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비
고등학교 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백설부(白雪賦)라는 수필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내용은 거의 잊었지만 한자말이 유달리 많이 섞여있어 시험에 출제될까 마음 졸였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어느 이른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 본 순간, 어제 밤까지 널려있던 온갖 더러움을 가뭇없이 감추고 일순 순백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은 눈을 예찬한 유려한 문체의 수필이었다는 기억과 그 가운데 몇 구절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머리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지은이가 피천득 교수인지 이양하 교수인지조차 분명하지않아 인터넷을 뒤져보니 김진섭이란 난생 처음 듣는 듯 싶은 수필가라 한다. 그러니 내용을 제대로 기억한다는 건 언감생심(焉敢生心) 바랄 일이 아니다.
아무튼 백설부가 아니더라도 눈을 싫어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게다. 강추위가 계속되던 한 겨울 어느날, 낮게 드리웠던 무거운 구름이 한 송이 한 송이 꽃이 되어 사뿐사뿐 날라와 대지위에 쌓일 때, 그래서 마침내 세상의 온갖 지저분함과 두드러짐을 감싸 하나로 어울리게 만들 때, 누군들 눈을 싫어하랴.
눈이 쌓여 세상을 감싸면 어머니 품 속 같은 포근함도 느낀다. 세차게 몰아 붙이던 찬바람도 잠시 잦는 듯 싶다. 창가에 서서 쌓이는 눈을 내다보면 눈 싸움하던 정다운 친구들, 화롯불에 익어가는 고소한 군밤 냄새, 토끼몰이하던 그리운 어린 시절이 떠 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눈은 우리 마음을 설레게도 하고 차분하게 가라 앉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눈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길이 미끄러워 생길 짜증스러운 교통체증 때문이 아니다. 공해로 인하여 산성화(酸性化) 된 눈이 건강에 미칠 악영향 때문도 아니다. 내가 눈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눈이 녹을 때 그 지저분함 때문이다. 곧 어디에선가 신데렐라라도 나타날 듯한 순백의 세상은 나도 좋아하지만, 그런 시간이 오래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우리들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깨끗해 보였던 순백의 포장이 하루를 못 넘기고 군데군데 벗겨지면서 본래의 지저분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마치 까까머리에 옮긴 기계충처럼, 이곳 저곳 녹아 내린 눈은 본디 제 모습보다 훨씬 더 흉측스러운 풍경을 만들고 만다. 그런 모습은 쉬 사라지지도 않아 눈이 모두 녹아 없어질 때까지 오랜 기간동안 이어진다. 눈이 완전히 녹아 내린 다음에도 눈 속에 섞여있던 먼지들은 더러운 자국을 여기저기 남긴다. 아름다운 순간은 잠시뿐 그 몇 갑절 되는 긴 기간에 걸쳐 온갖 더러움을 남기는 게 내가 눈을 싫어하는 진짜 이유이다.
그러나 비는 눈과는 사뭇 다르다. 이른 봄 대지를 촉촉히 적시는 보슬비는 새 봄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한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오후 상큼하게 뿌려주는 빗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우리 마음을 상큼하게 해준다. 오랜 가뭄 끝에 대지를 적셔주는 비는 다정한 친구처럼 반갑다. 그칠 듯 말 듯 이어지는 장마비가 지루할 때도 있지만 그 사이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햇볕에 신선함을 더해준다.
무엇 보다도 내가 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비 개인 다음의 산뜻함 때문이다. 비록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지겹더라도 비는 언젠가는 멎기 마련이고 그친 뒤에는 언제나 깨끗하고 산뜻하고 개운한 느낌을 선사한다. 이것이 눈과 비가 다른 점이다. 설사 비를 싫어한다 하더라도 비 갠 뒤에 느끼는 이 상큼한 기분까지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래서 내게 백설부의 작가와 같은 글재주가 있다면 나는 비를 노래하고 싶다.
그러나 비도 비 나름이지 올 여름 우리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태풍 루사 같이 일년 내내 두고 올 비가 하루 사이에 퍼붓듯이 내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다면 어떻게 비 좋아한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태풍으로 인한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웃이 아직도 많이 있는데 비 좋다는 얘기를 할 계제는 아닌 듯 싶다. 그렇지만 백설부가 눈사태 일으켜 동네를 휩쓸고 간 눈을 예찬한 글이 아니듯이 내 얘기 역시 이런 재해를 일으키지 않는 한 비와 눈을 비교한다면 그렇다는 얘기일 뿐이다.
눈은 처음에는 깨끗함과 조화를 연출하지만 그 속에 감춘 더러움과 부조화를 바꾸지 못한 채 이내 드러내 보이지않을 수 없는 반면, 비는 이와 반대로 내릴 때 지저분함과 구질구질함을 보이다가 개이고 나면 떠돌던 먼지를 깨끗이 씻어내어 깔끔하고 상쾌함을 준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고 둘 중에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비를 택하겠다는 얘기다.
바로 엊그제까지 대낮엔 제법 더워서 에어컨을 가동했는데, 오늘 아침엔 갑자기 쌀쌀해져서 차 안에서 히터를 켰다. 비의 계절이 사라지고 눈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눈이 싫고 비가 좋다 한들 계절의 변화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한편 생각해 보니 겨울엔 눈이 내려야 하고 여름엔 비가 내려야 한다. 아무리 비가 좋다 해도 한겨울 푹한 날씨로 내리는 비는 어울리지 않고 을씨년스럽다.
눈이 있음으로 비를 생각하게 되고 비가 내리므로 눈의 아름다움도 느끼게 된다. 북극이나 남극처럼 내렸다 하면 사시사철 눈만 내리는 곳에 살거나 눈이라곤 그림이나 이야기에서 뿐 평생 단 한번 구경도 못하는 열대지방에 산다면 어떻게 눈과 비를 견주어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람도 눈 같은 사람, 비 같은 사람이 있을 듯 싶다. 같이 있을 때는 좋기만 하다가 떨어지면서 뭔가 마음에 짐을 남겨놓고 가는 사람이 눈 같은 사람이라면 함께 있을 때는 그리 좋은 줄 모르고 또 어떤 때는 지루하게 느껴지더라도 헤어지면 곧 그리워지는 사람, 그런 사람은 비 같은 사람이리라.
나는 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같이 있을 땐 있는 듯 없는 듯 전혀 표가 나지않다가 어느 순간 한 곳이 허전한 듯 싶어 찾아 보면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 말이다. 같이 있을 땐 때론 귀찮기도 하고 듣기 싫은 소리도 하지만 헤어지고 나면 그의 말이 그립고 그의 몸짓이 생각나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러나 사람 역시 비 같은 사람과 눈 같은 사람이 어울려 살아야만 저 나름대로 빛을 발하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도 내리고 눈도 내려야 그 각각의 진미를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 가을이 깊어지면서 이런 쓸데없는 상념에 젖어본다. 내가 혹 가을을 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200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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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눈은 물 H2O 일 뿐인데 이렇게 근사하게 쓸 수 있는 병근이의 시심과 재주가 질투나게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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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짐을 남겨놓고 간 사람,네게 그리움을 남겨놓고 간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네가 걱정해준 손가락은 다 나았다.곧 다시 도질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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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부탁하건대 손가락 좀 잘 간수해라, 건수야. 그리 자주 다치면 발가락으로 키보드 치기, 전화 번호판 치기 등, 연습을 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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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개 쪽지 글의 내용이 궁금한 사람은 #668 쪽지글을 참고하시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