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 들어와 정확하게 말해 1993년 금호갤러 리에서의 개인전서부터 박 항률의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필자가 붙인 본 평문의 제목을 이해하리라 믿는다."성장을 멈춰버린"의 속뜻엔 기실, 작 가가 지향하는 작품 속의 남녀(男女),혹은 혼성(混成) 같은 인물들에 서려있는 청년기의 (adolesent) 모습과, 이제는 중년기를 웃돌려는 작가 박항률의 실제 나이의 모습에서 발생하는 이상야릇한 혼돈의 차이를 표 현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현실로서의 삶과 문명의 발전사적 (發展史的) 무게에 대한 거 부 의 몸짓으로 성장을 멈춰버린 아이의 우수에서 스스로 그 세계의 환상속 에서나 찾을 법한 그 무엇을 향한 작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그래서 작가가 붙인 작품의 제 목도 [정오의 명상], [낮꿈],[저쪽],[비 어] 등의 환상세계로의 '길'을 암시하며, 인 물에 부과된 상징과 은유의 도상 학적 요소들로 하여금 시어(詩語)의 구실을 하게하면서 주제의 설명성을 최 대한 약화시킨다. 가령, 더러는 빡빡머리 위에, 더러는 긴 막대기 위에 갸냘프게 앉아있는 새 의 이미지는 "나른다"는 도상학적 의미로서의 -현실과는 저만 치의 거리에 있을 법한 꿈의 세계로 인도하는 -메타포(metaphor)일 뿐만 아니라, 또 한 그 새의 이미지가 부처가 설법할 때에 날아왔다는 여러새들이거나, 아니면 아미타 불의 극락정토에 산다는 전설상의 새인 "칼라빈카(Kalavinka)"라 한 다면 "명상", "정오", "꿈" 등의 정체와 작가가 의도하고 자 하는 자의적인 환 상세계의 심중을 알아차릴만 하다.
실제로 작가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도상학적 요소들을 위하여 동양의 종 교나 무속신앙과 관련된 전설과 신화 속의 시각 적 이미지들을 깊이 연구하 고, 그것들을 자신의 새로운 조형언어로서 변형/차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남 다르다. 또한 공교롭게도 "성장을 멈춰버 린"청년기의 인물 모습이 발산하는 시각적 이미지의 분위기와 "정오", "낮", "저쪽" 등의 어휘에서 풍기 는 어떠한 시간 과 장소에 관한 "거리감"의 함축적인 의미전달이 그럴듯하 게 일치하면서, 관 객들을 야릇한 환상성의 정서세계로 이끌어간다. 어떤 측면에서 보 면 작품 에 배어나오는 작가의 "고도로 정련된 감수성과 풍부한 서정성(박신의) "이 오히려 작품의 지성적인 면모를 약화시킬 수 도 있다는 위험도 있지만, 그 위험성을 간파하고 느끼기에 앞서 "야릇한 환상성의 정서세계"로 흡입되고 마는 매력을 관객은 먼저 만날 것이다. 이러한 매력의 동인을 평론가 박신의는 다음과 같이 간파한다. "회화적 형식과 기법에서 섬세하고 정교한 감수성을 단련해 가는 점, 늘 넉 넉하 게 준비해 놓는 자기 성찰의 분량, 사유의 띠, 그러면서도 문화에 대한 애정과 낙관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그러나 우리 미술문화의 파생성에 대해 서는 올곧은 대응을 지켜가는 지식인적인 면모, 그태도에서의 정직 함......"
바로 이러한 측면들의 내부에서 발산하 는 힘이 그의 작품을 서구의 세기말 적인 상징주의나 초현실주의적인 경향과는 다른 독자적인 변별성으로 존재 하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탄탄한 데생력을 갖춘 회화의 기본과 그 정신을 알고, 서로 넘보지 않는 금 기처럼 여겨왔던 미술의 형식과 장르에의 자유 로움을 터놓았던 지금까지의 넉넉한 작가적 태도를, 거기에 흔치않게 갖기 어려운 문 학적 감수성을, 특히 그 감수성을 조형으로서 연결시키려는 학구적인 노력과 지적인 면모를 지닌 것이 박항률의 매력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