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초 북경에서 있었던 세미나 참석 길에 하루를 온전히 내어 자금성과 천단 지역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매서운 추위와 매캐한 공기, 관광에는 아주 적절치 못한 날씨였음에도 출장 길에 하루가 어디인가? 누구나 장대한 天安門 앞에 서면 문의 규모와 그 속에 있을 궁전의 규모에 지레 짐작으로 압도 당하게 된다. 모택동 사진이 걸린 천편 일률적인 정면 사진이 싫어 옆 모습을 찍기 위해 족히 10분은 걸어야 했던 것 같다. 해자가 얼어 붙어 있어 해자에 비친 천안문의 그림자를 함께 찍지 못 한 것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있다. 중국 사람들이 건물의 이름이나 상표를 붙이고 외국어로 번역해 놓는 안목은 탁월하다. Coca Cola (可口可樂), Minolta (萬能達) 와 같은 의성어는 말 할 필요도 없고 紫金城(Forbidden City)과 天安門(Gate of Heavenly Peace)을 보아도 무릎을 치게 한다.
천안문을 지나, 瑞門을 지나고 午門에 와야 자금성이 시작된다. 오문 매표소 앞 노점에서 털모자를 하나 사 쓰고 오문을 지나 비로서 태화문을 들어 선다. 위엄이 넘쳐 흐르는 한 쌍의 사자상이 받치고 있는 태화문 부터 자금성의 外朝이다. 지금은 보수 중인 우리 경복궁의 근정문에 해당할 것이다.
태화문을 나서면 저 멀리 월대위에 태화전이 올라 앉아 있다. 태화문 안 쪽에 서면 순간적으로 품계석이 늘어선 우리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 앞 마당을 연계 시키려 하다가 부질 없음을 느끼게 된다. 태화전 마당에 내려서면 높은 월대에 가려 태화전의 지붕 끝만 보인다. 2만 여평에 달한다는 이 벽돌 마당을 지붕 끝만 보면 걸어야 했던 옛날 외국 사신들의 기분은 어떠 했을까? 그저 나에게는 감흥도 없어지고 멀기만 하다.
황제의 정무와 예식 공간인 外朝는 泰和殿과 中和殿, 保和殿으로 이루어 져 있고 세 건물이 3단으로 된 화강석 月臺위에 일직선상으로 놓여 있다. 문무 백관을 朝會를 통하여 호령하고 외국 사신을 맞아 위엄을 떨치려고 의도 했던 태화전의 이름이 泰和 즉 Supreme Harmony 이고 외조 건믈 모두 和 자 돌림으로 Harmony를 강조한다. 중국인 답다.
외조가 끝나면 황제의 생활 공간인 內廷 後 三宮이 시작되는데 淸朝에 와서는 내정도 정무 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내정은 乾淸殿, 交泰殿, 坤寧殿으로 이루어 지며 하늘과 땅 그리고 그 둘이 교합하여 조화를 이룬다 하여 명명 되었다. 우리 궁전의 교태전이 주로 중궁전을 의미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乾淸門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사자상은 재미 있다. 외정 초입의 위엄있는 태화문 사자와 달리 귀는 내려오고 눈은 아래로 깔려있다. 모름지기 내정의 여인들은 정치를 듣지도 보지도 말라는 뜻이라는데 淸朝 말기 西太后로 알려진 慈禧太后 같은 막강한 권력의 woman power가 나올 줄이야. "無爲" 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交泰殿 대들보 외부에는 다른 건물과는 달리 봉황이 황제를 상징하는 용 위에 그려져 있다. 중국 女權 伸長의 대표주자 西太后의 짓이다
外朝와는 달리 內廷의 현판들은 모두 한자와 만주족 문자가 함께 써있다. 明이 망하고 청조가 들어선 이후 모든 현판은 한자와 만주족 문자를 병기하여 바뀌었다는데 淸朝가 망하고 漢族인 원세개의 80일 집권 동안 外朝의 궁들은 모두 漢字 only로 바꾸어 달았지만 아녀자들의 내정의 현판은 미처 바꾸지 못하였다 한다. 만주족의 문자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무식을 떨었다. 門字의 오른쪽 획이 淸자의 月자 획 같이 삐쳐 올라가질 못했다. 황제인 龍이 다니다가 걸려 넘어질 염려 때문이란다. 농담이 아니다. 자금성 내정의 모든 문의 門자가 다 그러하다.
아래 사진은 건청전의 내부이다. 황제들의 집무실이 점차 외조에서 내정으로 들어 가게 되는데 이 건청전이 주로 정사를 보는 건물로 사용되다가 청대 말기 서태후의 섭정 시절에는 아예 대비의 거소인 西 六宮으로 숨어 버리고 만다. 항시 독살의 위험속에 살아야 했던 황제들은 급작 스러운 죽음을 대비하여 뒤 쪽 정대 광명의 현판 뒤에 후계 왕자의 이름을 숨겨 놓았다 한다.
곤령궁은 원래 황후의 처소였으나 1644년 이자성의 난 때 황비가 이 곳에서 자결한 이후 왕과 왕비의 처소가 西宮으로 옮겨진다. 황제의 혼례에 주로 쓰여진 궁이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와서 보고 쓰다듬고 하는 인기 있는 궁이다. 서궁의 사진들을 올리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생활 공간인 西 六宮의 침전등은 자금성의 규모에 걸 맞지 않게 작고 아담하다.
그 넓은 자금성안에 나무와 숲과 동산이 없다. 건물 기둥에 쓰인 엄청난 크기의 목재와 대리석은 남쪽 오지 운남성에서, 궁전 내부 바닥에 깐 金絲가 섞인 널적한 전돌은 양자강 남쪽 절강성에서, 7만여평의 바닥에 3자 깊이로 깔았다는 바닥 전돌은 중국 전역에서 굽고 날랐다는데 무모하다 싶은 대 역사를 해 치운 그 스케일에는 입이 벌어 지도록 압도를 당하면서도 살벌하고 메마르다라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자금성 북쪽끝 神武門 옆에 御花園이라는 조그만 정원을 만들어 놓긴 했다. 온통 기괴하게 굽어진 나무들이나 白松, 인공 동산으로 어우러진 기교 덩어리인 이곳을 어찌 정원 이라 하겠나?
중국을 여행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담의 높이이다. 대체로 담장은 높고 폐쇄적이다. 담을 쌓아 밖을 막아 놓으면 안에서도 갇히게 된다. 우리 전통 가옥의 담장이 외부로 부터의 보호가 아니라 구역을 나누고 가르는 역활에 목적이 있는 것과 확연히 대비 된다. 담장의 높이가 주는 위압감은 자금성에서 절정이다. 10m가 넘는 담장들이 외벽, 내벽, 구역 마다 악귀를 막아 준다는 붉은 색을 하고 겹겹히 놓여 길을 만든다. 영화 Last Empero에서 마지막 황제 뿌이가 서육궁에 갇혀 지낼 때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길이 이런 길이 아닌가 싶다.
돈 벌이라면 가리지 않는 중국인들은 하나 남은 청조 마지막 황제 뿌이의 친 조카를 자금성에 출근시켜 외국 관광객들의 이름으로 시를 지어 글씨를 써 주게해서 돈을 번다. 이렇게 번 돈은 당국의 수입이며 자금성 수리비로 보태진다 하기에 나도 거금을 들여 한장 써 받았다. 60세의 당뇨병 환자인 이 노인은 좋은 字句만 넣어서 글을 써 주었다. 公認 예술가 인증서 사본과 뿌이의 친 조카임을 설명하는 책자와 함께. 이 분이 써 준 글은 다음과 같다. 韓君快麗 培多情 東流大河 水長淸 建功立業 千年禧 福壽康寧 再更興 이름애서 한자씩 따서 지은 이 七言絶句에는 좋은 글자가 모두 들어 있다. 글을 써서 주면서 좋은 이름이라고 싱긋이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