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나오는 '월계동 친구'는 민 병훈임을 밝혀둠.
사중 추돌 사고
날씨가 풀려 나른한 날이 계속되다가 봄 비가 촉촉히 내리던 1984년 봄 어느 날,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퇴근하던 길이었다.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이 있어 저녁식사에 곁들여 맥주까지 한 잔 마시고 운전하던 빗길이어서 특히 조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회사를 떠났다. 당시 직장이 있던 화양동에서 수유동 집을 향하여 동1로를 따라 망우로를 지나쳐 북쪽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꽝”하는 굉음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내가 졸았구나, 이건 사고다, 어떻게 사고가 난 걸까, 이런 생각들이 순간적으로 한꺼번에 머리를 스쳤다. 이미 어둠이 깔려 밖은 잘 보이지않았으나 앞 택시에 탔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기웃거리는 어수선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고 순간 앞으로 밀려 잘 움직여지지 않는 의자에서 간신히 몸을 빼내어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끈적끈적한 액체가 얼굴을 뒤 덮고 흘러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막았으나 금새 손수건이 흥건히 젖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닦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수건으로 이마를 누른 채 밖으로 나왔다.
길 가던 사람이 응급차를 부르라고 화급히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사고 수습보다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피가 문제였다. 머리를 들어 거리를 살펴보니 병원을 표시하는 녹색 십자 네온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병원을 향해 뛰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즉시 압박붕대로 머리 전체를 싸매고 응급처치를 한 다음 큰 병원으로 옮겨야 된다며 응급차를 불렀다.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교통사고로 조금 다쳐서 병원으로 갔다는 얘기만 전해달라고 간호사에게 부탁하고 실려간 곳이 경희대학부속병원이었다..
응급실 당직 의사들이 돌아가며 구토증이 없었는지 불빛이 보이는지를 물어왔다. 시간이 좀 흐른 후 월계동에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친구가 헐레벌떡 도착하였다. 아내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왔다는 거였다. 그 친구도 첫마디가 토하지 않았냐는 질문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속이 울렁거리며 참을 수 없는 구토증이 일었다. 결국은 응급실에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그리고도 두 차례나 더 심한 구토증으로 쓴 물까지 토했다. 그 친구는 내 옆에 꼭 붙어 서서 이것 저것 쓸데없는 이야기를 계속 물어댔다.
정신없이 달려 온 아내가 도착하고, 친구는 입원할 병실을 알아보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특실에 입원수속을 마치고, 이동 침대에 실려 병실로 옮겨지고, 동네 가까이 지내던 이웃들이 도착하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시간이 흘렀다. 일생에서 가장 큰 사고를 낸 나는 아픈 내색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이마에 박힌 유리를 제거하는, 6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마치 이마가 걸레처럼 찢기어졌다는 사실도 나중에 담당의사에게서 들어서 알았다. 교차로에 신호를 대기하고 서있던 택시를 추돌하여 사중 추돌사고를 냈다는 말도, 사고 때 가슴과 이마로 운전대를 들이받아 부러지면서 앞 유리에 부딪쳐 큰 상처가 났다는 사실도, 조금만 더 심했으면 실명할 위기였다는 것도, 모두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된 뒤에 들어서 알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뇌에 손상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의사인 친구를 긴장시켰다 했다. 충격으로 뇌가 손상되면 구토증을 일으키게 된다는 걸 잘 알고있는 그 친구가 내 구토증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나와 아내는 그런 상식이 없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긴장이 줄어들어 갔다. 비록 코와 입을 남겨 놓은 채 머리 전체를 싸매어 한심한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서 숨쉰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뇌에 큰 손상을 입어 친구 하나를 잃은 줄 알았다고 나중에서야 실토했다. 다행스럽게 뇌에 이상 증상이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이마 위에 생긴 큰 흉터는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내 차에 받힌 앞차 석대에는 부상을 입은 사람이 없어 병원에 들렀다가 그 날로 모두 집으로 돌아 갔다 했다. 경찰에서도 현장 조사와 더불어 병원에 누워있는 나를 찾아와 몇 가지 심문을 하고는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어찌 된 일인지 사고 당시 술을 먹었다는 사실은 거론도 하지않고 지나갔다. 보험에 가입한 덕택으로 금전적인 손해도 별로 없었다. 사고를 일으킨 것에 대한 도로교통법 상 범칙금을 납부한 게 유일한 부담이었을 게다.
그러나 심적으로는 부담이 컸다. 먼저 이런 사고를 일으켜서 가까운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회사도 못 나가 동료들에게도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한 열흘 정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받는 동안 여러 친구 친지 친척들이 문안을 오는 바람에 면목은 없었지만 고맙기도 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밤 시간에는 왜 이런 사고가 났을까 혼자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 날 저녁 마신 맥주가 문제였을까? 퇴근 길 운전이 걱정되어 맥주도 한 잔으로 자제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술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은 아닐 듯 싶었다. 졸음이 문제였을까? 사고 순간 졸았던 게 확실하니까 사고의 직접 원인은 졸음이라 할 수 있었지만, 늦지도 않은 그 시간 왜 운전하면서 졸게 되었을까, 이것이 문제였다.
회사 일로 피로했을 수도, 봄이 되어 나른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운전에 대한 내 해이된 정신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운전 면허를 받기는 했지만 실제 운전을 하지는 않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다시 면허를 받아 운전을 시작한지 꼭 두 해 만에 그 사고는 일어났다.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 그 긴장과 의식이 유지되었다면 운전 중에 졸려고 노력해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운전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방심하게 되었고 이런 내 마음의 해이가 사고의 원인이 된 듯 싶었다.
또 한가지 생각난 사실은 사고 당시 안전 벨트를 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안전벨트만 맸더라도 그 정도 사고로는 내가 이렇게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을 듯 싶다. 모든 게 부주의의 결과라는 결론밖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운전 초년병 시절에 나는 뼈 아픈 체험을 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비록 준수한 생김새는 아니더라도 부모님에게서 받은 깨끗한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흉한 흉터를 남기고 말았다. 하마터면 뇌를 다쳤을 수도, 아니면 실명했을 수도 있었던 위기의 상황이기도 했다. 만일 이런 치명적인 결과가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정상인으로 살지도 못할 뻔한 정말 평생 잊지 못할 사고였다.
그 뒤 나는 우스개 소리로 죽을 때까지 운전하면서 졸 일은 없다고 말했다.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이마의 흉터를 쳐다보며 어떻게 감히 다시 졸 수가 있겠냐고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그리고 안전 벨트 매지 않고 운전할 리도 없다고 했다. 더 중요한 건 술 먹고는 절대로 운전대를 잡지 않으리란 생각도 했다. 다시 한번 이런 사고를 일으킨다면 그 때는 치명적인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언제나 철저히 지키지는 못 하였다. 특히 술 한 잔이라도 마시면 결코 운전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생각처럼 지켜지지 않았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는 술자리에는 아예 차를 가지고 가지 않는 습관을 들였다.
한번은 차를 운전해서 다녀 오는 지방 출장 길에 고속도로를 주행하고 있었다. 뒤가 시끄러워 후사경을 보니 교통경찰 백차가 경적을 울리며 내 차를 세우라는 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못한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일까 투덜거리며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러나 내 차를 세운 그 경찰은 무슨 뜻인지 손짓을 해가며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나는 잠시 무슨 일인가 생각하다가 혹시 내가 깜빡 졸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 따라 오던 경찰이 앞 차의 궤적을 보고 아마 운전자가 졸고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도 순간적으로 졸았던 게 아닌지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피곤했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떠나려 했지만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졸음 때문에 삶을 망칠 뻔한 생생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또 한번 큰 사고를 낼 뻔한 체험이었다.
이렇게 큰 사고를 일으키고도 아직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정말 큰 일이다. 내가 일으킨 교통사고를 거울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사고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내 사고 경험을 여러 사람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해왔지만, 막상 돌이켜 보면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인 나 자신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지나친 위험한 순간이 셀 수 없이 많다. 사고가 오래되어 그 놀랍던 기억이 희미해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 나이가 더 많아져도 살아서 움직이는 한 운전을 하지않을 도리는 없을 게다. 그러니 다른 일은 잊더라도 이 일만은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아직도 뚜렷한 이마의 상처를 만져보며 다시 한번 사고 순간을 상기해 본다.
( 2001. 11. 22.)
(에필로그) 이 글을 읽어본 아내가 다음 얘기는 이 글 어딘가에 꼭 들어가야 된다고 우긴다. 그런데 비집고 넣을 마땅한 자리가 없어 여기 따로 붙인다. 내 간곡한 부탁을 무시한 경망스러운 간호사의 전화가 빚은 해프닝이다. 물론 내가 사고를 내지 않았으면 생길 수 없었던 해프닝이었지만… 여기 아내가 들려준 얘기를 그대로 옮긴다.
어머님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한가하게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한 병근씨 댁인가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우선 당황했다. “여기 병원인데요, 교통사고로 한 병근씨가 여기 들어왔는데요, 상태가 위급하여 경희대 병원으로 옮겼으니 빨리 가보세요.”하고는 전화가 “뚝” 끊겼다. 동시 내 마음도 “덜컥” 내려 앉았다. 졸지에 청천벽력 같은 전화를 받은 나는 온 몸에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듯 진공상태가 되었다. 한동안 꼼짝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갑자기 남편 친구 민 박사가 떠올랐다. 무슨 정신으로 찾았는지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어 사고 소식을 전했다. 입었던 옷 갈아 입을 정신도 없이 그 길로 택시를 잡아 탔다. 병원으로 향했다. “제발 살려만 주셔요, 하느님, 제발 살려 주셔요”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했다. 온갖 불길한 생각이 꿈틀거리며 생각을 흩어 놓았다.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이 몰려왔다. 기도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일순 모든 생각이 정지되었다, 온갖 불안함이 엄습했다, 도무지 내 생각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병원에 이르렀는지 나도 모른다. 응급실 문을 열고 불안한 눈으로 남편을 찾았다. 문득 민박사가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병상으로 다가갔다. 머리를 온통 붕대로 휘 감은 채 병상에 누워 민 박사와 얘기하고 있는 남편을 보자 막상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 때 그 웃음의 의미는, 나도,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 2001.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