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화와 같은(ㅎㅎㅎ) 한 사람 독자(나는 이런 열성 독자를 가지고 있는 몸이다)의 독촉에 못 이겨 햇 땅콩 나올 때까지 막간을 이용하여 우리집 마씨가 옛날 옛적에 쓴 글 두 편을 방영한다. 우리집 마씨가 평생 쓴 글은 이 두편 뿐이다. 졸라도 더 내 보낼 게 없다. 그것도 내가 스크랩해 두었기에 살아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나는 참 괜찮은 남편이다.
오디오 유감
십년이 넘게 우리집에 있는 덩치 큰 살림살이 가운데 꼭 한가지, 내가 값을 모르는 것이 있다. 다른 어느 살림살이보다 값이 나가리라 짐작은 했지만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고 살아왔다. 이 살림살이 아닌 살림살이가 전축이다.
결혼해서 얼마동안은 이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직접 물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유도 심문도 해봤지만 그 때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부부가 일심동체라는 것은 말 뿐, 무슨 비밀이 없어 거실에 버티고 있는 큰 살림의 값도 얘기를 못해주나 싶어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이미 알기를 포기한지 오래 되었다. 한 겨울 추위 속에서 집 밖으로 한바퀴 돌아가며 갈아야 하는 연탄아궁이를 보일러로 바꾸는 일은 고사하고 온수보일러라도 놓자는 내 간청을 외면한 채, 멀쩡하게 소리만 잘 내는 그 덩치를 자꾸 바꾸어 대는 것이 양심에 찔려 차마 값을 얘기 못하는 게 아닌가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문득문득 야속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퇴근할 때 몇장의 레코드 판을 들고 들어오는 날은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것은 남편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루종일 세 개구장이에게 시달려 녹초가 된 몸으로도 도저히 잠들 수 없을 만큼 큰 소음(정말 이럴 땐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랄 수 밖에 없다)을 몇 시간이든 견디어야만 한다. 일흔이 훨씬 넘으신 어머님도 이 집 떠나갈 것 같은 소음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시다.
어쩌다가 그 많은 레코드 판 가운데 한 장이라도 위치가 바뀌면 귀신처럼 알아낸다. 그 때마다 개구장이 꼬마들 감독불량을 추궁 당해야만 한다. 이런 엄중한 문책은 애들이 앰프의 손잡이를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지나치는 적이 없다. 식구들의 생일 한번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의 기억력을 생각하면 신기하기조차 하다. 지금은 다 자랐지만 우리집 막내가 더듬거리며 말을 배울 무렵 퇴근하는 아빠에게 “아빠, 오늘은 나 아무 것도 안 만졌어.”하고 첫 마디 인사를 할 정도면 짐작하고 남을 일이다. 이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남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오디온지 전축인지 이것 때문에 있었던 불쾌한 일은 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한밤중에 문을 두드려 대는 앞집 남자, 술 때문에 툭하면 외박을 해 속 태우는 친구의 남편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나는 그나마 스스로 위안으로 삼는다. 음악 대신 음악을 좋아하는 만큼 남편이 술을 좋아했다면 내가 어떻게 매킨토쉬라는 괴상한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주식인지 무엇인지를 해서 남았다는 그 돈이 그나마 그 괴물 같은 스피커 대신 다른 살림살이로 남아 있을까? 레코드 판 가지고 노는 꼬마들 단속 불량 때문에 다투지 않았다면 다른 가슴 맺힌 언쟁이 없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짜증스러운 때도 많았지만 그렇게 사는 동안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도 좋아하게 되었고 브람스의 교향곡도 알게 되었다. 같이 나다니는 것이 좋아 따라다닌 음악회였지만 이무지치의 실내악 연주를 들으며 소름 끼치는 희열도 맛보게 되었고 이젠 혹 비엔나 교향악단의 연주회에 못 갈까 봐 조바심이 생기기도 한다. 무심코 FM 방송을 켜고 흘러나오는 비발디가 반가울 때도 있다. 남편이 좋아하는 실내악도 오페라도 알고 싶다. 그렇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하고 버릇처럼 말하는 남편의 오디오 교환취미는 이제 정말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집에 있는 이 기계들의 정확한 값도 알고 싶다.
( 1981.9. 30.)
(이 글은 한국오디오애호가회 회보 1981 가을호에 게재된 아내 이영옥의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