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풀이 땅콩에는 오징어도 함께 씹어 주어야 하고, 맥주도 한잔 있어야겠기에.....
어제 대학동창 신년 하례식에를 다녀 왔다.
우리가 64학번이니 당연히 입학한지가 40년이 지났다는 계산이고, 하례식이어서 모교의 교수들 면면을 소개하는 학과원로라는 교수가 올해 50세란다. 정년 퇴직을 한 교수의후임으로 새로 부임한 교수는 30대 초반의 우리 아들 또래로 보인다.
농담삼아 사회자가 던진 '옛날에는 꿈나무였던 우리들이 지금은 땔나무가 되었다'는 말에
어쩐지 우리에게는 앞으로의 밝은 태양보다 망각되어 가는 과거의 상실감이 짙게 느껴진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40년 전으로 세월을 돌릴 수만 있다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것 같은데 왜 그 많은 실수와 혼돈속에서 헤메이며 여기까지 와 있는지
그래서였을까 올 연말 모임에서 우리는 세상이 변해도 너무도 변했다고 한탄하면서 살어가기 힘들었던 옛시절의 이야기들을 무척이나 소중한 보물단지를 끌러 놓듯이 풀어 놓고는 했다.
석유 등잔불을 이야기 하면서 문풍지에 어리는 늦은 저녁상을 먹는 가족들의 그림자며, 겨울이 되면 머리맡에 둔 걸레가 꽁꽁 얼던 기억과 함께 언니와 함께 돈암교에 있는 동도 극장에서 처음본 '작은 아씨들'이란 영화에서 밖에는 눈이 한길씩 쌓였건만 집안에서는 반팔 드레스들을 입고 있던 그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부러웠던지.
그시절 추운 겨울에 방안에서 옷을 벗을 때는 이를 잡을때 뿐이었다.
어머니는 내복을 전부 벗게 하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와 서캐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하셨다.
목욕탕에는 섣달 그믐날에나 가는 연례 행사였으니 새벽에 식구들이 새 내복을 한벌씩 챙겨서 들고, 때는 어머니가 한번밀어 주고, 큰언니가 해 주고, 내가 밀고 세번씩 밀고 나면 온 몸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기진 맥진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시원했던지.
헌 내복은 추운 겨울밤에 밖에 내 놓고 하루밤 자고서 다음날 양잿물에 푹푹 삶어서 소독을 해서 이를 없애고는 했었지.
한번씩 들려서 동네 다리 근처 천변에서 펼치는 서커스의 추억은 얼마나 아련한가.
그당시 약장수들의 입담은 웃음이 배꼽에서 터져 나오게 해 주었었은데
그때도 과외는 있었지만 학교가 끝나면 지금은 아파트 숲이 되어 버린 돈암 국민학교 뒷산을 헤짚고 다니면서 봄이면 진달래와 아카시아를 꽃잎을 따먹고, 가을이면 들국화를 한 아름씩 꺽어 들고는 늦게 집에 가서 야단을 맞고는 했다.
장난감이 없던 시절 남자애들은 구슬치가와 딱지치기, 잣치기로 여자애들은 고무줄 놀이로 해 지는줄 몰랐고, 남자 아이들은 면도칼로 여자들 고무줄을 끊으며 다니다가 '아이스케키'를 외치며 여자애들 치마를 들추고는 도망을 가곤 했는데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어서 아무도 아무것도 보지를 못했건만 왜 그리도 챙피해서 울고 불고 난리를 쳤었는지.
그때는 나이롱 양말이 없어서 형제들 뚫어진 양말을 저녁마다 어머니는 기우셨다. 그때 겨울은 왜 그리도 추웠던지. 겨울에 하얗게 눈쌓인 운동장에서 조회를 설때면 발꼬락이 얼마나 시렵던지 그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하지만 그 추운 겨울과 함께 연상되는 화롯불 속의 따뜻한 온기는 얼마나 절실한 그리움인지.
교복도 입학할때 아주 큰것을 사도 일년에 10센티씩 자라던 시절이니까 2,3년 겨우 입고 우라까이를 해서 입으면 주머니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붙고는 했다.
겨울이면 손이 터서 약국에서 글리세린을 사다가 바르는집이 많었고, 코흘리개들은 싯누런코를 주체하기가 여간만 힘든게 아니었다.
얼굴에 버짐들도 피고 남자애들 빡빡 머리에느 하얗게 땜통들이 나 있고는 했다.
우리 고등학교 시절 멋을 내려는 남학생들 방학이 끝나고 제법 폼나게 머리를 기르고 왔는데, 강당에서 조회가 끝나고는 조태을 선생님 손에든 바리깡으로 여지없이 머리 앞쪽에서 뒷쪽까지 고속도로를 내 주셨고, 챙피한 남학생들 머리를 감싸쥐고는 여학생 복도를 통과할때 번개보다 빠르게들 도망쳐 달려가기도 했었다.
지금은 다이어트 열풍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지만 그 당시 항아리속의 곡식이 바닥 가까이 줄어들면 어머니는 하나 둘 헤이리며 되질을 하셔야 했고, 돼지고기 한점은 얼마나 맛있었던가.
어머니는 털이 숭숭난 돼지 껍질만 드셔서 난 어른들은 껍질을 맛있어 하는줄 알었는데.....
중학교때 단체 관람 영화를 볼때 안타까운 장면에서는 발을 구르며,우리편이 시련을 당할때는 우우우 야유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
일년에 한번씩 기생충 때문에 대변 검사를 한후 산토닝이란 회충약을 먹은 다음날 변소를 가기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조개탄을 피운 난로위에 알루미늄 벤또들을 겹쳐 놓으면 반찬통에 넣은 김치가 익어서 교실에서는 김치찌개 냄새가 나고는 했었다.
이 수복 선생님의 엄격한 단발 기준이 귀밑까지만 허용이 되었고, 스커트 길이도 무릎바로 아래 였었고, 몸뻬 바지의 교복 흰 칼라크기도 얼마나 심하게 닥달을 하셨던지.
부고 여학생들의 인물이 이화 여고 여학생들에 비해서 못하다는 평을 들었던건 다 이런 이유에서 였지 않었을까?
작년에 캐나다에서 다니러온 신 강룡이가 노래방에서 개선을 합창을 불러 보자고 제의를 해서 모두들 반대를 했지만 혼신을 다해서 지휘봉을 휘두르시던 음악 선생님 지도아래 서울 운동장에서 남여 혼성 4부합창을 하던 기억이 떠 올랐다.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80세를 육박하고 있다는데, 20년후 그때 우리가 지금을 떠 올리면서 아쉬워 하지 않었으면 좋겠다.
특히 올해는 우리 졸업 40주년에 임해서 회장단의 열정적인 포부도 있고 보니 2004년은 심심풀이 오징어를 씹듯이 두고 두고 기억되는 즐거운 추억의 한 chapter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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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생생한 기억의 단편들을 아주 맛있게 써주었군요.종종 더 많은 오징어을 씹을수있게 해주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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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수입 오징어 투성인데 신토불이의'40년전 김풍자표 오징어'를 시식하니 새삼 가슴이 뭉클하다. 아직 재고 많지? 두고두고 맛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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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맥주는 누구 몫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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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아이들에게 이런얘기를 들려주면 웃긴다고 하지만 생생한 우리의 얫이야기고보니 40여년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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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님 모두앍었고 남자는 73세이래요. 남자 친구들과 남편님을 위하여 40주년을 맞이하여 심심풀이 땅콩의 아릅다운 글 보여줘....광우병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