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이야기
두 번이나 대통령후보로 나섰던 이회창씨가 선거에서 실패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아들의 병역비리 연루설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과 6범인가 7범인 희대의 사기꾼이 녹음테이프를 날조하여 폭로한 사건이라는 사실이 사후에 밝혀지기는 했으나, 이미 끝나 버린 선거를 돌이킬 수도 없는 일, 당사자인 이회창씨에게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아들 둘이 모두 군에 가지 않았고 그 배후에는 이런 저런 비리가 있었다더라는 악의적인 선전과 입소문이 후보의 당락을 좌우할 만큼 힘을 지닌 이슈가 되는 나라는, 세상 천지에 오직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남자가 성인이 되면 강제로 다녀와야 하는 데가 군대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현상이리라. 그러니 군대란, 우리나라 뭇 남성들에게 자연스런 공감대요, 이런 이야기가 공통화제가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군대이야기는 축구이야기와 더불어, 여자들에게 가장 지겨운 얘기거리라고 한다. 공감대가 전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들이 싫어하는 주제, 제1위는 단연 군대 가서 축구 했던 얘기가 꼽힐 거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서울월드컵대회로 축구의 열기가 온 나라를 휩쓸었던 2002년, 비단 남자들뿐 아니라 온 장안의 여자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서로 얼싸안는 흥분을 맛 보았으니, 그 뒤로 축구이야기는 여기서 빠져버렸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군대이야기와 축구이야기는 남자들 모두에게 공통된 화제요 가장 흔한 수다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남들 모두 다녀오는 군대에 가질 않았으니 이렇게 자주 등장되는 대화에서 열외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많지않은 화제거리 하나를 빼앗긴 셈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를 내놓고 말할 처지도 아니다. 화제거리 만들려고 군에 가는 사람은 없을 터, 잘 못 입밖에 꺼냈다가는 뭇매나 자초할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군에 징집되지 않은 이유는 부선망(父先亡)단대독자라는 어려운 용어의 병역법 덕택이었다. 당시의 병역법에 따르면, 아버지를 여읜 외아들은 2대이상의 독자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현역 징집을 면제하고 바로 제2보충역으로 편입하게 되어 있었다. 내 옛날 주민등록증 뒤쪽 병역란에 적혀있던 “법44조”가 바로 그 규정이었다. 인사청문회나 선거철마다 예외 없이 등장하는, 후보 자신과 그 일가 친척의 병역문제를 보면, 내가 그런 대상이 아니었기에망정이지 만일 공직에 나가려 했다면 병역문제로 무슨 해괴한 말을 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병역의무가 아무 말썽 없이 마무리된 대가로, 평생동안 남들이 침 튀기며 군대얘기에 열 올릴 때, 반벙어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징집 연기를 신청하기 위해 처음으로 찾아 간 본적지, 연기군 전동면사무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는 거주지가 아니라 본적지에서 병적업무를 처리하던 때라, 병무와 관련된 일이 있으면 무조건 본적지에 가야만 했다. 용건을 말했더니 면사무소 직원은 병적원부를 뒤적여 내 이름을 찾았다. 그런데 내 이름 뒤에 “행방불명”이란 붉은 글씨가 눈에 뜨였다. 이렇게 말짱하게 나타난 사람에게 행방불명이 뭐냐고 따졌더니, 그 순진한 면서기는 낯을 붉히며 주소지를 몰라 그렇게 분류했다며 멋쩍어 했다. 그런 인연으로 그 다음부터 웬만한 일일 경우 전화나 우편으로 병적업무를 편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전산화의 꿈도 꾸지 못했던 옛날 얘기다. 아무튼 내 병역문제는 이렇게 순탄하게 해결이 되었는데 아이들이 자라 군대에 가게 되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큰 놈이 대학 졸업하던 해, 둘째는 2학년을 마쳤고, 두 놈이 거의 같은 시기에 군에 갔다. 보름쯤 먼저 논산훈련소로 입대한 큰놈의 입영 때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고생이라곤 몰랐던 아이들을 군에 보내는 게 안쓰럽고 마음이 쓰여서인지, 아내는 논산까지 차를 태워 배웅하고 싶어했다. 다 자란 놈 군에 가는 데 주말도 아닌 평일에 무슨 배웅이냐고 기차 편으로 보냈지만, 아내는 이 일이 몹시 서운한 듯, 누구누구 애 친구들 이름까지 들먹이며 내 무정함을 비판했다. 입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고 간 옷이 우편으로 도착되자, 눈물이 글썽해진 아내는 애꿎은 나한테 다시 한번 비난을 퍼부었다. 군대에 가본 경험이 없어 입대한 아들이 얼마나 고생할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원망의 말까지 보태서 말이다.
훈련을 마치고 첫 면회 오라는 연락을 받던 날부터, 아내는 마치 북에 두고 온 아버지를 몇 십 년 만에 만나기나 하는 듯, 뭘 가지고 가야할까 고민하며 먹을 것 준비한다고 밤잠 설치며 설레었다. 혼자 다녀오라고 하면 이혼도 불사하겠다고 달려들 기세여서 며칠간 생각 끝에 회사에 휴가를 내고 논산훈련소까지 면회에 따라 나섰다. 며칠을 두고 먹어도 남을 만한 각종 음식과 음료, 가스버너에 식기까지 차에 떠 싣고 새벽에 출발하여 훈련소 연병장에 당도할 때까지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막상 새까맣게 그을은 그 놈 얼굴을 대하자 마음이 짠한 게,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 놈은 카투사로 배속되어 교육을 더 받은 뒤 수월하게 군 생활을 마쳤다.
그런데 의정부 예비사단으로 입대한 둘째 놈은 경우가 달랐다. 입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국방부에 근무한다는 친구의 남편을 통해 이 애가 특공대로 배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남들 다 하는 훈련이고 군 생활인데 우리 아이라고 못 견딜 까닭이 있냐고 큰 소리를 쳤지만, 나도 내심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군대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어찌 손써 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훈련을 마치고 면회를 다녀오기까지는 별탈 없이 시간이 흘렀다.
자대 배치를 받아 떠난 지 며칠 뒤 퇴근해 보니 아내가 거의 사색이 되어있었다. 둘째 놈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는데 전혀 그 애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겁 먹은 목소리였다는 거였다. 왜 전화를 했더냐는 내 물음에 그제서야 부대창설기념일 특별면회에 올 수 있냐는 확인 전화였다는 말을 했다. 마침 부대위치가 집에서 가까운 송추였고, 그 날이 휴일이어서, 아내와 함께 불과 두 주만에 다시 면회를 갔다. 그 애는 훈련 마칠 때와 전혀 딴판으로 바짝 긴장되어 있었고, 내가 묻는 말에 “네, 잘 있습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만 딱딱하게 연발하였다. 그런 투로 말하는 둘째 놈이 낯설고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듯 싶어 눈치 봐 가며 조용히 물어봤지만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아무 말도 못하도록 함구령이 내려진 듯 싶었다.
그 부대는 특수 임무 수행을 위해 창설된 사단본부 직할부대로, 한 소대가 소대장을 포함하여 7명으로 구성되었다 했다. 그러니 훈련이 고될 것이란 점은 불문가지였다. 난생 처음 내무반에도 들어가 보았다. 내무반 안에서마저 거의 부동 자세에 가까운 태도로 앉아있는 이 놈을 보며 나까지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소대장을 제외한, 선임하사, 병사들 전체 소대원이 한 내무반에서 생활하도록 되어 있다니 갓 들어온 새카만 졸병이 쫄아있는 건 당연하다고 눙쳐봤지만, 부모로서 마음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특공대라는 이름이 주는 선입견, 처음 대면하는 특수한 환경, 내무반의 분위기, 모든 게 이 애를 압박하고 있는 것 같아,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빼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소대장을 찾아가 잘 부탁한다고 인사까지 하고 돌아왔으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면회 마치고 부대를 떠나는 순간부터 아내의 걱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장 둘째 놈을 이 부대에서 빼내야 한다고 안달이었다. 무슨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이 애의 전속을 부탁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사회생활이 몇 년인데 군에 아는 사람 하나 없냐고 따지다가, 몇 다리를 건너더라도 부탁할 사람을 찾아 내라는 강압도 서슴지 않았다. 나도 표현은 안 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어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마침내 사단본부 인사참모를 소개 받았다. 그런 일에 익숙치 않아 주저되었지만, 아내의 계속되는 강요에 못 이겨 선물까지 준비하여 인사참모를 만났다. 그런데 그 반응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다른 부대로 차출은 불가능하니 아예 꿈도 꾸지 말고 전과 달라서 특공대라 하더라도 못 견딜 만큼 고생이 심하지도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평범한 답변이었다. 기회를 봐서 연대장에게 부탁은 한번 건네보겠다는 막연한 얘기에 기대를 거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뒤, 그 인사참모로부터 그 놈을 특공대 장교숙소 담당으로 차출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고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부대 특수성 때문에 무슨 일을 담당하든지 훈련에는 일체 예외가 없어, 훈련은 훈련대로, 맡은 일은 일 대로 하게 되는 바람에 오히려 더 힘이 든다는 얘기를 몇 달 지난 뒤, 그 놈에게서 들었다. 가만 놔두었더라면 훈련은 고되다 하더라도 훈련이 끝나면 편안히 지낼 수 있었는데, 다른 사병들 쉴 때에도 이 애는 할 일이 따로 있어서 쉬지도 못했다 한다. 내가 직접 군 생활을 경험했다면 벌이지 않았을 괜한 일이었다.
직접 겪은 군 경험이 없다 보니 애들 군에 보냈을 때 얘기까지 끄집어 내게 되고, 이렇게라도 군대얘기에 참여해야 그나마 대한민국 남자 축에 겨우 끼지 않을까 걱정하는 안타까운 꼴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면 고맙겠다. 늦둥이를 두지 않은 한, 군에 보낼 자식도 없는 이 나이에, 뭇 여성들의 호오를 불문하고, 이런 얘기를 꺼낸 까닭은, 실은 군대얘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런 부모의 노심초사 속에 자식들이 길러졌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우리 애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내놓고 핀잔까지 주지는 않겠지만, 부모의 이런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피곤하기만 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2004.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