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동창회 싸이트에 들렸다가 아래 한 병근 동문의 "눈물"이란 제목의 글 가운데 나오는 결혼식 이야기 때문에 한참을 울었다. 이야기가 슬픈 것보다 그 글의 신부엄마 처지 같은 나의 언니가 보고 싶어서다. 내 설움을 쏟아놓기 위해 뭔가 쓰고 싶어져 이 글을 쓴다.
나에겐 어려서, 싸우면 언제나 내가 이기던 두살 위 언니가 하나 있었다.
목련꽃처럼 희고 말도없이 착하기만한 언니가 바람부는 봄날 목련꽃이 뚝 떨어지 듯 그렇게 가 버렸다. 내방문 앞엔 큰 흰목련꽃 몇그루 서 있다. 언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화사하게 꽃이 피더니 매일 언니 생각을 하며 창밖을 멍하니 내다 보던 중 그렇게 떨어져 가 버린 것이다.
오랜 연애 한 아들 결혼식 날짜를 잡아 놓고 준비로 신이 나 있던 언니가 합창단과 함께 중국여행 3주 다녀 오더니 소화가 안된다고 동네 병원에서 준 소화제로 며칠동안 버티다 큰 병원엘 가서 여러가지 검사를 하더니 간암말기란다. 평생 술도 담배도 못 해 본 언니가 간암이었다. 희망이 없으니 집에서 편히 있다 가게하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입원해서 담당의사에게 아들이 곧 결혼하니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면서, 결혼 후 곧 시 집안에 나쁜 일 있으면 며느리 욕 먹을 일까지 걱정하였다. 약먹고 방사선치료도 받고 애를 썼다. 검사하고 겨우 3개월 만에 , 버티고 버티더니 결혼식을 코 앞에 두고 맥없이 세상을 떠났다.
오, 하나님, 꼭 그렇게 서둘러 데려가야만 했나요?
아랫 글 주례자가 어머니 자리를 비워두라고 한 것은 참 잘한 생각이었다.
한 달 연기했던 결혼식날 엄마자리에 이모가 앉아달라고 조르는 조카에게는
미안했지만, 도저히 언니자리에 앉아 결혼식을 마칠 수없을 것 같아 못 앉았다.
우리도 꽃다발을 빈 자리에 놓았더면 좋았을 것을 왜 우린 그런 생각이 안 났을가.
결혼식은 큰 교회에서 화려하고, 잘 어울리는 신랑신부는 너무도 보기 좋았다.
난 앞 둘째 줄에 앉아 , 사랑하는 아들 늦지도 않았건만, 드디어 장가 간다고 그렇게 좋아하던 언니 생각만 했다. 바보같이 어떻게 자기가 그렇게 아픈지도 모르다니!
기쁜 날인데, 울음을 참아 가슴으로 눈물을 삼키니 가슴이 터질 듯 아팠다. 입을 열면 통곡할 것 같아 찬송가를 부를 수가 없었다. 겨우 식이 끝나, 사람없는 곳에서 울려고 윗층 교회 본당으로 뛰어 올라가니 내 동생은 이미 올라 와 엎드려 울고있었다. 같이 울면서도 서로에게 다짐하듯 피로연엘 가야만 한다고. 화장을 고치고 한 테이블에 가서 앉으려는데, 신부 아버지가 다가와 낮은 소리로 "어려운 자리 잘 참아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하였다.
우린 아랫글에서처럼 신부네가 아니라서 소리내 울지도 못했다. 신부엄마가 죽은 경우엔 시집가는 신부가 불쌍해 동정해서 같이 울수도 있지만, 며느리 맞는 시어머니가 죽으면 행여 신부의 탓이랄가봐 신부쪽이 모두 긴장하고 시집 친척들은 새 며누리가 복이 없을가 걱정한다. 그게 한국적인 정서이다. 그러나 그게 어찌 새 신부 탓일 수가 있겠는가.
신랑신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이바지 음식 가지고 시집에 온다고 이모가 와서 받아 달래서 할 수없이 언니넬 갔었는데 또 한번 참을성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 때 누가 있었고 무슨 음식들을가져왔었는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질 않다. 이를 악물고 울지않고 내 역활을 다 하려고 애를 쓴 기억밖에는 .
지난 추석 그 조카가 언니를 꼭 닮은 아기를 안고 우리 집에 왔지만 아직도 언니 집엔 가기가 싫다.
지난3년새에 내 인생에 소중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 세 사람이 내 곁을 떠났다. 며칠 전 가까이 지나던 한참 후배교수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던 대 기업의 젊은 회장도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다. 모두가 평소 잠 자 듯 눈을 감고는, 다시는 뜨지않는다.
'너무도 가벼운 삶의 무게' '너무도 가벼운 죽음의 무게'가 나에게 남은 인생 잘 살라며 안겨 주는 '너무나 무거운 단절의 무게'가 나를 정신 못 차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