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신라 시대 승려 혜통(惠通)의 출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동네어귀 시냇가에서 수달을 한 마리 잡아죽이고는 뼈를 동산에 버렸는데 이튿날 아침에 그 뼈가 없어졌다. 그래서 핏자국을 따라갔더니 그 뼈는 옛날에 살던 굴속으로 들어가 다섯 마리의 세끼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만 1세와 3세된 고아형제가 한국과 미국으로 따로 입양을 가게 되었다. 형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찾아 보호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본능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수소문 끝에 기회가 되어 동생을 찾았으나 늦게 돌아와 동생이 부량아가 되었다며 통곡하고 울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보도된 바 있다.
생명이 무엇이기에 죽은 동물과 어린 아이에게도 이렇게 질긴 인연을 맺어 놓았을까!
기독교에서는 우주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우리 생명을 점지하셨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태평양보다 넓은 바다에 사는 애꾸눈 거북이가 몇 백년에 한번씩 수면위로 부상하는데 떠다니는 조그만 널판지에 있는 한 뼘정도의 구멍에 우연히 머리를 내밀 수 있는 영겁의 인연으로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니 하나의 생명출현도 예사 일은 아니다.
현대 제놈시대에서도 그 사실이 증명되었다. 인간은 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 유전자가 약 3만개정도 내장되어 있으며 31억개 가량의 염기쌍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는 99.95%가 염기서열이 같으며 침팬지도 99%는 인간과 같다고 한다.
같은 부모님한테서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이 70조분의 1이라고 하니 우주역사 137억년 동안에 나와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으며 종말 때까지도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유일무이한 생명에는 조물주의 고귀한 뜻이 숨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자연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오늘의 우리의 모습이 되었는가?
삶은 나의 자유의지로 가꾸지만 우리의 생명과 재능은 결코 나만의 것은 아니다.
병원에는 살려고 몸부림치는 환자도 많은데 한편으로는 생명을 스스로 거두려는 사람도 자주 매스컴에 보도되고 있다.
호스피스 보고에 의하면 임종을 맞이한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남에게 충분히 베풀지 못하고 진심으로 화해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을 가장 많이 후회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2001년도에 평균수명이 여자는 80세, 남자는 73세로 보도된 바 있다. 사인으로는 암과 순환기계 질환 다음으로 자살과 사고가 늘어나고 있다.
자살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이웃과의 부조화로 야기되는 사회적인 타살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죽을 만한 용기가 있다면 산다는 것은 보다 쉽다고 생각된다.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거나 성전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을 무작위로 죽여도 되는 것인지 심지어는 하느님께서 맡긴 자녀를 자기의 뜻대로 처치하거나 울분의 발산으로 지하철이나 아파트에서 방화로 이웃에까지 피해를 주는 야만적 행위를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야수보다 못한 인간도 있다.
섣부른 죽음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다른 고통의 시작이다.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서도 거룩하게 살 필요가 있다. 세상에는 죽어서도 계속 인간 세상에 남아 우리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 있어도 죽은 모습으로 지내는 사람도 자주 본다.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중 하나인 피에르 신부는 엠마우스라는 빈민구호단체를 만들어 집 없는 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어느날 출생이후 무엇하나 제대로된 적이 없는 젊은이가 죽음을 결심하고 찾아왔다가 남을 위한 신부님의 헌신적인 노동과 참인간의 모습을 보고는 죽음을 거두고 온몸으로 봉사하면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지금은 가장 가까운 동반자가 되어 활동하고 있다.
소유의 삶은 짧고 고달프지만 사랑하고 나누며 베푸는 존재의 삶은 길고 충만하다.
톨스토이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인간은 나만의 노력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간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거룩한 생명은 사랑을 먹고산다. 사랑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하늘의 선물이다.
* 9월 29일 경상일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