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연습
나는 아이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시재로 이 말을 하는 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을 표현하려는 뜻이다.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등에 업혀 잠든 갓난 아기들, 쇼핑 카트 타고 장난질하는 아이들, 제 몸뚱이 만한 책 가방 메고 가쁜 숨 몰아 쉬며 엘리베이터에 뛰어드는 초등학교 아이들, 심지어는 음식점에서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까지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애들에게 미소도 보내고, 눈도 찡긋해 주고, 또 때론 말도 걸어본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놀라운 변화다.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이렇게 변하리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우리집 아이들 어렸을 적 그 애들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아마 재미없고 무서운 사람일 뿐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뺨을 비비고 포근히 안아주기는커녕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공원이나 놀이터 같은 데 손 잡고 같이 다녔던 기억이 거의 나지않는 걸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했어도 마음 속으로 기뻐했을지언정 겉으로 나타내 추켜세운 적이 별로 기억 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조그마한 잘못도 참지 못하고 애들 나이도 상관하지 않은 채 싸잡아 나무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빤한 일이다. 할머니 모시고 사는 바람에 참으려고 애도 썼지만, 매를 든 일도 적지않았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그 때 아빠에 대한 생각은 물어 볼 필요도 없다.
내가 낳은 자식들에게도 이러했거늘 남의 아이들이 귀여웠을 리 없었다. 아이들이 많이 모여 부산스러운 자리에는 되도록 가지 않으려고 했다. 명절 같이 친척들이 모일 때 따라온 아이들의 일시적인 북새통도 잘 참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니 음식점이나 상점 같은 장소에서 제 집 마당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못마땅한 건 내겐 너무 당연했다. 아이들 데려온 부모가 모르는 체 다른 일만 하고 있으면 부모까지 미워졌다. 참고 참다가 너무 심하다 싶으면 한마디씩 하기도 했다. 애들을 저렇게 길러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한심스러운 때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여러 사람 있는 장소에서 제 새끼 예쁘다고 뽀뽀하고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모르는 젊은 엄마 아빠들도 내게는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들이 예쁘고, 귀엽고, 한번 안아주고 싶고, 말 걸고 싶고, 그렇게 변했으니 이게 어디 보통 변화인가. 이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하면 그게 모두 할아버지 되려는 변화라 한다. 그런 변화가 없으면 죽었다 깨어난들 손자 손녀 돌보는 그 힘드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거다. 그렇게 힘이 들다가도 며칠 안보면 그 곰실곰실한 애들의 모습이 눈 앞에 삼삼하게 떠 올라 아무리 힘들어도 안보고는 못 배긴다는 얘기다.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자연의 섭리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리적 변화에 불구하고 나는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게 싫다. 언젠가 슈퍼마켓에서 있었던 일이다. 앙증맞은 손으로 엄마를 잡아 끌며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가 하도 예뻐서 “아이고 예뻐라. 너 몇 살이니?”하고 물었다. 수줍은 듯 동그란 눈만 반짝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아이에게 엄마가 한다는 말이 “세 살이에요, 할아버지, 하고 말씀 드려야지” 아닌가. 나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뚝 떨어졌다. 꼭 끼워 넣지 않아도 좋을 자리에 왜 그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못박아 넣느냐는 말이다. 나는 벽에 붙여놓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자세히 들여 다 보았다. 아내 따라 장보기에 나선 길이니 막바지에 잠바를 걸친 꺼칠한 중년의 남자가 거기 있었지만, 아무리 뜯어 보아도 할아버지라고 단정 지을 구석은 찾을 수 없었다.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그런 일이 또 한번 있었다. 그 뒤론 엄마와 같이 있는 애들에게는 미소를 보내는 걸로 그친다.
생각해 보면 내 나이가 할아버지로 부르기도 그렇고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어정쩡한 그런 연배인 듯 싶기도 하다. 또 가까운 친구들 가운데 이미 손자 손녀 본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니, 할아버지로 불린다 해서 억울해 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할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면 그게 그리 싫다. 하고 있는 일에 관해서든 새로운 일에 대한 의욕이든 어떤 젊은이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내 성격 탓인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어디 나 뿐이랴 싶어 친구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손주 생기기전까지는 대개 그렇단다. 심지어 머리가 일찍 센 어떤 친구는 지하철 타면 자리 양보 받는 게 싫어 아예 의자 있는 근처는 가지 않는다는 얘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도 언젠가는 손주가 생길 터, 지금부터라도 할아버지 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이 들어 때 되면 싫어하던 애들이 무의식 중에 예뻐져 손주 맞을 생리적 준비는 되는지 모르겠으나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데 이런 거부감이 있다면 그건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앞으로 점점 더 할아버지로 불릴 기회가 많아져서 마침내 할아버지라는 호칭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 때가 멀지 않은 게 분명한데 무작정 버틴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들이 예뻐지는 자연현상에 덧붙여 의식적으로 준비해야 할 마음가짐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고싶은 말 하지 않고도 편안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할까? 다 큰 자식들도 같은 말 되풀이 하면 싫어한다. 당연히 해야 할 일 하지 않는 걸 두고 보다 못해서 몇 마디 하는 말조차 싫어하는데, 손주들이 이런 말 듣기 좋아할 턱이 없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 참을 줄 알아야 하는 데 이건 습관되지 않으면 속병 생기기 딱 알맞은 일이다. 하기는 말 하나마나 저희들 고집대로 살아갈 터, 소용도 없는 일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굳이 말 한다는 자체가 자신의 속병 예방에 도움이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익혀야 할 일은 말 안하고 속병 예방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도 답답해지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한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늙어서도 바쁘게 일하는 거다. 한가하면 이 생각 저 생각 하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걱정이 늘어나고 걱정이 되면 한마디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는 게 아닐까? 이 생각 저 생각 할 틈이 없이 바쁘면 자연히 애들이 얘기하는 이른바 잔소리는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데 누군들 한가하게 쉬고 싶어서 쉬는 건가. 할 일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쉬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늙어서 할 일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노인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작은 회사 만드는 게 내 꿈이다. 아직까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 오르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생각하다 보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지 모른다. 꼭 돈 벌이가 되지는 않는다 해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할 일이 있다는 자체가 축복 된 일 아닌가. 꼭 꿈을 이루고 싶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건강 또한 중요하다. 매일같이 자리에 누워 있거나 병실에서 세월을 보낸다면 좋아 할 자손이 있겠는가. 할아버지 체통 지키며 살려면 아파서 여기 저기 신세 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자면 꾸준히 열심히 운동해야 한다. 이것도 습관되지 않으면 갑자기 할 수 없는 일, 지금부터 찾아서 몸에 익혀야만 한다. 건강해야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을 터, 건강이 나빠지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게 뻔하다. 나이 먹어서까지 지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운동은 무엇일까? 이것도 개발해야 한다.
쓸데없는 욕심이나 고집도 없애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게 많으면 마음 속 평화를 얻을 수 없는 법, 바로 이 욕심을 버리는 일이 오직 스스로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일 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 다른 욕심을 가진 적이 없으니 이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듯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자리잡고 있을 고집을 없애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게다. 사실 어디부터가 고집의 시작인지도 분명하질 않다. 그러니 남의 얘기를 잘 들어 보는 수 밖에 없다. 남의 얘기 잘 듣는 인내심도 습관되지 않으면 어려울 게다. 일에 대해서도 욕심과 고집을 버리는 게 중요할 게다.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일이 부담을 주지 않아야 가능해 지지 않겠는가. 일에서 보람과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죽을 때까지 물리지 않고 할 수 있을 게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 같은 게 그러할 텐데 나이 많이 먹어서도 할 수 있는 마땅한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준비가 너무 거창하면 그 자체가 욕심이 될 수도 있으니 이 이상은 더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이 세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한가지도 그리 녹녹하게 이룰 자신이 없다. 그러니 연습이 필요하다. 이미 뒤 늦은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하자고 다짐해 본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굳건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숨을 거둔다면 이보다 더 축복 받은 삶이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 할아버지가 좀 더 살다가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한자리에 모여 죽음을 애통해 하는 그런 상상이 내가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지막 모습이다. 누군들 그런 모습을 꿈꾸지 않으랴. 다만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팔자로 돌리고 가만히 앉아서 할아버지 되기를 기다리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할아버지 연습을 착실히 해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분명 있을 게다. 내가 할 도리는 다하고 나머지는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옛 어른들도 수인사 대천명(修人事 待天命)이라 하지 않았던가.
할아버지 연습으로 한동안 바빠져야겠다.
( 2002.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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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할머니 할아버지 된 선배님들 후배 할아버지를 위한 충고 한마디쯤 남겨도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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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문 싸이트에 마음 풀어 글 쓰고, 친구 쓴 글에 답글 하는 자 너무 적어 마음 한편 섭섭하구나. 녀석들 좀 망거지기도 해야 속내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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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할아버지 연습하느랴고 모두 바쁜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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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누적시켜온 노우하우를 어린이들에게 전수시킬수 있는 서당같은것 개설하는것도 좋게 늙는 방법의 하나가 될수 있을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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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서당에 학도가 모이기는 모일까? 입시학원이나 외국어 학원이라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