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8월 22일(일) 113회 등산모임은
계룡산 갑사->용문폭포 ->금잔디고개 ->남매탑->동학사 코스로의 산행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의견 주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 한국의 산하 ; 계룡산 편)
갑사 :갑사는 백제 구미신왕 원년(420)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백제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정유재란시 모두 불탔던 것을 선조 37년(1604) 이후 하나씩 중창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조선시대 중·후반기의 건축물들이다. 경내의 철당간은 통일신라 때, 부도는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갑사는 문화유산이 여럿 남아 있는 고찰이다. 특히 선조 2년(1569) 만들어진 월인석보(月印釋 譜) 판목(보물 제582호)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로 처음 지은 글이 담긴 귀중한 자료다. 철당간(보물 제256호), 부도(보물 제257호), 동종(보물 제478호) 또한 보물급 문화유산이다.
동학사와 홍살문 :비구니 강원(講院)으로 유명한 동학사(東鶴寺)는 신라 선덕왕 때 청량사(淸凉寺)란 이름으로 창건했고, 고려때 풍수도참설의 대가인 도선(道詵)국사가 중건했다 전하는 고찰이다. 동학사란 명칭은 사찰 동쪽 학바위와 관련돼 지어졌다 한다. 예전 비구사찰이었다가 비구니들의 수련장으로 바뀌었다.
당우들은 조선 중기에 소실 이후 새로 지은 것들이어서 별다른 문화재는 없지만 주변에 아름드리 수목들이 빼곡이 자라고 있고 비구니 스님들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정갈한 사찰이다. 동학사는 계룡산의 실소유자다. 동학사 일대의 임야뿐 아니라 쌀개봉과 관음봉, 삼불봉 일대가 모두 동학사의 소유로 등기되어 있다.
동학사에는 여느 사찰에서 보기 드문 홍살문(紅-門)이 있다. 홍살문은 경의를 표하라는 뜻에서 능(陵)·원(園)·묘(廟)·관아(官衙)의 앞에 세운 나무문이다. 붉게 색칠한 창살을 세운 나무문이 세워진 것은 절 안에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동계사(東鷄祠)란 이름으로 사당이 처음 들어선 것은 고려 태조 때 신라 충신 박제상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조선 초 고려조의 세 충신(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을 기리기 위해 삼은각(三隱閣)을 지어졌고, 세조 때는 단종을 비롯,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제거했던 280여 명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한 초혼각(招魂閣)을 세웠다.
갑사구곡 :벽수(壁樹) 윤덕영(尹德榮·1873-?)이 갑사계곡의 절경에 취해 간성장(艮城莊)을 짓고 머물면서 이름 지었다는 갑사구곡(甲寺九曲)은 갑사에서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계곡의 절경 지로, 제1곡부터 제9곡까지 이름이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제1곡 용유소(龍遊沼). 갑사매표소 못미처 용추교 아래 위치.
제2곡 이일천(二一川). 제1곡에서 계곡 위로 200보쯤 오르다 만나는 합수지점.
제3곡 백룡강(白龍岡). 제2곡에서 200보 정도 위 위치한 계류와 바위, 숲이 좋은 곳.
제4곡 달문택(達門澤). 제3곡에서 120보 정도 떨어진 연못.
제5곡 군자대(君子臺). 갑사구곡 중 최고의 절승지.
제6곡 명월담(明月潭). 제5곡에서 100여보 위에 위치.
제7곡 계명암(鷄鳴巖). 제6곡에서 오른쪽 산속으로 500보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
제8곡 용문폭(龍門瀑). 갑사에서 600m 가량 떨어진 폭포. 제9곡 수정봉(水晶峰). 신흥암 오른쪽 산 위 150보 떨어진 곳의 바위.
남매탑 :'오뉘탑'이라고도 불리는 남매탑은 백제계 양식과 신라계 양식이 혼합된 석탑이다. 7층(오라비탑)과 5층(누이탑) 각기 높이가 다른 두 기의 석탑은 지방문화재였다가 98년 8월 보물로 승격. 남매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백제 멸망 후 왕족 한 사람이 이곳에서 수도중이었다.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몸부림치기에 살펴보니 목에 뼈가 걸려 있어 그것을 빼주었다. 그 며칠 뒤 눈이 내리는 겨울밤에 호랑이는 젊은 여자를 내려놓고 갔다. 여자는 결혼식을 올리고 신방에서 자다가 잠깐 밖으로 나온 사이 호랑이에게 업혀 왔다고 했다
해동 후 그는 이 여자를 고향에 돌려보냈으나 여자의 부모는 죽을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데리고 살기를 권했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살되 서로 범접치 않으며 구도에 몰두, 깨달음을 성취했다. 이에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후대인들이 석탑 2기를 쌓았다.'
이러한 전설을 두고 조선일보 이규태 논설고문은 '색욕을 이겨낸 도행의 승리, 그 진한 인간 상황의 기념탑'이라고 했다. 우리 역사에서 신앙과 색욕과의 갈등 사례는 적지 않은데, 거의가 색욕에 실패하고 만 것에 비추어 매우 희귀한 사례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