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아침에
아무리 크게 외쳐보았자 넋두리 또는 푸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할 바에야 숫제 입 닫고 귀 막고 눈 돌리고 가슴앓이나 줄이는 게 낫겠다 싶어 그렇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도 소나기 맞은 중처럼 혼자서 구시렁거리지 않고는 못 배길 일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지금까지 겪은 휘둘림도 모자라 어쩌다 늙으막에 이런 세상을 만나게 된 건지 억울하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이런 내 마음을 그대로 대변한 글,그것도 두 사람의 글을 한꺼번에 신문에서 읽었다. 오늘 하루는 동지를 만난 기쁨을 위안 삼으며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겠다. 기다리던 비까지 촉촉히 내리고 있으니…
(“복고적 진보, 개방적 보수”라는 제목으로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가 기고한 글 전문 인용)
스스로를 영원한 진보주의자라고 확신했는데, 어느 날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수주의자’로 분류되게 되어 당혹스럽고 서글픈 사람이 결코 나만은 아닐 것이다. 젊었을 때는 우리나라가 민주화되기를 열망했고, 가급적 민주적 가치를 실천하고 전파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도 해 왔는데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자신이 ‘보수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을 발견하면 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를 들먹일 것도 없이 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니라 의식과 자세이지만, 그래도 자신을 늘 푸른 진보주의자로 자부해왔던 사람들은 마치 명예에 금이 간 것같이 마음이 아픈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를 보수로 매도하는 새로운 진보진영의 얼굴을 보면 그들과 같은 명칭을 공유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진보’라면 나는 ‘보수’일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체념하게 된다. 그런데 그 새로운 진보주의자들의 면모는 ‘진보’라는 개념을 몹시 혼란스럽게 만든다. 내가 여태까지 알기로는 ‘진보’는 열린 마음으로 여러 목소리,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고 공정하게 저울질할 전향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새로운 ‘진보’세력들은 지극히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다. 우리나라가 이 특이한 ‘진보’세력에 장악되었고, 그들은 그들이 구상한 ‘개혁’―또는 ‘혁명’―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 것이고, 그들을 설득하거나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 때문에 그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타락하고 부도덕한 ‘수구반동’이고, 그들의 의견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단정한다.
‘보수’세력을 서글프고 허탈하게 하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이 근세 한국사의 모든 불상사를 ‘보수세력’의 죄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방송사들은 전태일 열사, 장준하 선생, 박종철군 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연이어 방영하면서 ‘보수세력’이 모두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의 공범인 양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다. 사실을 본다면 우리 국민의 절대다수는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했고, 그런 죽음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사회가 오기를 간절히 열망했고, 그 열망이 6·10 항쟁으로 결집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등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원죄’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고, ‘진보주의자’들의 완강한 아집이 안타깝고 걱정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 ‘원죄’의 소멸을 위해서 ‘진보주의자’들의 세상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을 하게 된다.
한때 북한을 흠모했던 영국의 한국학 전공자 에이던 포스터카터 박사가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복고적이고 국수적’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좀더 솔직하고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를 하고 국가경쟁력·산업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젊었을 때 ‘주체사상에 입각한 사회발전론을 깊이 신봉’했으나 그것이 허구임을 차차 깨달았다는 포스터카터 박사처럼 한국의 진보주의자들도 환상에서 깨어나야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을 텐데, 그날이 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저질러지고 얼마나 막대한,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비용 지출이 있어야 할까?
비극은 문학에서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장엄미와 도덕적 고양감의 여운을 남기지만 현실에서는 오래오래 고통과 상실과 원망을 남긴다.
(“코드는 달라도 사전은 같아야”라는 제목으로 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가 기고한 글 전문 인용)
천도(遷都) 혹은 신행정수도 건설문제를 놓고 세상은 또다시 혼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은 국민투표 요구 수용은커녕 그 흔한 여론조사 한번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있다. 국민적 합의가 이미 그리고 충분히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후보의 대선 승리가 수도 이전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주장하는데, 그 정도는 ‘개그’로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관련 법률안이 지난 16대 국회에서 통과된 사실을 국민적 지지의 최종 증거로 간주한다면 앞의 개그조차 금방 썰렁해진다.
지금 와서 충청도 표심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야당의 선택을 왈가왈부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탄핵 정국과 총선 과정을 거치며 민의를 배반한 반민주적·반민족적 집단으로 매도되었던 ‘근조(謹弔) 제16대 국회’가 유독 수도 이전에 관해서는 국민의 의사를 그토록 잘 대변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언제부터 집권세력이 16대 국회를 그렇게 존중하고 예우했는지 놀라울 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여러 가지 ‘지독한 혼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기왕지사라고는 하지만 대통령 탄핵소추에 관련하여 자칭 ‘참여’ 정부가 선출직 국회의원의 판단보다 임명직 헌재(憲裁) 재판관의 의견을 훨씬 더 중시한 태도는 아직도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여차하면 헌재의 결정조차 반(反)민의로 몰아칠 태세 아니었던가. 또한 정치인의 당적 변경을 배신행위로 성토하던 입장을 바꿔 ‘노무현당’ 창당의 경우에는 ‘과거 불문’으로 때운 것도 혼란스럽다. 같은 지역주의라도 영남의 그것은 권위주의 전통을 계승한 망국적 현상이나 호남의 그것은 지역주의의 청산과 극복을 위한 민주화 열망이라는 대비도 도무지 헷갈린다.
한쪽의 ‘차떼기’를 비난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은 트렁크에라도 검은돈을 싣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고, 16대 국회에서 벌어졌던 ‘서청원 구하기’가 볼썽사나웠다면 17대 국회에서 ‘안희정 구하기’는 상상도 하지 않는 편이 옳았을 것이다. 왜곡·편파 보도라는 이유로 신문은 개혁 대상이 되어 있는 반면, 그것을 훨씬 더 능가하는 방송은 오히려 개혁 주체로 나선 현실도 어지럽고, 조·중·동이 신문시장이나 여론을 독점하는 것이 문제라면서 거대 방송사나 유력 인터넷 언론에 대해서는 침묵과 격려로 일관하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상식의 마비는 자의적 논리를, 사실의 왜곡은 설익은 결정을, 그리고 객관의 실종은 무모한 정책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개혁과 진보를 외쳐도 정작 나타나는 성과는 혼란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직무 복귀 이후 한때 상승세를 타는 듯했던 노 대통령 지지도가 탄핵정국 이전 상태로 하락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이념적 자아도취와 ‘올인’식 권력 지향, 그리고 개혁을 위한 개혁 의지가 내 입맛대로 현실을 추론하고 내 몸에 맞춰 세상을 재단하는 버릇을 체질화시킨 결과일 것이다.
이와 같은 ‘지독한 혼란’의 백미(白眉)는 입법·사법·행정부에 청와대까지 옮기는 일을 결코 천도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일이다.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 요즘 세태라고 하지만 대통령과 국민이 서로 ‘코드’는 달라도 최소한 국어사전은 같은 걸 써야 하지 않을까. 모든 사람을 당분간 바보로 만들 수 있다. 몇몇 사람을 평생 바보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모든 사람을 평생 바보로 만들 수는 없다. 노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 말이다.
(인용 끝)
이 시대의 ‘새로운 진보주의자’ 들의 눈엔 이런 글이 보일 리 없다. 뭔지 몰라 혹 첫 줄이라도 읽었다면 눈을 씻을 일이다. ‘좃선일보’는 역시 없어져야 할 신문이라고 밟고 지나가면 된다. 오늘은 아침부터 재수없는 날이니 운전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밖엔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2004.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