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에 써서 '하이파이 저널'이라는 잡지에 실었던 글이다. 지난번에 올린 월간 여성중앙에 게재되었던 글과 관련된 글이다.
- '선농16'에 게재된 일도 있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다시 한번 올린다.
‘오디오평론가’ 사건
여성 월간지 기자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한 10년 전쯤의 일이다. 고전음악을 친숙하게 듣기위한 감상법을 소개하는 글을 한편 써 달라는 원고청탁 전화였다. 내가 오랫동안 음악을 듣고 즐기긴 하였지만, 음악에 대한 정견이 없기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흔한 유행가 한 곡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자신이 없는 주제여서 이 부탁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물론 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능력이 없어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혹시 핑계나 겸양쯤으로 오해한 듯, 그 기자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전화를 해왔다. 쓸 거리가 없음을 사정해 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쓴대야 한편의 잡문밖에 안될 글을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결국 원고지를 메우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쩐 일인가? 다음달 잡지를 받아 본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이름 석자 뒤에 ‘오디오 평론가’라는 얼토당토아니한 타이틀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이미 엎질러진 물을 쓸어 담을 수 없는 일, 누가 이 따위 글을 읽어보랴 하는 막연한 기대를 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마도 잡지의 품위를 위하여, 마땅한 수식어가 없는 필자에게 무심히 붙여놓은 엉터리 타이틀이었을 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여섯 자의 수식어가 그 뒤 나에게는 웃지 못할 여러 가지 사건을 만드는 중대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아무의 눈에도 읽히지 않기를 바랐던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가고 아무 지식도 없는 무지렁이인 내가 하루아침에 오디오 평론가로 둔갑하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었다. 내게는 이것은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다. 우리집에 있는 변변찮은 앰프의 출력도 얼마인지 제대로 모르는 판국에 오디오 평론가라니. 오디오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그야말로 무식한 보통사람에게 말이다.
그 뒤 어느날, 우연히 운전 중에 FM방송을 듣다가 있던 나는 정말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무안함을 당하였다. 이름을 대면 음악 애호가들이 금새 알만한 Y음대 교수 한 분이, 내가 썼던 그 잡문을 가지고 조목조목 따지고 있었다. 그의 결론은 한마디로 “이런 무식한 평론가가 글을 써대고 있으니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아마추어 음악 애호가들은 음악을 즐기는 것으로 족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의 잡문에서 음악은 편하게 즐겨라,이론적으로 따지지 말라,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작곡자도, 연주자도, 평론가도 아닌 객석에 앉은 관객이다, 모두 즐거운 관객이 되어보자, 이런 주장이랄 것도 없는 생각을 써 놓았었다. 이러한 나의 생각들을 그 교수는 조목조목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 문제의 “오디오 평론가”라는 타이틀이 아니었다면 저명한 교수가 자기가 맡은 클라식 음악 해설시간을 통하여 언급할 까닭이 없었을 터였다.
하루는 내가 근무하는 회사 그룹홍보실 사보 편집기자가 나를 찾아왔다.새로운 사보 기획물 취미코너에 “오디오와 음악”이라는 연재물을 싣고자 하는데 집필을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앞이 캄캄한 이야기라서 “그런 일이야 전문가에게 부탁해야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꽁무니를 뺐다. 월간잡지에 오디오 평론가로 소개된 것을 보았는데 정말 이렇게 거절만 하기냐고 계속 졸라대던 그 기자는, 신년호 원고마감 기일이 다가오자 마침내 ‘애사심 유무’라는 말까지 들먹이며 나를 코너로 밀어 부쳤다. ‘애사심’이라는 신종무기 앞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백기를 들고, 당초 예정된 1년간의 연재기간을 반으로 잘라 6개월분만 쓰기로 사정사정 타협하여 매월 20여 장의 원고지를 채우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그 당치않은 타이틀 붙여준 기자를 원망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잘못 시작된 ‘오디오 평론가’의 가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번 맛들인 사보 편집실에서는 자기들 맘대로 그 이듬해 ‘마음의 여울’이란 칼럼에 ‘오페라에의 초대’라는 제목을 붙여 기간까지 1년으로 정한 채, 내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를 필자로 소개해 버렸다. 한번 끌려 들어가기 시작한 잘못이 이렇게 두고두고 어려움을 중첩 시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뒤 일년동안은 팔자에 없는 온갖 음악 서적들, 심지어는 메트로포리탄 오페라 백과사전까지 사들여 놓고 뒤적여가며 오페라 얘기들을 베껴 적는데 땀을 흘렸다. 역시 그 이름도 기억되지 않는 기자 탓이었다.
더 이상 무식을 폭로하지 않으려고 계획에도 없는 해외출장 핑계까지 동원하며 애를 써 보았지만, 그 뒤에도 피치 못하게 월간지, 전문지 등에 몇 편의 글을 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걸려오는 친구의 전화는 새 오디오를 샀는데 좋은지 나쁜지 들어봐 달라고 부탁하기 일쑤였다. 이런 부탁은 그래도 좀 괜찮은 편이다. 오랜만에 친구도 만날 겸 시간만 내면 그런대로 즐거운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집에 가서 식사도 하고 지나간 이야기도 하다가 대접으로, 소리가 참 좋다, 잘 장만한 것 같다, 음악 많이 듣고 즐겨라,고 몇 마디 덕담을 늘어놓고 돌아오면 나의 임무는 끝난다. 오랫동안 망서리다 어렵사리 장만한 오디오시스템을, 박진감이 있네 없네, 소리가 투명하네 아니네, 섬세한 소리네 아니네, 중고음이 어떠네 트집을 잡을 이유가 전혀 없다. 또 그럴만한 밝은 귀가 내게 있는 것도 아니다. 더더군다나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주파수 특성, 왜율, 실효출력, 구동방식, 채널분리도, 이런 것들은 따질 줄도 모르고 또 따져서 무엇을 어쩌자는 이야기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음악을 듣고 즐기는데 과연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이 들떠있는 친구에게 찬물을 끼얹을 이유 또한 없다.
그런데 이런 부탁과는 달리, 이제 오디오기기를 사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좋으냐고 물어 오는 전화가 적지 않은 게 탈이다. 이것이야 말로 난감한 질문이다. 나도 잘 모르는 것을 남에게 설명해야 하는 난감함은 물론이려니와, 그 사람의 취향, 듣고자 하는 음악장르, 집안구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도대체 그 많고 많은 기기 가운데 어떤 것을 사라고 어떻게 권고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얘기를 하면 도와주기 싫어서 그런다고 오해 받기 일쑤다. 이 모든 문제가 그 타이틀 붙이기 좋아하는 몹쓸 기자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그 기자가 잘못 붙여준 타이틀로 인하여 음악을 편하게만 즐기던 나의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태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비록 내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엉터리 글을 쓰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여러 차례 쓰다 보니 앞뒤 분간은 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자연히 책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남의 오디오시스템에 찬사를 보내기 위해서, 또는 시스템을 사려는 사람에게 최소의 성의라도 표시하려고 하다 보니 이런저런 기기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런 노력들이 알게 모르게 나의 음악에 대한, 오디오기기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으로 쌓였다. 아직도 그 수준은 유치하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단계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들이 쌓여 체계를 갖춘다 하더라도 나는 오디오 평론가로 불리고 싶지는 않다.
혼자 조용히 음악을 즐기는 게 내 바람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통하여 기쁨과 마음의 고요를 얻는 것이 내게는 음악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오디오 시스템에 만족한다. 이것은 내 오디오 기기들이 좋은 것이냐 아니냐의 객관적인 기준과는 무관하다. 이 시스템을 통하여 내가 듣고자 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연주장의 소리를 완벽하게 재생하는 시스템을 찾아 헤매는 오디오 애호가를 가끔 만나게 되는데 이들이 측은하다고 생각들 때가 있다. 어차피 연주장의 소리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시스템을 찾을 수는 없을 터, 연주장의 음악은 연주장에서 들을 일이다. 집안 좋고 돈 많고 인물이 빼어나며 성질 좋고 품위있는 규수를 찾아 헤매려고 결혼을 미루거나, 아내가 그렇지 못하다고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영원히 결혼생활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알맞은 상대를 찾아 결점은 보완하고 장점을 키워 가도록 자신을 바꾸는 게 결혼에서 행복을 찾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음악 역시 기기에 대한, 환경에 대한, 자기자신의 경제적 한계에 대한,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제약에 대한 욕구로부터 해방되어야만 즐기고 느낄 수 있을 듯싶다. 그래야만 비로소 화려하게 펼쳐진 음악의 파라다이스에 한 발짝 들어서게 될 듯싶기도 하다. 거기서 오묘한 화음에 휩싸여 황홀해 하다가 문득 나는 어떻게 세상의 화음을 만들어 갈지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소리는 너무 크지 않았던가, 나의 속도는 너무 빠르지 않았던가, 나는 전체와 조화되었던가, 나는 나의 이웃을 무시하지 않았던가 이런 상념에 빠질 수 있는 즐거움도 거기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즐기고 싶은 음악이다.
적지않은 음악과 오디오 지식이 그 기자로 인하여 쌓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내 이런 성향 때문에 그 기자에게 감사하고 싶은 생각은 아직 없다. 이 또 하나의 잡문이 이번에는 부디 여러 사람에게 읽혀서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된 나의 가슴앓이를 깨끗이 치유 시켜 주기를 기대해 본다. 나는 날카로운 눈과 분석적인 귀와 냉철한 가슴이 요구되는 이지적인 평론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언제나 한 발짝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음악과 소리를 분석해야 하는 평론가가 되기 보다는, 두부장사의 종소리와 세탁기 소리가 섞인 소음 속에서도 바흐의 소나타에 마음을 열릴 수 있는, 어머니의 품속을 파고드는 고사리 손을 가진 아기처럼 무조건 음악의 한 가운데로 달려가는 순진한 어른이고 싶다. 그래서 모짤트와 슈베르트의 숨소리도 듣고 그들의 뜨거운 체온도 느껴보고 싶다.
( 1993. 1. 11.)
( ‘하이파이 저널’ 창간호 권두에세이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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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 본적도 없고 갈 수도 없는 길을 병근이가 멋지게 다니는 것에 부러웁고 또한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