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성은이 1월 6일 친정 어머니 장례를 마치고 나서 보내온 편지 입니다.
본인의 허락도 없이 올려 보았습니다
추운날 와줘서 고맙다. 빈소차리기전에 영안실에 멍하니 앉아 있을때
꼭 너한테 이멜을 보내고 싶었어.
다행히 가까운 곳이라 늦게 출발했더니 햇볕이 따뜻했고 바람이
없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어. 집례하는 목사님과 성가대들, 운구하는 분들께
미안했어.
네말대로 엄마를 찬 땅에 두고오려니까 가슴이 미어지더라.
오는 차안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그때까지는 잘 안울었는데
그게 정말 가슴아프더라. 더구나 우리엄마가 늘 날씨좋을 때 가얄텐데
하고 바래셨는데말야. 맘대로 안되었어.
엄마가 느낄 수없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그래도 아버지랑 합장이라서 나란히 묻히셨으니 좀 나을런지.
집에와서 뜨거운 샤워를 하려니 엄마를 그 찬데 두고 온 것 때문에
가슴이 떨려서 혼났어.
나도 늘엄마한테 가면 좀 더 있다 가라고 하셨지.
이젠 우리들이 갈 때를 위해 잘 준비해가야겠지.
우리 엄마처럼 자다가 가고 싶다고 기도하시더니 정말 그렇게 가셨어.
혼자 많이 속으로 참으면서 최후의 날을 기다리신걸가.
------- 편지 원본 -------
> 제목 : 어머니에 대한 단상들
> 받은 날짜 : 2003/01/06 오전 11:04
> 보낸 사람 : 풍자 김 <poongjalee@yahoo.co.kr>
> 받는 사람 : "김성은" <sekim@stu.ac.kr>
>
아침에 베란다 문을 열고 맨발다닥으로 타일을 짚어
보았더니 아주 차가운 기운이 옮겨져.
어제 T.V.에서도 몹씨 추울거라고는 했지만 창으로 드는
햇살이 부드러워서 혹시나 오늘 아침은 풀렸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거든.
영결식 예식이야 한시간 남짓하고, 양지 바른곳들이라서
따뜻하게 (특히 발이 시려) 입고 가면 전연 문제 될 것이
없다만 어머니가 차가운 곳에 누우시게 되는게 영 마음에
걸릴것 같어서 말야.
사촌 형님 장지에 간날은 푸근했고, 흙도 부드러운데다가
양지 바른곳이어서 따뜻하고, 아늑한 대지로 돌아 가는
느낌에 한결 가벼웠거든.
토요일날 병원을 가면서 난 친정 어머니가 돌아 가시던날,
그리고 자궁암으로 고생하시던 모습이 선연히 기억이
되어서 가슴이 자꾸만 시려왔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라기 보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시간이 흘러도 아니 내가 나이들수록 절절하게 기억되고는
해.
그리고 함께 연상되는 생각들은 우리딸 아이는 내가 간후
어떤 연상을 할까?
우리 어머니 5형제 혼자 힘으로 키우시면서 자식들
사랑으로 키우는게 무언지 조차 생각할 겨를없이
허덕이면서 사신 세월이셨어.
나이가 들면서 세월에 대한 이해를 가지면서 어머니 일찍
가신게 가끔씩, 어떤 때는 자주 아쉽고 죄송하게
느껴졌어.
내 나이 41세때 가셨으니 나 한창 바쁘고, 힘들고,
허덕이면서 인생고개를 넘던 시절이어서 라고 혼자 변명을
해 보기도 하지만 언젠가 어머니집을 갔더니 우리 어머니
집앞 어린이 놀이터에서 멀거니 앉아 계시다가 나를
발견하시고는 함빡 웃으셨어.
난 그날 사 가지고 온 빵봉지를 풀어 놓고는 작은애가
학교서 올 시간인데 내가 그날 꼭 있어야 할 일이 있다며
일어날때 우리 어머니가 혼자 중얼거리시는 소리를 신발을
신으며 들었지.
'뭐가 그리 바쁘다고 오자 마자 간다고들 하는지.....'
요즈음 그 말을 하신 어머니 심정 이해가 간단다.
내가 기운없고, 외출도 힘들때, 딸아이와 함께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겠지.
그애들 바뻐서 그런 마음 이해할 수가 없을테고.
너희 어머니 정말 곱게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한
평생 사신분이시고 또 원하시는 하늘 나라로 가셨을거란
확신은 나도 들어.
그리고 너 편하게 방학중에 가셨구나.
성은이 어머니가 돌아 가시기 사흘전에 써 보낸 편지도 함께 실어 봅니다.
나도 요새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려고 작정(?)을 하셨는데도
마음대로 안되신다고 하셔서 우울해. 93세라도 지금껏 소변 대변 화장실에
혼자 가셔서 잘 보셨는데 이젠 자기도 모르게 나온다는구나.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시나봐. 음식을 안 잡수시려는거야.
아들 며느리는 안타까워서 억지로 잡수시게 만드니 조금잡수시긴하지만
또 쌀 일이 걱정이고. 기저귀차기는 정말 싫다셔.우린 누가 저
아들며느리처럼
보살펴주겠나 우리엄마는 복이 많은 노인이지.
몸이 애기처럼 작아지셔서 바라보기가 너무 슬퍼.
우리아버지가 천당에서 말빨이 안서서 당신을 빨리 못데려가시나보다고
농담도 잘하셔. "영감, 하나님한테 잘 말해서 나 좀 빨리 데려 가 주소"
우리가 "아버지가 거기서 딴 살림 차렸나"하면 그럴리가 없다는군.
자고 나 눈뜨면 안 죽고 또 살았구나
하고 슬퍼죽겠다니 어쩌냐. 죽을 때까지 다리가 튼튼해야
열심히 돌아다녀서 심장이 버거워 탁 멎어 가야할 것 같애.
새해 시작부터 이런 우울한 이야기로 시작하니 우리가 그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증거일까.
2003년 1월 2일
3년전 부터 멀리 미국으로 간 딸에게 아침마다 편지를 쓰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답장은 아주 드물게 받고는 했죠.
우연히 아침마다 두딸에게 편지를 쓰는 다른 엄마 김 성은과 편지를 주고 받게 되었어요.
두 어머니는 딸들에게 편지를 쓰고 친구에게서는 답장을 받고는 한게 어언 3년째로 접어 들었고, 그동안 주고 받은 편지가 300통 가까이 되리란 짐작이 듭니다.
정말 많이 이야기들을 편지에 담었습니다.
저 잠시 미국을 다녀 옵니다.
7월 말쯤 귀귁할 예정이예요.
편지 자주 할께요.
본인의 허락도 없이 올려 보았습니다
추운날 와줘서 고맙다. 빈소차리기전에 영안실에 멍하니 앉아 있을때
꼭 너한테 이멜을 보내고 싶었어.
다행히 가까운 곳이라 늦게 출발했더니 햇볕이 따뜻했고 바람이
없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어. 집례하는 목사님과 성가대들, 운구하는 분들께
미안했어.
네말대로 엄마를 찬 땅에 두고오려니까 가슴이 미어지더라.
오는 차안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그때까지는 잘 안울었는데
그게 정말 가슴아프더라. 더구나 우리엄마가 늘 날씨좋을 때 가얄텐데
하고 바래셨는데말야. 맘대로 안되었어.
엄마가 느낄 수없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그래도 아버지랑 합장이라서 나란히 묻히셨으니 좀 나을런지.
집에와서 뜨거운 샤워를 하려니 엄마를 그 찬데 두고 온 것 때문에
가슴이 떨려서 혼났어.
나도 늘엄마한테 가면 좀 더 있다 가라고 하셨지.
이젠 우리들이 갈 때를 위해 잘 준비해가야겠지.
우리 엄마처럼 자다가 가고 싶다고 기도하시더니 정말 그렇게 가셨어.
혼자 많이 속으로 참으면서 최후의 날을 기다리신걸가.
------- 편지 원본 -------
> 제목 : 어머니에 대한 단상들
> 받은 날짜 : 2003/01/06 오전 11:04
> 보낸 사람 : 풍자 김 <poongjalee@yahoo.co.kr>
> 받는 사람 : "김성은" <sekim@stu.ac.kr>
>
아침에 베란다 문을 열고 맨발다닥으로 타일을 짚어
보았더니 아주 차가운 기운이 옮겨져.
어제 T.V.에서도 몹씨 추울거라고는 했지만 창으로 드는
햇살이 부드러워서 혹시나 오늘 아침은 풀렸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거든.
영결식 예식이야 한시간 남짓하고, 양지 바른곳들이라서
따뜻하게 (특히 발이 시려) 입고 가면 전연 문제 될 것이
없다만 어머니가 차가운 곳에 누우시게 되는게 영 마음에
걸릴것 같어서 말야.
사촌 형님 장지에 간날은 푸근했고, 흙도 부드러운데다가
양지 바른곳이어서 따뜻하고, 아늑한 대지로 돌아 가는
느낌에 한결 가벼웠거든.
토요일날 병원을 가면서 난 친정 어머니가 돌아 가시던날,
그리고 자궁암으로 고생하시던 모습이 선연히 기억이
되어서 가슴이 자꾸만 시려왔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라기 보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시간이 흘러도 아니 내가 나이들수록 절절하게 기억되고는
해.
그리고 함께 연상되는 생각들은 우리딸 아이는 내가 간후
어떤 연상을 할까?
우리 어머니 5형제 혼자 힘으로 키우시면서 자식들
사랑으로 키우는게 무언지 조차 생각할 겨를없이
허덕이면서 사신 세월이셨어.
나이가 들면서 세월에 대한 이해를 가지면서 어머니 일찍
가신게 가끔씩, 어떤 때는 자주 아쉽고 죄송하게
느껴졌어.
내 나이 41세때 가셨으니 나 한창 바쁘고, 힘들고,
허덕이면서 인생고개를 넘던 시절이어서 라고 혼자 변명을
해 보기도 하지만 언젠가 어머니집을 갔더니 우리 어머니
집앞 어린이 놀이터에서 멀거니 앉아 계시다가 나를
발견하시고는 함빡 웃으셨어.
난 그날 사 가지고 온 빵봉지를 풀어 놓고는 작은애가
학교서 올 시간인데 내가 그날 꼭 있어야 할 일이 있다며
일어날때 우리 어머니가 혼자 중얼거리시는 소리를 신발을
신으며 들었지.
'뭐가 그리 바쁘다고 오자 마자 간다고들 하는지.....'
요즈음 그 말을 하신 어머니 심정 이해가 간단다.
내가 기운없고, 외출도 힘들때, 딸아이와 함께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겠지.
그애들 바뻐서 그런 마음 이해할 수가 없을테고.
너희 어머니 정말 곱게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한
평생 사신분이시고 또 원하시는 하늘 나라로 가셨을거란
확신은 나도 들어.
그리고 너 편하게 방학중에 가셨구나.
성은이 어머니가 돌아 가시기 사흘전에 써 보낸 편지도 함께 실어 봅니다.
나도 요새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려고 작정(?)을 하셨는데도
마음대로 안되신다고 하셔서 우울해. 93세라도 지금껏 소변 대변 화장실에
혼자 가셔서 잘 보셨는데 이젠 자기도 모르게 나온다는구나.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시나봐. 음식을 안 잡수시려는거야.
아들 며느리는 안타까워서 억지로 잡수시게 만드니 조금잡수시긴하지만
또 쌀 일이 걱정이고. 기저귀차기는 정말 싫다셔.우린 누가 저
아들며느리처럼
보살펴주겠나 우리엄마는 복이 많은 노인이지.
몸이 애기처럼 작아지셔서 바라보기가 너무 슬퍼.
우리아버지가 천당에서 말빨이 안서서 당신을 빨리 못데려가시나보다고
농담도 잘하셔. "영감, 하나님한테 잘 말해서 나 좀 빨리 데려 가 주소"
우리가 "아버지가 거기서 딴 살림 차렸나"하면 그럴리가 없다는군.
자고 나 눈뜨면 안 죽고 또 살았구나
하고 슬퍼죽겠다니 어쩌냐. 죽을 때까지 다리가 튼튼해야
열심히 돌아다녀서 심장이 버거워 탁 멎어 가야할 것 같애.
새해 시작부터 이런 우울한 이야기로 시작하니 우리가 그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증거일까.
2003년 1월 2일
3년전 부터 멀리 미국으로 간 딸에게 아침마다 편지를 쓰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답장은 아주 드물게 받고는 했죠.
우연히 아침마다 두딸에게 편지를 쓰는 다른 엄마 김 성은과 편지를 주고 받게 되었어요.
두 어머니는 딸들에게 편지를 쓰고 친구에게서는 답장을 받고는 한게 어언 3년째로 접어 들었고, 그동안 주고 받은 편지가 300통 가까이 되리란 짐작이 듭니다.
정말 많이 이야기들을 편지에 담었습니다.
저 잠시 미국을 다녀 옵니다.
7월 말쯤 귀귁할 예정이예요.
편지 자주 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