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퍽 반갑다. 나는 전에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이라는 논문 중 <사물과 작품> 부분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매우 좋아해서 노트해 둔 일이 있다. 그대로 여기에 옮겨본다. 하나의 그림(예술작품) 속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삶의 진리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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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사실, 고흐는 이러한 종류의 구두를 여러 번 그렸다. 그러나 이 그림 가운데에서 무엇이 나타나고 있을까?.........(중략)....흐의 그림을 보고서는, 우리는 심지어 이 구두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조차도 확인할 수 없다. 이 한 켤레의 촌 아낙네의 구두의 둘레에는 그것이 귀속되어야 할 아무것도 없이, 다만 무규정적 공간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이 구두의 용도를 암시해주는 최소한의 밭 흙이나, 길바닥의 흙조차도 묻어있지 않다. 다만 한 켤레의 촌 아낙네의 구두가 있을 뿐,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 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이 응하시고 있으며,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있고, 구두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여 있다. 구두창 아래는 해 저물녁 들길의 고독이 깃들여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동요하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과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전전긍긍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이 구두라는 도구는 대지(die Erde)에 속해 있으며, 촌 아낙네의 세계(die Welt)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다. 이 본존된 귀속으로부터 두구 자체의 자기안식(In-sich-ruhen)이 생긴다...... (말틴 하이데거 <예술의 철학적 해명>, 오병남 역, 경문사, 1979, pp.98-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