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지난해 12월15일부터 26일까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지역 트레킹을 다녀온 후 정리한 이야기다.
일정과 코스는, 12/15카투만두-비행기-루크라-팍딩 12/16팍딩-남체 12/17남체휴식 12/18남체-텡보체 12/19텡보체-페리체 12/20페리체휴식 12/21페리체-로부체 12/22로부체-칼라파타르-로부체 12/23로부체-텡보체 12/24텡보체-남체 12/25남체-루크라 12/26루크라-비행기-카투만두
구름 만드는 사가르마타
素 砂 김 성 수
혼자 하는 여행
히말라야에 한번 갔다오면 다시 가지 않고는 못 견디는 지독한 중독증에 걸린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작년 안나푸르나 지역으로 혼자 트레킹을 다녀 온 후 결국 올 겨울 다시 에베레스트 산을 보러 갔다 왔으니 그 말은 적어도 저에게는 진실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혼자 그 험한 곳에 간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서인지 말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사실 혼자 하는 여행이 여러모로 저에게는 맞는가 봅니다. 결국 올해에도 혼자 히말라야 설산 깊숙이 걸어 들어가 우주 만물의 어머니라는 '사가르마타'(8,848m)를 만나고 왔으니까요.
오십 몇 년을 살아오면서 이 세상에 진정으로 나 홀로의 시간과 세계를 경험한 것은 바로 히말라야의 산 속 깊은 곳에서였습니다. 정말로 자연과 나, 우주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는 곳에서 나라는 존재를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지요. 그것은 아마도 혼자 하는 여행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 봅니다.
쿰부 히말라야 - 세계 최고봉 사가르마타와 8,000m가 넘는 로체, 마칼루, 초오유로 이어지는 산맥 남쪽 일원의 지역을 말합니다. 이 산맥은 또 중국 티벳과 국경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요. 쿰부 히말라야 지역 트레킹은 칼라파타르(5,550m)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5,364m) 트레킹, 그리고 고쿄피크 트레킹 이렇게 크게 두 코스로 대별됩니다. 둘 다 사가르마타와 그밖에 7,8천m가 넘는 산군 들을 아주 가깝게 조망할 수 있는 곳들이지요. 물론 며칠씩 걸려서 걸어 들어 가야하는, 그야말로 신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이번 트레킹은 사가르마타를 가장 가까이 에서 볼 수 있는 칼라파타르 까지 갔다오는 코스로 걷는 날 수만 열 하루였습니다. 과연 혼자 5,500m가 넘는 곳을 아무 탈 없이 갔다 올 수 있을는지 약간은 걱정이 됐지만 고산병에 대한 대비를 어느 정도 해서일까요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루크라의 포터
이번 트레킹의 기점은 카투만두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는 히말라야 산 속의 마을 루크라 입니다. 해발 2,840m의 작은 비행장이 있는 제법 큰 동네인데 활주로가 산비탈에 만들어져서 경사져 있는 것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카투만두에서 날아온 경비행기가 내릴 때는 오르막 활주로라 안정감이 있어 보입니다만 다시 반대로 이륙할 때는 내리막 활주로를 내리꽂히듯이 달려갑니다. 마치 활주로 끝 절벽 아래로 처박기라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을 운행하는 경비행기 조종사들의 조종 실력은 가히 세계에서 제일 간다고 들 하니까 처박는 일은 없답니다.
2001년 12월15일 아침 8시 반, 루크라 공항에는 카투만두에서 소개받은 '히말라야 롯지' 주인인 셀파족 다와씨가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트레킹 하는 동안 제 짐을 들어줄 포터를 여기서 소개받기로 했거든요. 물론 오늘은 아니지만 돌아올 때는 카투만두 행 비행기가 아침 일찍 뜨기 때문에 '히말라야 롯지'에서 1박을 해야하고 또 돌아가는 비행기편의 리컨펌도 이분에게 부탁을 해야합니다.
우선 공항건물에서 아주 가까운 히말라야 롯지에 들어갔습니다만 포터는 아직 보이지 않더군요. 아랫마을에 사는 청년인데 지금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식당을 겸하고 있는 이곳에서 밀크티와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와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포터 비용은 하루에 500루피(약9,000원), 열흘을 기준으로 하여 5,000루피 인데 출발 전에 2,500루피를 지불하고 나머지 반은 트레킹이 끝난 후에 지불하는 것이 이곳의 관행이라고 합니다. 또 오늘 유숙하게 될 팍딩 마을과 내일 도착하게 되는 남체바자르 마을에서 유숙할 롯지도 자기 명함에 직접 써서 소개해 줍니다. 자기 친척들이 하는 곳인데 잘 해줄 거라면 서요.
대부분의 짐은 큰 배낭에 들어있고 다른 작은 배낭에는 먹을 물과 카메라, 그리고 신변잡화 몇 가지가 들어 있었는데 바로 트레킹 하는 동안 내가 멜 짐이지요. 물론 포터는 큰 배낭을 멥니다. 글쎄 한 20kg쯤 나갈까요?
포터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작은 배낭만 메고 먼저 떠나라고 합니다. 포터가 오면 큰 배낭을 들려 잰걸음으로 따라가면 금새 만날 거라면서요. 얼굴도 못보고 포터를 고용한 꼴이 됐습니다. 한시간 쯤이나 걸어갔을까요 정말 포터가 큰 배낭을 메고 따라 왔습니다. 반가웠지요. 18세의 아주 젊은 포터 미스터 '디르가'였습니다.
남체의 이틀
해발 3,446m 높이에 위치한 쿰부의 중심지인 '남체 바자르'- 하루반나절을 걸어서 12월 16일 오후3시쯤 드디어 트레킹의 중심지에 들어섰습니다. 쿰비율라(5,761m), 탐세루크(6,608m), 콩데리(6,187m) 등의 6,000m급 만년설을 이고 있는 설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산등성이 심한 비탈에 계단식으로 형성된 전형적인 산 마을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비로소 히말라야 깊은 산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 실감나더군요. 물론 오전에 조르살레를 지나 사가르마타 국립공원 입구에서 입장료 1,000루피를 냈기 때문에 더 그럴 겁니다.
쿰부 지역의 행정, 경제, 교역, 교통의 중심지답게 하루종일 전기도 들어오고 사방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으며, 은행과 우체국, 시장, 군부대가 있고 최근에는 사이버 까페, 당구장, 노래방도 있으니 이쯤 되면 누가 감히 히말라야 산 속 마을이라 하겠습니까? 글쎄요, 하도 많은 문명세계의 인간들이 트레킹이라는 미명아래 수없이 드나드니 여기라고 사람 사는 곳인데 어찌 변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루크라의 다와씨가 소개해준 탐세르크 뷰 롯지에 들어섰습니다. 돌로 지은 3층 건물인데 제법 커 보입니다. 퉁퉁하고 맘씨 좋게 생긴 아줌마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다와씨는 자기 삼촌이라며 차를 권합니다. 책에 고산병을 이기려면 무조건 물을 많이 마시라고 했으니까 기회만 되면 차든 물이든 많이 마셔야 합니다. 주로 밀크 티와 불랙 티라고 하는 네팔녹차를 마십니다. 물은 물론 '보일링 워터'만 마셔야 하고요. 뜨거운 물도 공짜는 아니지요. 한 컵에 25루피, 1리터 한 병에 100루피, 씻을 물 한 바케츠에 250루피(4,500원)입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값은 더 비싸지지요.
이곳 트레킹 코스에 있는 모든 롯지는 식당을 겸하고 있어서 숙식을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 아주 편합니다. 3,000미터 이상, 아니 5,100미터에 위치한 고락셉이란 곳에도 롯지가 있으니까 이 깊은 산속 오지에서 잠잘 방과 음식이 제공되는 식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식당은 대개 넓직하고 난로도 피워놓아 많은 트레커 들이 이 곳에 모여 앉아 이야기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식사를 시킬 때는 각자 묵는 방의 호수가 적힌 오더노트에 먹고싶은 음식이름을 써넣습니다. 체크아웃 할 때 이걸 보고 한꺼번에 계산하지요. 메뉴는 서양식, 네팔식, 티벳식 등 다양하게 준비돼 있어서 음식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별로 없습니다.
내일은 고도적응을 위해서 남체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합니다. 제 몸은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앞으로 5,500m를 넘게 올라가야 하니까 미리 대비를 해야지요.
포터 디르가가 제안을 합니다. 내일 아침 7시쯤 마을 위쪽에 있는 국립공원 관리본부 마당에 가면 계곡 사이로 사가르마타가 보이는데 그걸 보고 아침을 먹은 후엔 마을 뒷산을 넘어 3,900m 지점에 있는 에베레스트 뷰 호텔까지 갔다오자는 얘기지요. 고도적응을 위해서는 움직이는 것이 효과적이라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에베레스트 뷰 포인트
아침, 산길을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다 올라가니 흙으로 된 활주로가 보입니다. 지금은 비상용으로밖에 안 쓰는 샹보체(3,720m) 비행장입니다.
저 위로 에베레스트 뷰 호텔이 보입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꽤 비싼 호텔이라는데 거기 가서 차도 마시고 사가르마타(8,848m)는 물론 그 주위의 로체(8,414m), 눕체(7,861m), 그리고 쿰부지역 제일의 미봉이라는 아마다 블람(6,856m)을 조망해야겠기에 그리 올라갑니다.
고도 4,000미터 가까운 곳, 정말 명당에다 호텔을 지어 놨습니다. 뒤쪽 테라스로 가면 앞이 훤하게 트이면서 쿰부 지역의 웅장한 산군 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야말로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황홀한 정경입니다. 어느 누가 이 광경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죽하면 호텔 이름이 '에베레스트 뷰'겠습니까? 밀크 티를 한잔 마시면서 넋을 잃고 한참을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에베레스트 산을 조망 할 수 있는 뷰 포인트가 3번 있었는데 여기 만한 곳은 없었지요. 제일 첫 번째 사가르마타를 대면 할 수 있는 곳은 조르살레를 지나 남체로 가는 오르막을 조금만 올라가면 있습니다. 쿰부밸리 사이로 멀리 보입니다. 그야말로 에베레스트 지역 트레킹을 하면서 첫 대면을 하는 의미 있는 곳이지요. 두 번째는 그곳에서 좀 더 올라간 곳이고요, 세 번째 장소는 오늘 아침 일찍 갔다온 사가르마타 국립공원 관리본부 마당입니다.
앞으로 내일 가게 될 텡보체(3,860m)에서는 좀더 가깝게 볼 수 있을 겁니다.
빈 페트 병
12월 히말라야 산 속의 밤은 무척 춥습니다. 더구나 여기 사람들은 방에 난방을 하지 않으니까 방에서도 물이 얼지요. 5,000m대로 올라가면 방안의 온도가 -9도까지 내려갑니다.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낮에는 엄청난 물을 마시니까 밤에 한 두 번은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화장실이 대개는 집 밖에 있는 것이 문제지요. 침낭에서 나온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침낭 속은 30도, 침낭 밖은 영하, 이해가 되시겠지요.
작년 안나푸르나 지역 트레킹 할 때 터득한 지혜는 빈 페트병 하나면 해결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저녁에 무려 200루피(3,800원)나 주고 1리터 짜리 생수 한 병을 샀습니다. 물론 진짜 목적은 생수가 아니었지요.
이 빈 병은 트레킹 하는 동안 계속 내 작은 배낭 안에 있었습니다.
부풀은 라면봉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까 봐 준비 해간 게 몇 개 있었는데 그 중에 매운콩 라면 5개들이 한 봉지가 있었습니다. 남체에서 꺼내보니까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어서 처음엔 으아 하게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곧 기압 차 때문인 걸 알았는데 3,440m의 고도 위력이 새삼 느껴지더군요.
공기가 희박하니 산소도 평지보다는 많이 모자라는데 이곳 남체의 경우엔 64%, 이번 트레킹의 목표인 칼라파타르(5,550m)에는 산소가 평지의 50%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8,000m로 올라가면 36%로 뚝 떨어지고요.
김치, 깻잎장아찌, 누룽지 말린 것, 그리고 국산 억수녹차 등이 준비해간 비상용 보조식품이었는데 정말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텡보체 곰파
12월 18일 아침입니다. 트레킹 나흘째, 오늘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고 공기도 맑고 차가운 게 여간 좋은 날씨가 아닙니다. 히말라야 트레킹 하는 동안 내내 날씨가 이렇게 좋았는데 12월 날씨의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밤에는 매우 춥지만 해만 나면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갑니다. 그것도 트레킹 할 때 땀이 나지 않을 정도의 시원한 온도로요.
남체를 뒤로하고 텡보체(3,860m)로 향합니다. 오늘은 두드코시 강을 건너가야 하니까 계곡 아래로 내려갑니다. 숲이 아름답게 우거져 있어 경치도 좋고 길도 아주 쾌적합니다. 다리를 건너 다시 오르막 숲길을 힘겹게 한참 올라가면 언덕 위에 있는 큰 곰파가 유명한 텡보체 마을에 도착합니다. 아래 계곡에서 여기까지 고도차는 600여 미터, 오늘 트레킹은 대략 여섯 시간쯤 걸린 것 같습니다.
약간 경사진 넓은 공터 맨 위쪽에 커다란 사원이 있고 공터 주위로 몇 채의 롯지가 보입니다. 앞쪽으로는 전망이 탁 트이고 사가르마타와 로체, 눕체가 정면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남체에서 보다 훨씬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한 롯지에 들어가 방을 청하니 창문으로 사가르마타가 정면으로 보이는 방을 내줍니다. 오프시즌이라 손님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지요. 시즌에는 방 잡기가 힘들 정도라니까 오히려 12월에 오기를 잘했나 봅니다.
라마사원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저녁 예불 드리는 것도 구경하러 곰파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큰 사원이라고 해도 우리의 사찰과는 그 규모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고 이 지역에서 크다는 것이지요. 입구에는 방문자를 위한 여러 가지 안내사항이 붙어 있습니다. 안에서는 이미 예불이 진행되고 있나 봅니다.
안에 들어서니 우리네 대웅전 법당 같은 분위기입니다. 정면으로 큰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생김새나 표정이 낯설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법당 가운데에는 야트막하고 넓은 단상이 있고 그 위에 스님들이 죽 둘러앉아 예불의식을 한창 진행하고 있습니다. 단상 아래 가장자리는 방문객들이 앉을 수 있도록 기다란 방석 같은 것이 좌우로 길게 깔려 있습니다. 서양인 서너 명이 앉아있는 옆에 자리를 잡고는 한참을 구경했는데 그야말로 구경이지요. 저는 불교신자는 아니니까요. 큰북을 쉬지 않고 두드리고 간간이 긴 나팔도 불어댑니다. 물론 불경도 계속 외우면서요.
한참 후 지루하길래 부처님 앞으로 나가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내용은 뻔하지요. 우리 식구들 건강하고 하는 일 다 잘되게 하시고 또 이번 트레킹을 아무 탈 없이 잘 끝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100루피를 시주함에 넣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한 건 생전 처음입니다.
구름 만드는 사가르마타
12월 19일, 오늘도 아침은 어김없이 바람도 없이 맑고 깨끗합니다. 오늘은 4,270m 높이의 페리체 마을까지 6시간 트레킹입니다. 텡보체 마을 공터에서 다시 한번 사가르마타를 쳐다봅니다. 앞으로는 산굽이를 돌아들기 때문에 칼라파타르(5,550m)에 오를 때까지는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가르마타는 '우주 만물의 어머니'라는 뜻의 에베레스트 산의 원래 네팔 이름입니다.
사가르마타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그야말로 청명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삼각형의 뾰족한 정상은 항상 흰 구름이 날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볼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트레킹 하는 동안 볼 때마다 그러하니 아마도 사가르마타는 구름을 만들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끔은 그 옆에 있는 로체나 눕체도 그럴 때가 있지만 사가르마타 처럼 항상 구름을 만들지는 않지요. 우주 만물의 어머니답게 우리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신비한 그 무엇이 있나 봅니다.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연기 휘날리는 그 자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 심과 함께 숙연함 마저 갖게 합니다. 더구나 하늘과 맞닿아 있는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 아니겠습니까?
페리체의 이틀 - 낭카르 창
저 멀리 페리체(4,270m) 마을이 보입니다. 빙하 녹은 물이 흐르는 작은 강을 건너면 바로 마을 입구입니다. 넓디넓은 강바닥으로 만들어진 길고 광활한 분지처럼 보이는 곳에 세어보니 스무나문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대개는 트레커 들을 위한 롯지 입니다. 너무나 조용하여 마치 아무도 살고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네 밖 풀밭에는 야크 들이 여기저기 풀을 뜯고 있는 데 그들 또한 별 움직임이 없습니다. 오프시즌이라서 그럴까요, 마치 스틸사진을 보는 듯 합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첫 번째 롯지로 들어갔습니다. 문 앞에 그럴듯한 광고를 겸한 안내문 때문이었을 겁니다. 따뜻한 물, 양질의 식사, 전화 서비스, 솔라 라이팅, 인사이드 토일렛... 등 뭐 이런 것들이지요. 모두 다 제법 문화 시설 들이 아니겠습니까.
4,000m를 넘어섰지만 먹는 욕구가 조금 줄어들었다는 것 외에 고소증엔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소적응을 위해 페리체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벌써 닷새나 걸었지만 특별히 피곤하거나 이상한 데는 없는 것 같아 무척 다행이라고 여기면서요.
20일 아침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포터 디르가는 아침 먹고 위 동산이나 한번 산책하고 오자고 합니다. 윗마을 딩보체, 그리고 더 위쪽에 추쿵 마을도 보이고 멀리 마칼루(8,481m)도 보인다나요. 가만히 앉아서 하루를 보내기도 뭣해서 작은 배낭에 카메라와 물 그리고 간단한 먹을거리만 챙겨서 디르가에게 메게 하고는 언덕을 올랐습니다. 천천히 휘적휘적 꽤 높은 언덕을 다 올라가니 돌탑들이 여러 개 있고 불경을 써넣은 오색 깃발들이 어지럽게 걸려있습니다. 멀리 추쿵 마을 건너서 마칼루도 보입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우리뿐이 아니었습니다. 몇 팀이 저위 좀더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무심결에 따라갔지요. 그러나 그렇게 멀 줄 알았으면 중간에 그만 둘걸, 이제는 포기하기 어려운 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남들 다 올라가는 데 중간에 돌아내려 오기도 싫었지만 끝까지 가야겠다는 오기도 한몫 했을까요?
드디어 꼭대기입니다. 4시간 여를 올라왔으니 허기지고 숨도 찹니다. 우선 배가 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빨리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서둘러서 내려오기 시작했지요. 두 시간이나 걸려 롯지에 도착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까 그 봉우리는 해발 5,100m의 '낭카르창'이라더군요. 쉬는 날 엄청난 하드워킹을 한 셈이지요. 무려 900m의 등산이었습니다. 그것도 해발 5,000m를 넘어서 코스와는 상관없는 옆 산을 말입니다.
야크
트레킹 중에 자주 야크 캐러반을 만납니다. 대여섯 마리 혹은 여남은 마리씩 일렬로 줄을 서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말도 없이, 아무 불평도 없이 묵묵히 걸어갑니다. 그러나 이놈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좁은 산길에서 이놈들을 만나면 반드시 산 위쪽으로 비켜서서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자칫 비탈 쪽으로 비켜서면 이들이 실은 짐에 치어 산비탈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하니까요. 좁은 조교를 건널 때도 건너편에 이들이 나타나면 다 건너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놈들이 마음은 좋긴 한데 좁은 곳에서는 무조건 먼저 가려고 머리를 디미는 습성이 있다는군요.
야크는 3,000m 이상에서만 살 수 있다는데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이 깊은 산 속의 물류는 더욱 힘들었을 겁니다.
트레킹 도중에 보니까 이렇게 짐을 잔뜩 지고 고생을 하는 야크가 있는가 하면 아주 한가하게 풀을 뜯으며 편하게 지내는 야크도 있어서 포터에게 물었지요. 운이 좋아야 편한 야크로 태어나느냐고 하니까, 그의 대답이 오늘은 편한 놈이 내일은 또 짐을 지어야 한답니다. 편한 야크는 없는 거지요.
고산병
12월 21일 트레킹 이레 째, 오늘은 로부체(4,910m) 까지 가야 합니다. 별로 멀진 않지만 발걸음이 많이 느려졌고 공기도 희박해 자주 쉬느라 시간은 제법 걸립니다.
두글라(4,343m)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입니다. 롯지가 한 채 있는데 서양인 등 몇 팀이 벌써 도착해서 쉬고 있습니다. 왠지 별로 식욕이 나진 않지만 먹어두어야 합니다. 체력이 너무 떨어지면 그것도 고산병의 원인이 되니까요. 롯지를 뒤로하고 언덕위로 올라서니 넓은 광장 같은 곳에 많은 수의 초르텐이 서 있습니다. 이 돌탑들은 히말라야를 오르다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명패가 하나씩 붙어 있는데 한국사람 것도 있다고 해서 찾아볼까 하다 말았습니다. 귀찮더군요. 고산병이 온 걸까요?
로부체에 도착했습니다. 앞쪽으로 몇 채의 롯지가 있고 저쪽 냇물 건너편에도 한 채의 롯지가 있는데 유독 그곳만 방 하나에 미화 15불씩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대개 방 값이 100루피(1,800원) 안팎이었던 터라 괴이쩍었지만 일단 그리로 갔습니다. 역시 고산병이 온 걸까요? 좀 편할 것 같아 자연히 그쪽으로 갔나 봅니다. 설마 이런 심리를 이용한 고등상술은 아니겠지요. 여긴 문명 세계가 아니니까요. 시설은 지금까지의 롯지 보다는 좀 낫더군요. 하지만 방 값만큼 차이가 나진 않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내일 대망의 칼라파타르(5,550m)를 향해 가게 됩니다. 두 세시간 쯤 걸려 고락셉(5,140m)까지 간 다음 거기서 칼라파타르 정상까지 약 400m를 올라가는 것이지요.
롯지에는 우리까지 세 팀이 들었습니다. 두 팀은 오늘 칼라파타르 까지 갔다 온 네델란드와 영국인 용사들 팀인데 아무렇지도 않은 걸 보니 내일 그리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부러워 보였습니다.
식당 안은 야크 똥 말린 것을 연료로 하는 난로를 피워 따듯하지만 어두워진 밖은 무척 춥습니다. 이 곳은 화장실이 실내에 있으니까 밤에 밖에 나갈 일은 없지요. 내일은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니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칼라파타르
2001년 12월 22일 새벽 5시. 일어나서 방안 온도를 재보니 -9도입니다. 밖은 아마 -20도쯤 될 겁니다. 서둘러서 준비를 하고 6시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칼라파타르에 올라갔다가 이곳까지 다시 올 수 있거든요. 오늘은 큰 배낭은 안 갖고 가도 되니까 작은 배낭에 물과 누룽지, 육포, 캬라멜 등 비상식량과 증명사진을 찍을 카메라를 넣고 옷을 단단히 입었습니다. 추위가 보통이 아니지만 해가 뜨면 풀어질 테니 결국은 벗어야 하겠지만요.
새벽 6시 20분 어스름하게 동이 터 오고 있습니다. 돌과 흙이 범벅이 된 쿰부 빙하를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습니다. 길은 거칠기 그지없습니다. 4,500m 를 넘어서면 풀도 나무도 없습니다. 황량하기까지 하지요. 오른쪽에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눕체(7,861m)의 위용이 저를 더욱 작게 만듭니다. 온통 바위와 돌 그리고 흙이 뒤섞인 거친 길을 몇 구비 돌아 올라가니 저 아래로 고락셉의 롯지 들이 보입니다. 그 앞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있고 그 모래사장 너머로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설산 푸모리(7,165m) 아래 까맣고 자그마한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게 바로 칼라파타르(5,550m) 랍니다. 원 세상에! 하기야 7, 8천 미터 급 산에 둘러 쌓여 있으니 초라하게도 보이겠지요.
사가르마타를 가까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칼라파타르. 여기 고락셉까지 왔는데도 거대한 눕체(7,861m)에 가려 사가르마타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약 400m의 수고로운 등산을 해야지 만 비로소 그 얼굴을 보여줄 심산인 게지요. 고락셉 롯지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영 입맛이 당기지 않습니다. 확실히 고산병 증세인가 봅니다. 사람마다 그 증세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제게는 식욕부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다른 것은 아무렇지 않고 단지 식욕만 없으니 그나마 다행일까요? 계란 스프를 시켜서 억지로 마셨습니다. 이제부터 힘든 등산을 해야 하니 어쨌든 먹어야 합니다.
드디어 모래사장을 지나 봉우리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길이 훤하게 나 있어 길만 따라 가면 됩니다. 가면서 계속 누룽지를 먹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누룽지는 아무 거부감 없이 잘 들어갑니다. 오늘은 결국 누룽지로 버텨야 할까 봅니다.
저 앞에 위쪽을 보니 한사람이 올라가고 있는 게 보입니다. 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갑니다. 힘들면 쉽니다. 숨이 차니까 자주 쉬어야 합니다. 포터 디르가는 절대로 저보다 앞서 걷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바로 뒤에서 따르지요. 트레킹 하는 동안 내내 그랬습니다. 제가 쉬면 반드시 따라 쉽니다. 아마 그들의 매너인가 봅니다.
온통 검은색 거친 바위들로 된 너덜지대를 지나면 정상입니다.
2001년 12월 22일 11시쯤 드디어 5,550m의 칼라파타르 정상에 다다랐습니다. 정상은 뾰족한 바위로 돼있고 그 너머는 벼랑이라 한두 사람 서 있기도 비좁습니다.
바로 건너편 앞쪽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8,848m 우주만물의 어머니 '사가르마타'가 그 위대한 자태를 아주 가깝게 보여줍니다. 오른쪽으로는 눕체의 첨봉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밑으로는 웅장하게 흐르는 쿰부 빙하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뒤로는 눈부시게 빛나는 푸모리의 아름다운 자태가 저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일생 일대 감동의 대 파노라마 한 가운데 제가 서 있습니다.
이 순간의 감동과 느낌을 이 졸필의 글로는 도저히 더 이상 쓸 수가 없습니다. 직접 오셔서 느끼시길 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증명사진
이곳 칼라파타르에 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히말라야를 트레킹하며 감동 받는 풍광들이 너무 많아서 처음에는 그걸 사진으로 담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곧 깨달았습니다. 그 감동은 사진에는 절대로 담겨지지 않더군요. 오히려 머릿속의 남아있는 감동이 훨씬 나았습니다. 점점 사그라지긴 합니다만. 그리고는 증명사진 외에는 찍지 않기로 했지요. 이번 트레킹에서도 단 3장만 찍었습니다.
타멜거리의 스몰스타
12월 26일 다시 카투만두로 돌아왔습니다. 열 이틀만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거지요. '빌라에베레스트'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묵는 곳입니다. 여기서 인도를 여행하고 이곳에 온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이 들은 제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어디가면 어떤 음식이 싸고 맛있다는 것들도 있는데 하루는 저녁에 티벳 음식점으로 간다기에 따라나섰습니다. 카투만두의 다운타운이고 여행자들로 북적거리는 타멜 거리 중앙에 있는 어느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는데 이름은 '스몰스타'라고 합니다. 이미 아래층은 자리가 없이 손님들로 만원이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데 층계며 바닥이 정말 허름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둑한 좁은 2층 방에도 이미 손님들이 들어차 겨우 한쪽에 비집고 앉을 수 있었습니다. 미리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젊은이들은 이미 뚱바라는 술통을 하나씩 들고 빨대로 빨아 마시고 있었습니다.
우선 음식을 시키기로 하는데 저는 잘 모르니까 젊은 친구에게 맡겼습니다. 뗀뚝, 뚝바, 모모, 그리고 뚱바 뭐 이런 것 등을 시키더군요. 우선 뚱바가 하나씩 나왔습니다. 1리터쯤 되는 플라스틱 용기에 새카맣게 발효된 좁쌀이 하나가득 들어 있는데 여기에다 뜨거운 물을 붓고 한 3분 가량 기다리면 우리나라의 막걸리 같은 술이 됩니다. 이걸 빨대를 꽂아 빨아 마시는 것이지요. 마치 데운 막걸리 맛 같았습니다. 다 마시면 다시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립니다. 네 다섯 번 반복하는데 나중에는 맛이 엷어지니까 다시 새것을 시켜야 합니다.
음식이 나왔는데 수제비, 만두, 칼국수였습니다. 맛이 우리네 것과 너무나도 똑 같아서 놀랐습니다. 김치만 있다면 그야말로 한국음식입니다.
값을 보면 또 놀랍니다. 한 그릇에 20루피 혹은 25루피 인데 우리 돈으로 불과 350원 내지 400원쯤 되니까요. 그러나 사실 이 값이 네팔의 진짜 물가지요. 트레킹 코스나 한국인 상대 음식점의 물가는 거품이고요.
다들 뚱바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느라 열기가 가득합니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술집은 네팔이나 한국이나 같은가 봅니다.
정말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을 실감합니다. 그 동안 히말라야 산 속의 일은 꿈을 꾼 것일까요. 벌써 오래 전 일처럼 희미합니다. 점점 세속의 일상이 자연스러워지면서 머릿속도 어느덧 세속에 대한 반응에 민감해지고 있습니다. 이틀 후 서울로 돌아가면 더 하겠지요.
일정과 코스는, 12/15카투만두-비행기-루크라-팍딩 12/16팍딩-남체 12/17남체휴식 12/18남체-텡보체 12/19텡보체-페리체 12/20페리체휴식 12/21페리체-로부체 12/22로부체-칼라파타르-로부체 12/23로부체-텡보체 12/24텡보체-남체 12/25남체-루크라 12/26루크라-비행기-카투만두
구름 만드는 사가르마타
素 砂 김 성 수
혼자 하는 여행
히말라야에 한번 갔다오면 다시 가지 않고는 못 견디는 지독한 중독증에 걸린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작년 안나푸르나 지역으로 혼자 트레킹을 다녀 온 후 결국 올 겨울 다시 에베레스트 산을 보러 갔다 왔으니 그 말은 적어도 저에게는 진실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혼자 그 험한 곳에 간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서인지 말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사실 혼자 하는 여행이 여러모로 저에게는 맞는가 봅니다. 결국 올해에도 혼자 히말라야 설산 깊숙이 걸어 들어가 우주 만물의 어머니라는 '사가르마타'(8,848m)를 만나고 왔으니까요.
오십 몇 년을 살아오면서 이 세상에 진정으로 나 홀로의 시간과 세계를 경험한 것은 바로 히말라야의 산 속 깊은 곳에서였습니다. 정말로 자연과 나, 우주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는 곳에서 나라는 존재를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지요. 그것은 아마도 혼자 하는 여행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 봅니다.
쿰부 히말라야 - 세계 최고봉 사가르마타와 8,000m가 넘는 로체, 마칼루, 초오유로 이어지는 산맥 남쪽 일원의 지역을 말합니다. 이 산맥은 또 중국 티벳과 국경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요. 쿰부 히말라야 지역 트레킹은 칼라파타르(5,550m)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5,364m) 트레킹, 그리고 고쿄피크 트레킹 이렇게 크게 두 코스로 대별됩니다. 둘 다 사가르마타와 그밖에 7,8천m가 넘는 산군 들을 아주 가깝게 조망할 수 있는 곳들이지요. 물론 며칠씩 걸려서 걸어 들어 가야하는, 그야말로 신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이번 트레킹은 사가르마타를 가장 가까이 에서 볼 수 있는 칼라파타르 까지 갔다오는 코스로 걷는 날 수만 열 하루였습니다. 과연 혼자 5,500m가 넘는 곳을 아무 탈 없이 갔다 올 수 있을는지 약간은 걱정이 됐지만 고산병에 대한 대비를 어느 정도 해서일까요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루크라의 포터
이번 트레킹의 기점은 카투만두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는 히말라야 산 속의 마을 루크라 입니다. 해발 2,840m의 작은 비행장이 있는 제법 큰 동네인데 활주로가 산비탈에 만들어져서 경사져 있는 것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카투만두에서 날아온 경비행기가 내릴 때는 오르막 활주로라 안정감이 있어 보입니다만 다시 반대로 이륙할 때는 내리막 활주로를 내리꽂히듯이 달려갑니다. 마치 활주로 끝 절벽 아래로 처박기라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을 운행하는 경비행기 조종사들의 조종 실력은 가히 세계에서 제일 간다고 들 하니까 처박는 일은 없답니다.
2001년 12월15일 아침 8시 반, 루크라 공항에는 카투만두에서 소개받은 '히말라야 롯지' 주인인 셀파족 다와씨가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트레킹 하는 동안 제 짐을 들어줄 포터를 여기서 소개받기로 했거든요. 물론 오늘은 아니지만 돌아올 때는 카투만두 행 비행기가 아침 일찍 뜨기 때문에 '히말라야 롯지'에서 1박을 해야하고 또 돌아가는 비행기편의 리컨펌도 이분에게 부탁을 해야합니다.
우선 공항건물에서 아주 가까운 히말라야 롯지에 들어갔습니다만 포터는 아직 보이지 않더군요. 아랫마을에 사는 청년인데 지금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식당을 겸하고 있는 이곳에서 밀크티와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와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포터 비용은 하루에 500루피(약9,000원), 열흘을 기준으로 하여 5,000루피 인데 출발 전에 2,500루피를 지불하고 나머지 반은 트레킹이 끝난 후에 지불하는 것이 이곳의 관행이라고 합니다. 또 오늘 유숙하게 될 팍딩 마을과 내일 도착하게 되는 남체바자르 마을에서 유숙할 롯지도 자기 명함에 직접 써서 소개해 줍니다. 자기 친척들이 하는 곳인데 잘 해줄 거라면 서요.
대부분의 짐은 큰 배낭에 들어있고 다른 작은 배낭에는 먹을 물과 카메라, 그리고 신변잡화 몇 가지가 들어 있었는데 바로 트레킹 하는 동안 내가 멜 짐이지요. 물론 포터는 큰 배낭을 멥니다. 글쎄 한 20kg쯤 나갈까요?
포터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작은 배낭만 메고 먼저 떠나라고 합니다. 포터가 오면 큰 배낭을 들려 잰걸음으로 따라가면 금새 만날 거라면서요. 얼굴도 못보고 포터를 고용한 꼴이 됐습니다. 한시간 쯤이나 걸어갔을까요 정말 포터가 큰 배낭을 메고 따라 왔습니다. 반가웠지요. 18세의 아주 젊은 포터 미스터 '디르가'였습니다.
남체의 이틀
해발 3,446m 높이에 위치한 쿰부의 중심지인 '남체 바자르'- 하루반나절을 걸어서 12월 16일 오후3시쯤 드디어 트레킹의 중심지에 들어섰습니다. 쿰비율라(5,761m), 탐세루크(6,608m), 콩데리(6,187m) 등의 6,000m급 만년설을 이고 있는 설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산등성이 심한 비탈에 계단식으로 형성된 전형적인 산 마을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비로소 히말라야 깊은 산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 실감나더군요. 물론 오전에 조르살레를 지나 사가르마타 국립공원 입구에서 입장료 1,000루피를 냈기 때문에 더 그럴 겁니다.
쿰부 지역의 행정, 경제, 교역, 교통의 중심지답게 하루종일 전기도 들어오고 사방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으며, 은행과 우체국, 시장, 군부대가 있고 최근에는 사이버 까페, 당구장, 노래방도 있으니 이쯤 되면 누가 감히 히말라야 산 속 마을이라 하겠습니까? 글쎄요, 하도 많은 문명세계의 인간들이 트레킹이라는 미명아래 수없이 드나드니 여기라고 사람 사는 곳인데 어찌 변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루크라의 다와씨가 소개해준 탐세르크 뷰 롯지에 들어섰습니다. 돌로 지은 3층 건물인데 제법 커 보입니다. 퉁퉁하고 맘씨 좋게 생긴 아줌마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다와씨는 자기 삼촌이라며 차를 권합니다. 책에 고산병을 이기려면 무조건 물을 많이 마시라고 했으니까 기회만 되면 차든 물이든 많이 마셔야 합니다. 주로 밀크 티와 불랙 티라고 하는 네팔녹차를 마십니다. 물은 물론 '보일링 워터'만 마셔야 하고요. 뜨거운 물도 공짜는 아니지요. 한 컵에 25루피, 1리터 한 병에 100루피, 씻을 물 한 바케츠에 250루피(4,500원)입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값은 더 비싸지지요.
이곳 트레킹 코스에 있는 모든 롯지는 식당을 겸하고 있어서 숙식을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 아주 편합니다. 3,000미터 이상, 아니 5,100미터에 위치한 고락셉이란 곳에도 롯지가 있으니까 이 깊은 산속 오지에서 잠잘 방과 음식이 제공되는 식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식당은 대개 넓직하고 난로도 피워놓아 많은 트레커 들이 이 곳에 모여 앉아 이야기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식사를 시킬 때는 각자 묵는 방의 호수가 적힌 오더노트에 먹고싶은 음식이름을 써넣습니다. 체크아웃 할 때 이걸 보고 한꺼번에 계산하지요. 메뉴는 서양식, 네팔식, 티벳식 등 다양하게 준비돼 있어서 음식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별로 없습니다.
내일은 고도적응을 위해서 남체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합니다. 제 몸은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앞으로 5,500m를 넘게 올라가야 하니까 미리 대비를 해야지요.
포터 디르가가 제안을 합니다. 내일 아침 7시쯤 마을 위쪽에 있는 국립공원 관리본부 마당에 가면 계곡 사이로 사가르마타가 보이는데 그걸 보고 아침을 먹은 후엔 마을 뒷산을 넘어 3,900m 지점에 있는 에베레스트 뷰 호텔까지 갔다오자는 얘기지요. 고도적응을 위해서는 움직이는 것이 효과적이라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에베레스트 뷰 포인트
아침, 산길을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다 올라가니 흙으로 된 활주로가 보입니다. 지금은 비상용으로밖에 안 쓰는 샹보체(3,720m) 비행장입니다.
저 위로 에베레스트 뷰 호텔이 보입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꽤 비싼 호텔이라는데 거기 가서 차도 마시고 사가르마타(8,848m)는 물론 그 주위의 로체(8,414m), 눕체(7,861m), 그리고 쿰부지역 제일의 미봉이라는 아마다 블람(6,856m)을 조망해야겠기에 그리 올라갑니다.
고도 4,000미터 가까운 곳, 정말 명당에다 호텔을 지어 놨습니다. 뒤쪽 테라스로 가면 앞이 훤하게 트이면서 쿰부 지역의 웅장한 산군 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야말로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황홀한 정경입니다. 어느 누가 이 광경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죽하면 호텔 이름이 '에베레스트 뷰'겠습니까? 밀크 티를 한잔 마시면서 넋을 잃고 한참을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에베레스트 산을 조망 할 수 있는 뷰 포인트가 3번 있었는데 여기 만한 곳은 없었지요. 제일 첫 번째 사가르마타를 대면 할 수 있는 곳은 조르살레를 지나 남체로 가는 오르막을 조금만 올라가면 있습니다. 쿰부밸리 사이로 멀리 보입니다. 그야말로 에베레스트 지역 트레킹을 하면서 첫 대면을 하는 의미 있는 곳이지요. 두 번째는 그곳에서 좀 더 올라간 곳이고요, 세 번째 장소는 오늘 아침 일찍 갔다온 사가르마타 국립공원 관리본부 마당입니다.
앞으로 내일 가게 될 텡보체(3,860m)에서는 좀더 가깝게 볼 수 있을 겁니다.
빈 페트 병
12월 히말라야 산 속의 밤은 무척 춥습니다. 더구나 여기 사람들은 방에 난방을 하지 않으니까 방에서도 물이 얼지요. 5,000m대로 올라가면 방안의 온도가 -9도까지 내려갑니다.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낮에는 엄청난 물을 마시니까 밤에 한 두 번은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화장실이 대개는 집 밖에 있는 것이 문제지요. 침낭에서 나온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침낭 속은 30도, 침낭 밖은 영하, 이해가 되시겠지요.
작년 안나푸르나 지역 트레킹 할 때 터득한 지혜는 빈 페트병 하나면 해결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저녁에 무려 200루피(3,800원)나 주고 1리터 짜리 생수 한 병을 샀습니다. 물론 진짜 목적은 생수가 아니었지요.
이 빈 병은 트레킹 하는 동안 계속 내 작은 배낭 안에 있었습니다.
부풀은 라면봉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까 봐 준비 해간 게 몇 개 있었는데 그 중에 매운콩 라면 5개들이 한 봉지가 있었습니다. 남체에서 꺼내보니까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어서 처음엔 으아 하게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곧 기압 차 때문인 걸 알았는데 3,440m의 고도 위력이 새삼 느껴지더군요.
공기가 희박하니 산소도 평지보다는 많이 모자라는데 이곳 남체의 경우엔 64%, 이번 트레킹의 목표인 칼라파타르(5,550m)에는 산소가 평지의 50%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8,000m로 올라가면 36%로 뚝 떨어지고요.
김치, 깻잎장아찌, 누룽지 말린 것, 그리고 국산 억수녹차 등이 준비해간 비상용 보조식품이었는데 정말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텡보체 곰파
12월 18일 아침입니다. 트레킹 나흘째, 오늘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고 공기도 맑고 차가운 게 여간 좋은 날씨가 아닙니다. 히말라야 트레킹 하는 동안 내내 날씨가 이렇게 좋았는데 12월 날씨의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밤에는 매우 춥지만 해만 나면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갑니다. 그것도 트레킹 할 때 땀이 나지 않을 정도의 시원한 온도로요.
남체를 뒤로하고 텡보체(3,860m)로 향합니다. 오늘은 두드코시 강을 건너가야 하니까 계곡 아래로 내려갑니다. 숲이 아름답게 우거져 있어 경치도 좋고 길도 아주 쾌적합니다. 다리를 건너 다시 오르막 숲길을 힘겹게 한참 올라가면 언덕 위에 있는 큰 곰파가 유명한 텡보체 마을에 도착합니다. 아래 계곡에서 여기까지 고도차는 600여 미터, 오늘 트레킹은 대략 여섯 시간쯤 걸린 것 같습니다.
약간 경사진 넓은 공터 맨 위쪽에 커다란 사원이 있고 공터 주위로 몇 채의 롯지가 보입니다. 앞쪽으로는 전망이 탁 트이고 사가르마타와 로체, 눕체가 정면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남체에서 보다 훨씬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한 롯지에 들어가 방을 청하니 창문으로 사가르마타가 정면으로 보이는 방을 내줍니다. 오프시즌이라 손님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지요. 시즌에는 방 잡기가 힘들 정도라니까 오히려 12월에 오기를 잘했나 봅니다.
라마사원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저녁 예불 드리는 것도 구경하러 곰파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큰 사원이라고 해도 우리의 사찰과는 그 규모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고 이 지역에서 크다는 것이지요. 입구에는 방문자를 위한 여러 가지 안내사항이 붙어 있습니다. 안에서는 이미 예불이 진행되고 있나 봅니다.
안에 들어서니 우리네 대웅전 법당 같은 분위기입니다. 정면으로 큰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생김새나 표정이 낯설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법당 가운데에는 야트막하고 넓은 단상이 있고 그 위에 스님들이 죽 둘러앉아 예불의식을 한창 진행하고 있습니다. 단상 아래 가장자리는 방문객들이 앉을 수 있도록 기다란 방석 같은 것이 좌우로 길게 깔려 있습니다. 서양인 서너 명이 앉아있는 옆에 자리를 잡고는 한참을 구경했는데 그야말로 구경이지요. 저는 불교신자는 아니니까요. 큰북을 쉬지 않고 두드리고 간간이 긴 나팔도 불어댑니다. 물론 불경도 계속 외우면서요.
한참 후 지루하길래 부처님 앞으로 나가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내용은 뻔하지요. 우리 식구들 건강하고 하는 일 다 잘되게 하시고 또 이번 트레킹을 아무 탈 없이 잘 끝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100루피를 시주함에 넣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한 건 생전 처음입니다.
구름 만드는 사가르마타
12월 19일, 오늘도 아침은 어김없이 바람도 없이 맑고 깨끗합니다. 오늘은 4,270m 높이의 페리체 마을까지 6시간 트레킹입니다. 텡보체 마을 공터에서 다시 한번 사가르마타를 쳐다봅니다. 앞으로는 산굽이를 돌아들기 때문에 칼라파타르(5,550m)에 오를 때까지는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가르마타는 '우주 만물의 어머니'라는 뜻의 에베레스트 산의 원래 네팔 이름입니다.
사가르마타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그야말로 청명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삼각형의 뾰족한 정상은 항상 흰 구름이 날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볼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트레킹 하는 동안 볼 때마다 그러하니 아마도 사가르마타는 구름을 만들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끔은 그 옆에 있는 로체나 눕체도 그럴 때가 있지만 사가르마타 처럼 항상 구름을 만들지는 않지요. 우주 만물의 어머니답게 우리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신비한 그 무엇이 있나 봅니다.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연기 휘날리는 그 자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 심과 함께 숙연함 마저 갖게 합니다. 더구나 하늘과 맞닿아 있는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 아니겠습니까?
페리체의 이틀 - 낭카르 창
저 멀리 페리체(4,270m) 마을이 보입니다. 빙하 녹은 물이 흐르는 작은 강을 건너면 바로 마을 입구입니다. 넓디넓은 강바닥으로 만들어진 길고 광활한 분지처럼 보이는 곳에 세어보니 스무나문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대개는 트레커 들을 위한 롯지 입니다. 너무나 조용하여 마치 아무도 살고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네 밖 풀밭에는 야크 들이 여기저기 풀을 뜯고 있는 데 그들 또한 별 움직임이 없습니다. 오프시즌이라서 그럴까요, 마치 스틸사진을 보는 듯 합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첫 번째 롯지로 들어갔습니다. 문 앞에 그럴듯한 광고를 겸한 안내문 때문이었을 겁니다. 따뜻한 물, 양질의 식사, 전화 서비스, 솔라 라이팅, 인사이드 토일렛... 등 뭐 이런 것들이지요. 모두 다 제법 문화 시설 들이 아니겠습니까.
4,000m를 넘어섰지만 먹는 욕구가 조금 줄어들었다는 것 외에 고소증엔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소적응을 위해 페리체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벌써 닷새나 걸었지만 특별히 피곤하거나 이상한 데는 없는 것 같아 무척 다행이라고 여기면서요.
20일 아침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포터 디르가는 아침 먹고 위 동산이나 한번 산책하고 오자고 합니다. 윗마을 딩보체, 그리고 더 위쪽에 추쿵 마을도 보이고 멀리 마칼루(8,481m)도 보인다나요. 가만히 앉아서 하루를 보내기도 뭣해서 작은 배낭에 카메라와 물 그리고 간단한 먹을거리만 챙겨서 디르가에게 메게 하고는 언덕을 올랐습니다. 천천히 휘적휘적 꽤 높은 언덕을 다 올라가니 돌탑들이 여러 개 있고 불경을 써넣은 오색 깃발들이 어지럽게 걸려있습니다. 멀리 추쿵 마을 건너서 마칼루도 보입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우리뿐이 아니었습니다. 몇 팀이 저위 좀더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무심결에 따라갔지요. 그러나 그렇게 멀 줄 알았으면 중간에 그만 둘걸, 이제는 포기하기 어려운 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남들 다 올라가는 데 중간에 돌아내려 오기도 싫었지만 끝까지 가야겠다는 오기도 한몫 했을까요?
드디어 꼭대기입니다. 4시간 여를 올라왔으니 허기지고 숨도 찹니다. 우선 배가 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빨리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서둘러서 내려오기 시작했지요. 두 시간이나 걸려 롯지에 도착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까 그 봉우리는 해발 5,100m의 '낭카르창'이라더군요. 쉬는 날 엄청난 하드워킹을 한 셈이지요. 무려 900m의 등산이었습니다. 그것도 해발 5,000m를 넘어서 코스와는 상관없는 옆 산을 말입니다.
야크
트레킹 중에 자주 야크 캐러반을 만납니다. 대여섯 마리 혹은 여남은 마리씩 일렬로 줄을 서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말도 없이, 아무 불평도 없이 묵묵히 걸어갑니다. 그러나 이놈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좁은 산길에서 이놈들을 만나면 반드시 산 위쪽으로 비켜서서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자칫 비탈 쪽으로 비켜서면 이들이 실은 짐에 치어 산비탈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하니까요. 좁은 조교를 건널 때도 건너편에 이들이 나타나면 다 건너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놈들이 마음은 좋긴 한데 좁은 곳에서는 무조건 먼저 가려고 머리를 디미는 습성이 있다는군요.
야크는 3,000m 이상에서만 살 수 있다는데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이 깊은 산 속의 물류는 더욱 힘들었을 겁니다.
트레킹 도중에 보니까 이렇게 짐을 잔뜩 지고 고생을 하는 야크가 있는가 하면 아주 한가하게 풀을 뜯으며 편하게 지내는 야크도 있어서 포터에게 물었지요. 운이 좋아야 편한 야크로 태어나느냐고 하니까, 그의 대답이 오늘은 편한 놈이 내일은 또 짐을 지어야 한답니다. 편한 야크는 없는 거지요.
고산병
12월 21일 트레킹 이레 째, 오늘은 로부체(4,910m) 까지 가야 합니다. 별로 멀진 않지만 발걸음이 많이 느려졌고 공기도 희박해 자주 쉬느라 시간은 제법 걸립니다.
두글라(4,343m)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입니다. 롯지가 한 채 있는데 서양인 등 몇 팀이 벌써 도착해서 쉬고 있습니다. 왠지 별로 식욕이 나진 않지만 먹어두어야 합니다. 체력이 너무 떨어지면 그것도 고산병의 원인이 되니까요. 롯지를 뒤로하고 언덕위로 올라서니 넓은 광장 같은 곳에 많은 수의 초르텐이 서 있습니다. 이 돌탑들은 히말라야를 오르다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명패가 하나씩 붙어 있는데 한국사람 것도 있다고 해서 찾아볼까 하다 말았습니다. 귀찮더군요. 고산병이 온 걸까요?
로부체에 도착했습니다. 앞쪽으로 몇 채의 롯지가 있고 저쪽 냇물 건너편에도 한 채의 롯지가 있는데 유독 그곳만 방 하나에 미화 15불씩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대개 방 값이 100루피(1,800원) 안팎이었던 터라 괴이쩍었지만 일단 그리로 갔습니다. 역시 고산병이 온 걸까요? 좀 편할 것 같아 자연히 그쪽으로 갔나 봅니다. 설마 이런 심리를 이용한 고등상술은 아니겠지요. 여긴 문명 세계가 아니니까요. 시설은 지금까지의 롯지 보다는 좀 낫더군요. 하지만 방 값만큼 차이가 나진 않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내일 대망의 칼라파타르(5,550m)를 향해 가게 됩니다. 두 세시간 쯤 걸려 고락셉(5,140m)까지 간 다음 거기서 칼라파타르 정상까지 약 400m를 올라가는 것이지요.
롯지에는 우리까지 세 팀이 들었습니다. 두 팀은 오늘 칼라파타르 까지 갔다 온 네델란드와 영국인 용사들 팀인데 아무렇지도 않은 걸 보니 내일 그리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부러워 보였습니다.
식당 안은 야크 똥 말린 것을 연료로 하는 난로를 피워 따듯하지만 어두워진 밖은 무척 춥습니다. 이 곳은 화장실이 실내에 있으니까 밤에 밖에 나갈 일은 없지요. 내일은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니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칼라파타르
2001년 12월 22일 새벽 5시. 일어나서 방안 온도를 재보니 -9도입니다. 밖은 아마 -20도쯤 될 겁니다. 서둘러서 준비를 하고 6시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칼라파타르에 올라갔다가 이곳까지 다시 올 수 있거든요. 오늘은 큰 배낭은 안 갖고 가도 되니까 작은 배낭에 물과 누룽지, 육포, 캬라멜 등 비상식량과 증명사진을 찍을 카메라를 넣고 옷을 단단히 입었습니다. 추위가 보통이 아니지만 해가 뜨면 풀어질 테니 결국은 벗어야 하겠지만요.
새벽 6시 20분 어스름하게 동이 터 오고 있습니다. 돌과 흙이 범벅이 된 쿰부 빙하를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습니다. 길은 거칠기 그지없습니다. 4,500m 를 넘어서면 풀도 나무도 없습니다. 황량하기까지 하지요. 오른쪽에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눕체(7,861m)의 위용이 저를 더욱 작게 만듭니다. 온통 바위와 돌 그리고 흙이 뒤섞인 거친 길을 몇 구비 돌아 올라가니 저 아래로 고락셉의 롯지 들이 보입니다. 그 앞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있고 그 모래사장 너머로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설산 푸모리(7,165m) 아래 까맣고 자그마한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게 바로 칼라파타르(5,550m) 랍니다. 원 세상에! 하기야 7, 8천 미터 급 산에 둘러 쌓여 있으니 초라하게도 보이겠지요.
사가르마타를 가까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칼라파타르. 여기 고락셉까지 왔는데도 거대한 눕체(7,861m)에 가려 사가르마타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약 400m의 수고로운 등산을 해야지 만 비로소 그 얼굴을 보여줄 심산인 게지요. 고락셉 롯지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영 입맛이 당기지 않습니다. 확실히 고산병 증세인가 봅니다. 사람마다 그 증세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제게는 식욕부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다른 것은 아무렇지 않고 단지 식욕만 없으니 그나마 다행일까요? 계란 스프를 시켜서 억지로 마셨습니다. 이제부터 힘든 등산을 해야 하니 어쨌든 먹어야 합니다.
드디어 모래사장을 지나 봉우리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길이 훤하게 나 있어 길만 따라 가면 됩니다. 가면서 계속 누룽지를 먹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누룽지는 아무 거부감 없이 잘 들어갑니다. 오늘은 결국 누룽지로 버텨야 할까 봅니다.
저 앞에 위쪽을 보니 한사람이 올라가고 있는 게 보입니다. 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갑니다. 힘들면 쉽니다. 숨이 차니까 자주 쉬어야 합니다. 포터 디르가는 절대로 저보다 앞서 걷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바로 뒤에서 따르지요. 트레킹 하는 동안 내내 그랬습니다. 제가 쉬면 반드시 따라 쉽니다. 아마 그들의 매너인가 봅니다.
온통 검은색 거친 바위들로 된 너덜지대를 지나면 정상입니다.
2001년 12월 22일 11시쯤 드디어 5,550m의 칼라파타르 정상에 다다랐습니다. 정상은 뾰족한 바위로 돼있고 그 너머는 벼랑이라 한두 사람 서 있기도 비좁습니다.
바로 건너편 앞쪽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8,848m 우주만물의 어머니 '사가르마타'가 그 위대한 자태를 아주 가깝게 보여줍니다. 오른쪽으로는 눕체의 첨봉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밑으로는 웅장하게 흐르는 쿰부 빙하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뒤로는 눈부시게 빛나는 푸모리의 아름다운 자태가 저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일생 일대 감동의 대 파노라마 한 가운데 제가 서 있습니다.
이 순간의 감동과 느낌을 이 졸필의 글로는 도저히 더 이상 쓸 수가 없습니다. 직접 오셔서 느끼시길 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증명사진
이곳 칼라파타르에 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히말라야를 트레킹하며 감동 받는 풍광들이 너무 많아서 처음에는 그걸 사진으로 담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곧 깨달았습니다. 그 감동은 사진에는 절대로 담겨지지 않더군요. 오히려 머릿속의 남아있는 감동이 훨씬 나았습니다. 점점 사그라지긴 합니다만. 그리고는 증명사진 외에는 찍지 않기로 했지요. 이번 트레킹에서도 단 3장만 찍었습니다.
타멜거리의 스몰스타
12월 26일 다시 카투만두로 돌아왔습니다. 열 이틀만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거지요. '빌라에베레스트'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묵는 곳입니다. 여기서 인도를 여행하고 이곳에 온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이 들은 제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어디가면 어떤 음식이 싸고 맛있다는 것들도 있는데 하루는 저녁에 티벳 음식점으로 간다기에 따라나섰습니다. 카투만두의 다운타운이고 여행자들로 북적거리는 타멜 거리 중앙에 있는 어느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는데 이름은 '스몰스타'라고 합니다. 이미 아래층은 자리가 없이 손님들로 만원이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데 층계며 바닥이 정말 허름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둑한 좁은 2층 방에도 이미 손님들이 들어차 겨우 한쪽에 비집고 앉을 수 있었습니다. 미리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젊은이들은 이미 뚱바라는 술통을 하나씩 들고 빨대로 빨아 마시고 있었습니다.
우선 음식을 시키기로 하는데 저는 잘 모르니까 젊은 친구에게 맡겼습니다. 뗀뚝, 뚝바, 모모, 그리고 뚱바 뭐 이런 것 등을 시키더군요. 우선 뚱바가 하나씩 나왔습니다. 1리터쯤 되는 플라스틱 용기에 새카맣게 발효된 좁쌀이 하나가득 들어 있는데 여기에다 뜨거운 물을 붓고 한 3분 가량 기다리면 우리나라의 막걸리 같은 술이 됩니다. 이걸 빨대를 꽂아 빨아 마시는 것이지요. 마치 데운 막걸리 맛 같았습니다. 다 마시면 다시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립니다. 네 다섯 번 반복하는데 나중에는 맛이 엷어지니까 다시 새것을 시켜야 합니다.
음식이 나왔는데 수제비, 만두, 칼국수였습니다. 맛이 우리네 것과 너무나도 똑 같아서 놀랐습니다. 김치만 있다면 그야말로 한국음식입니다.
값을 보면 또 놀랍니다. 한 그릇에 20루피 혹은 25루피 인데 우리 돈으로 불과 350원 내지 400원쯤 되니까요. 그러나 사실 이 값이 네팔의 진짜 물가지요. 트레킹 코스나 한국인 상대 음식점의 물가는 거품이고요.
다들 뚱바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느라 열기가 가득합니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술집은 네팔이나 한국이나 같은가 봅니다.
정말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을 실감합니다. 그 동안 히말라야 산 속의 일은 꿈을 꾼 것일까요. 벌써 오래 전 일처럼 희미합니다. 점점 세속의 일상이 자연스러워지면서 머릿속도 어느덧 세속에 대한 반응에 민감해지고 있습니다. 이틀 후 서울로 돌아가면 더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