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 막고굴
莫高窟은 관광수입으로 둔황시 재정의 가장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며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
되어 유네스코에 의하여 그 보존을 지원 받고 있는 유적이다. 만일 100년 전쯤부터 이런 보존 활동이
있어 막고굴의 자연적 소멸과 인위적 파괴, 외세의 약탈 등이 없었다면 그 위상은 현재 보다도 엄청
날 것이고 반면 현재의 대영박물관을 비롯해 10여 개국 이상의 박물관과 연구소는 그만큼 초라해
졌을 것이다.
막고굴은 둔황 시내에서 동남 방향 25Km 지점에 있으며 수 많은 석굴 들은 명사산 동쪽 끝 절벽에
생긴 바위 틈 사이에 만들어 졌다. 기원전 4세기부터 북위, 서위, 북주, 수, 당, 오대, 송, 원 등을
거치며 천 여년 동안 1,000 여개의 석굴이 축조 되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석굴은 唐대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으로 492개, 벽화는 4만 5천 평방미터, 조각상이 2천 여점 및 수 만점의 문헌이 있다.
우리도 국력이 쇠잔 할 때 무수한 국보를 잃었듯이 20세기 초 중국은 세계 열강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그리고 미국 등 악의 축에 의하여 처참하게 겁탈 당한 역사가 있다.
인도 총독의 후원을 받던 오렐 스타인이란 고고학자 이며 탐험가 (중국인에게는 악마) 는 막고굴에서
만 7,000여권의 고서적과 6,000여점의 단편 예술품을 24개의 상자에 넣어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다.
영국 악마 보다 한발 뒤진 프랑스 악마 펠리오란 자는 스타인이 엄두도 못 낸 2만 여점의 고사본의
목록까지 작성하며 선별하여 수천 점의 고문서들을 프랑스로 보냈다. (기억이 확실한지 모르겠으나 17번 석굴에서 발견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도 프랑스 행이 되었다던가?)
막고굴은 외세에 의하여 처참하게 유린당한 역사가 있음에도 세계 최대 규모에 내용이 가장 풍부한
예술 박물관이며 이곳에 있는 작품 한점 한점이 당시 화공, 조각공의 피와 땀이 어린 결정체 이리라.
보존을 위하여 492개의 석굴 문 하나 하나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으며 관광객에게는 순번에 의하여
매일 10개 이내의 석굴 만 개방하고 있다.
석굴의 벽화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 색채가 짙고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느끼며 표현된
형식을 보고 옛 선인 들의 생활, 풍속, 습관 등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고대의 사회, 정치, 경제, 군사,
종교, 문화 등을 연구 함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 본다.
우리 일행 명색이 유네스코 서울협회라 하여 둔황시장 보다 서열이 높고 성장급이라는 막고굴 관장이
일행을 접견실로 안내하여 정중한 인사말을 하였고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한족 가이드는 열쇠 뭉치를
몇 개 더 받아와 특별히 좋은 곳 만 골라 보여 주겠단다. 일행이 둘러본 석굴 번호는 다음과 같다 :
16, 17, 96, 260, 328, 335, 336, 337, 427, 428
이중 96번 석굴로 기억하는데 높이가 35 M인 어마어마한 대불이 있더라. 건물 한 층의 높이가 3M
정도이니 불상 하나가 12층짜리 빌딩으로 그 위용을 상상해보라. 또한 당나라 전성기 때 세워졌다는
26M 높이의 미륵불도 있었다.
어느 굴에선가는 신라 시대의 화랑 인 듯 머리에 깃털을 꽂은 사람들의 벽화가 있었고 문화재 연구원
이라는 가이드는 레이저 포인터로 이들을 가리키며 신라인이라 소개하였다. 막고굴에는 카메라
촬영이 금지 되어 인터넷 사진으로 대체한다.
막고굴을 깊이 있게 알고자 하는 자들은 인터넷 (http://idp.bl.uk)으로 2만6천여 권의 필사본과 5천
여점의 그림을 무료로 열람해 보시라.
대충 이런 정도로 막고굴을 경험하고 전용 버스 편으로 기차역이 있는 유원으로 이동하였다. 유원은
신강성에 속해 있으나 유원에서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돈황 (감숙성) 에서 하밀이나 우루
무치로 가는 관광객 이어서 최근 감숙성 당국이 신강성과 협상하여 역의 공식 명칭을 돈황역으로
개명했단다. 이런 협상기술은 우리 정치 협잡꾼들 보다 훨씬 선진적이다.
돈황역에서 약 4시간 걸려 하밀에 도착했다. 4인 1실로 된 침대 칸을 이용 했는데 외국인 전용이라
그런지 무척 깨끗하였다. 요금은 인당 13,000원 정도. 승무원 들도 꾀나 친절하다. 여 승무원들은
어깨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한문에 자신이 있다는 일행의 해석인 즉, “어른에게 술을 따르는 자세로
손님을 대하라” 는 것 이란다. 이미 중국은 자본주의 뿌리가 확실히 내린 것 같아 반가움을 느낀다.
한편 언젠가는 정일이 형님이 있는 북조선도 하는 꿈을 꾸어본다.
야간 열차라 경치는 보이지도 않지만 보인다 한들 사방이 눈 닿을 때 없는 고비의 연속이다. 설명에
의하면 고비라는 것은 사막에 연접한 황무지를 뜻하는 것이고 사막은 모래로 형성되어 형태가 수시로
변동하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실크로드를 달리다 보면 고비와 사막의 모습이 미국 로스앤젤스에서
라스베가스 가는 길과 흡사 함을 느낀다.
기차의 진동이 새마을 보다 더 부드럽다. 9개의 방에 배정된 일행은 대부분 문을 열어 놓고 특별한
용무도 없으면서 복도를 서성인다. 실크로드를 기차로 달리며 보이는 것도, 안보이는 것도 없는 차창
밖을 보며 잠든다는 것은 죄악이라는 자각 때문 이리라. 4시간 여행에 침대 칸 보다 일반석이 더 나을
걸 하는 아쉬움은 나 뿐이 아니었다. 결국 기차에서는 한숨도 못자고 자정이 넘어 호텔에 들었다.
동행한 여행사 사장은 내일부터 더욱 강행군이라 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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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