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 골목에는 내과 병원이 있었다. 그 병원 의사 할아버지는 내가 독감 걸려 어른 손잡고 문 열면 한 손에 청진기 싸잡고 윗 옷 올리라고 하셨다. 나는 고개를 외로 돌리고 크게 숨을 내쉬고 들이쉰다. 그 할아버지는 여기저기 청진기를 대 본다. 그리고 따뜻한 왼손 펴서 가슴 배 여기저기 대 가면서 당신 오른손으로 왼손 위를 하나 둘 하나 둘 두드려간다. 이런 진찰을 할 때 그 청진기가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던 기억이 있다. 열이 있었기 때문 일게다. 그 때 한손으로 금속 청진기를 싸잡고 따듯하게 데우던 의사 할아버지가 지금 생각해도 참 친절했다.
내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 의사와 달리 이젠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친절하면 안 된단다. 왜냐면 요즘 환자들은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자기 주장에는 뛰어나지만 남에 대한 고마움과 배려는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버렸기 때문이다. 모두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란다. 의료시술에는 어쩔 수 없이 잘 못 되는 경우가 많이있다. 그래서 노련한 의사일수록 이럴 때를 철저하게 대비하는 노력을 한다. 의사가 환자에게 대책없이 친절하면 할수록 나중에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거다. 不可遠이나 不可近이다. 이것이 처세인 모양이다.
난 30년 간 학교에서 17, 18세의 꽃 같은 젊은 아이들의 향긋한 땀 냄새를 맡으며 살아왔다. 운동장에서 뛰어 놀다 얼굴이 빨개지고 윗옷이 땀에 젖은 놈이 한 오십 명 히히대고 있는 교실의 싱싱하고 향긋한 젊은이들의 냄새를 나는 기억한다.
이번 여름에는 외과병동 중환자실의 냄새를 맡으며 지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냄새다. 아침저녁 씻고 닦아내야만 없앨 수 있는 인간의 냄새다. 처음에 난 계속 역겨웠다. 그런데 스물 서른 먹은 간호사들은 그 전쟁터 같은 병동에서 가볍게 바삐 움직이고 시간 맞혀 점검하며 귀잖게 구는 환자를 배려하여 웃어 주곤 하더라. 또 거기서 분홍색 제복을 두룬 자원봉사자가 배설물을 치우고 거기를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것을 보았다. 찡그리기는커녕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이더라. 그것을 보며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의 헛말들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한여름이 다 가고 여름방학도 끝났다. 병마에 시달리는 노인들을 한여름 내내 보며 지냈다. 그들을 보니 내 인생도 별다른 일 만 없다면 한 이십년은 더 지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거기엔 까다롭고 쉽지않은 조건이 있다. 병마에 시달리지 않아야하고, 젊은이 같진 않아도 좋은 냄새 풍길 수 있어야한다. 끝까지 화장실은 걸어갈 수 있어야하고 주위사람 다 알아보며 "안녕"이라고 말하며 떠나야 한다. 그렇게 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