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信仰 告白
오늘은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나의 改宗의 주요 이유을 다섯가지로 要約하여 설명하려한다.
첫째. 앞서 이야기 했듯이 고교 1년 鄕土硏究班 시절부터 절(寺) 踏査
를 많이 다니면서靈洗 전부터 불교에 대한 鄕愁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
세를 받게된 동기는 고2 시절 돈암동 나의 집 아랬채에 세들어 살던 벙어리
학생이 성당을 열심히 다니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고 또 나
의 고모님(현재 80세) 이 명동 성당 수녀원에 계셨던 관계로(그러나 고모님
은 한번도 나에게 성당에 나오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 학생의 인도로
영세를 받게 되었으며 그 학생이 이름도 본명도 모르지만 나의 대부이다.
둘째. 나의 미사 참례의 주 목적이 신부님과의 靈的 交感이었으나 그
것을 충족시킬수 없었다. 개신교의 경우 설교를 통하여 그런 욕구를 충족시
킬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나 많은 목회자의 삶의 모습과 가까운 개신교 신앙
인을 보면서 그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 했다. 좌우지간 천주교는 미사 형식에
너무 지나친 감이 있으며 무엇인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는 점에 대하여는 개신교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분당 요한성당 김영배 사도요한 주임신부님과의 갈등이다. 동양 최대
의 성당을 지으면서 주임신부께서 사심은 없으셨다고는 생각되나 욕심은 많
으셨던게 분명하다. 종교의 주 목적이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이지 성당을 크
고 사치스럽게 짓는 것이 아니라는 평소의 소신과 크게 다르다.
넷째. 고백성사의 의미에 대한 회의. 누구나 말하기 거북한 비밀과 말
할 수 없는 비밀이 있게 마련이다.(누구나 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겠다) 말하기 거북한 비밀까지는 고백할 수 있으나 어느 시기부터인가 말
할 수 없는 비밀이 있고 부터는 더욱 고백성사의 의의에 대하여 회의를 가
지게 되었다. 교리에 어긋날 뿐이지 그것이 큰 죄라고 생각지 않고 양심에도
꺼릴 것 없고 각자의 양식의 문제인데 고백하기도 싫고 고백을 하지 않자니
교리에 크게 어긋나고 . 항상 FM(군대 용어로 Field Manual의 약자로 야전
전투교범이라는 뜻이나 보통은 교범이라는 의미로 사용)대로 원리 원칙에 충
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교리에 어긋나는 것은 체질적으로 용서가
안된다. 그러나 원리 원칙에 충실한다 하여도 원칙의 본질에 충실하지 피상
적 원칙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칙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를 때는
갈등하게 마련이다. 원칙의 본질에 대하여 쉽게 얘기하자면 어떤 법이 있을
때 그 법의 입법 취지를 말하는 것이다.
다섯째. 성서 이해의 어려움. 나는 신약성서만이라도 아직 완독을 하지
못했다. 읽을 때마다 막히기 때문이다. 성서란 그냥 읽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불경의 가르침은 성서보다는 쉽게 이해가 되며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성서는 악보다"라고 이야기한다. 악보란 연주자가 Pianist냐 Violinist
냐 Vocalist냐에 따라 곡의 해석이 다르고 같은 Violinist라 할지라도 정경화
와 김영욱의 해석이 다르고 정경화라 할지라도 그가 젊었을 때와 나이가 들
었을 때의 해석이 다르듯이(당연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서도 사람에
따라 이해가 달라야하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렸을 때와 나이가 들었
을 때와 늙었을 때의 성서의 이해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
서를 이해하려면 저자의 자라온 배경, 성서를 쓸 때의 시대적 배경, 지리적
배경을 알지 않고서는 성서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예를 들어 예
수님의 귀머거리에 대한 기적을 읽었을 때 나는 그 기적이 나에게 무슨 의
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교육을 통하여 그것은 육체적인 귀머거리만 귀머거리
가 아니라 정신적인 귀머거리 즉 복음을 전하여 주어도 알아 듣지못하는 사
람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알아 듣게 하였다고 해석할 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오늘은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나의 改宗의 주요 이유을 다섯가지로 要約하여 설명하려한다.
첫째. 앞서 이야기 했듯이 고교 1년 鄕土硏究班 시절부터 절(寺) 踏査
를 많이 다니면서靈洗 전부터 불교에 대한 鄕愁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
세를 받게된 동기는 고2 시절 돈암동 나의 집 아랬채에 세들어 살던 벙어리
학생이 성당을 열심히 다니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고 또 나
의 고모님(현재 80세) 이 명동 성당 수녀원에 계셨던 관계로(그러나 고모님
은 한번도 나에게 성당에 나오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 학생의 인도로
영세를 받게 되었으며 그 학생이 이름도 본명도 모르지만 나의 대부이다.
둘째. 나의 미사 참례의 주 목적이 신부님과의 靈的 交感이었으나 그
것을 충족시킬수 없었다. 개신교의 경우 설교를 통하여 그런 욕구를 충족시
킬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나 많은 목회자의 삶의 모습과 가까운 개신교 신앙
인을 보면서 그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 했다. 좌우지간 천주교는 미사 형식에
너무 지나친 감이 있으며 무엇인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는 점에 대하여는 개신교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분당 요한성당 김영배 사도요한 주임신부님과의 갈등이다. 동양 최대
의 성당을 지으면서 주임신부께서 사심은 없으셨다고는 생각되나 욕심은 많
으셨던게 분명하다. 종교의 주 목적이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이지 성당을 크
고 사치스럽게 짓는 것이 아니라는 평소의 소신과 크게 다르다.
넷째. 고백성사의 의미에 대한 회의. 누구나 말하기 거북한 비밀과 말
할 수 없는 비밀이 있게 마련이다.(누구나 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겠다) 말하기 거북한 비밀까지는 고백할 수 있으나 어느 시기부터인가 말
할 수 없는 비밀이 있고 부터는 더욱 고백성사의 의의에 대하여 회의를 가
지게 되었다. 교리에 어긋날 뿐이지 그것이 큰 죄라고 생각지 않고 양심에도
꺼릴 것 없고 각자의 양식의 문제인데 고백하기도 싫고 고백을 하지 않자니
교리에 크게 어긋나고 . 항상 FM(군대 용어로 Field Manual의 약자로 야전
전투교범이라는 뜻이나 보통은 교범이라는 의미로 사용)대로 원리 원칙에 충
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교리에 어긋나는 것은 체질적으로 용서가
안된다. 그러나 원리 원칙에 충실한다 하여도 원칙의 본질에 충실하지 피상
적 원칙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칙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를 때는
갈등하게 마련이다. 원칙의 본질에 대하여 쉽게 얘기하자면 어떤 법이 있을
때 그 법의 입법 취지를 말하는 것이다.
다섯째. 성서 이해의 어려움. 나는 신약성서만이라도 아직 완독을 하지
못했다. 읽을 때마다 막히기 때문이다. 성서란 그냥 읽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불경의 가르침은 성서보다는 쉽게 이해가 되며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성서는 악보다"라고 이야기한다. 악보란 연주자가 Pianist냐 Violinist
냐 Vocalist냐에 따라 곡의 해석이 다르고 같은 Violinist라 할지라도 정경화
와 김영욱의 해석이 다르고 정경화라 할지라도 그가 젊었을 때와 나이가 들
었을 때의 해석이 다르듯이(당연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서도 사람에
따라 이해가 달라야하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렸을 때와 나이가 들었
을 때와 늙었을 때의 성서의 이해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
서를 이해하려면 저자의 자라온 배경, 성서를 쓸 때의 시대적 배경, 지리적
배경을 알지 않고서는 성서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예를 들어 예
수님의 귀머거리에 대한 기적을 읽었을 때 나는 그 기적이 나에게 무슨 의
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교육을 통하여 그것은 육체적인 귀머거리만 귀머거리
가 아니라 정신적인 귀머거리 즉 복음을 전하여 주어도 알아 듣지못하는 사
람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알아 듣게 하였다고 해석할 때 이해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