어느 모르는 남자 두 명과 택시에서 내린다. 아니, 우리 남학생들을 두고 웬 남자들과 동행?
논현역에서 버스를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는데 옆에서 같은 방향의 두 남자가 말을 걸면서 같이 택시를 타자고 해서 동승했다는 해명. 미터 요금이 무려 8800원이라는데 공짜로 탔으니 이 역시 행운. 역시 이쁜 여자는 달라. 성희야 내내 오늘만 같으렴.
이어서 줄줄이 모이니 박정애, 멀리서 온 서성수 김경석 이명원 동문도 반갑고, 이승희 김용호 민일홍 김상건 이재상 김진국 등 모두 22명이 집합. 박정애는 전날 추석 상차림 준비를 거의 완료하고 와서 역시 부지런함을 보였고, 평소 참여하던 여학생들 몇 명이 추석 준비로 바빠 불참했고, 단골 이상훈은 전날 주말에 시집가는 딸의 함을 받고 뒷처리로 불참했다.
출발은 10시 5분. 정태영 회장은 나한테 지팡이를 준비해와서 준다. 선두에 강기종 김윤종 김진국 심항섭 장용웅 등이 가고 그 뒤를 쉬엄쉬엄, 도란도란 대화하며 박정애 이성희 김수관 황정환 이승희 김경석 서성수 이진흥 등이 중간 그룹을 형성하고 올라간다.
후미에는 김용호 이재상 이향숙 등이 숨차게 쫓아가고.
중간쯤 갔는데 갑자기 뒤에서 신해순 송인식이 나타나 합세한다. 집합 장소에 10시 20분에 도착하여 부지런히 쫓아왔단다.
난 코스 없이 무난한 길로 올라 해발 584 m 이수봉에 내가 오른 것이 12시 10분전. 선두와 중간 그룹은 벌써 앉아서 배를 열심히 깎고 있다. 배를 두 쪽 씩 나눠먹는 것으로 정상 회동을 마치고 12시 하산.
내려오는 길은 더 평탄하다. 1시경 식당에 도착. 회장이 근래 시집간 딸 생각나게 한다는 신혼부부가 운영하는 해장국집인데 삼겹살도 맛있고 올갱이 해장국도 별미. 식당에 가니 이영식이 먼저 와 있다가 반가워한다. 집합지에 10시 30분에 와서 혼자 이수봉가는 중간까지 갔다가 식당으로 왔다고 한다. 이러구러 남학생 22명, 여학생 3명, 오늘 도합 25명이 모였으니 명절 앞두고 성적은 양호한 편이다.
한잔에도 알딸딸한 막걸리와, 신해순 교수가 준비해온 홍삼차를 소주에 탄 즉석 홍삼주로 기분 좋게 먹고 마셨는데 회장이 또 추석빔까지 준다나. 어릴 때는 설날과 추석을 기다리는 이유가 음식보다 설빔 추석빔 때문이었지. 새 옷, 새 양말, 새 신발 그것들을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우리 회장이 고맙게도 추석빔을 준다. 등산 양말 한 켤레 씩.
회비 만원 내고 음식값은 그 두 배 정도인데 선물까지? 난 좀 심통부리느라고 내가 등산회 회계 감사인데 이렇게 적자 내는 걸 문제 삼겠다고 엄포를 놓으니 회장 왈, "사표 내면 그만이다." 라고 한다. 아니, 3박4일로 최근 지리산 종주를 하고, 열심히 일하는 썬파워 회장이 나 때문에 사표내면 그 욕을 내가 죽을 때까지 먹을 테니 안되지. 문제 안 삼을 테니 오래오래 하시지요, 회장님.
2시 반경 모두 헤어질 때 이진흥이 이렇게 말한다. "졸업 후 처음 만난 동문들이 많은데 장용웅 서성수는 고교시절 그대로더라. 분위기가 너무 생기 있어서 좋았다."
이진흥 동문, 이젠 퇴직하고 詩作에만 전념하는데 가끔 상경해서 산행에 동참하기 바랍니다. 회비 만원으로 행복해지는 모임이 우리 등산회 말고 또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