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이야기
손으로 편지 써 본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요즈음 같이 전자 메일이니 휴대 전화니 하는 통신수단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는 시대에 편지 운운하는 일 자체가 고루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매일같이 사용은 하더라도 전자 메일이 예전의 편지를 대신한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 50대들은 흔히 말하는 386 세대니, 네티즌이니 이렇게 불리는 컴퓨터와 친숙한 세대와는 달리 젊어서 컴퓨터를 만져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니 친밀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당연하다. 그나마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배운 사람이라도 꼭 필요한 기능만 익혀 겨우 쓰고있는 정도이지 여기서 한 발만 밖으로 가면 완전 먹통이기 일쑤다.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려고 하면 생각이 하얗게 바뀌어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나도 그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업무상 비교적 오랫동안 어쩔 수 없이 이 컴퓨터와 씨름을 해오면서 이게 지닌 놀라운 편리성도 있어 그럭저럭 사용하다 보니 이젠 거꾸로 다시 펜을 잡으면 또 이상하다. 이래저래 50대는 골치가 아프다. 사람은 참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최근 몇 년 사이 손으로 편지 비슷한 글을 쓰는 일은 겨우 연하장이나 크리스마스 카드가 고작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인쇄된 문안에다 서명이나 해서 보낼 바에야 안 보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내 이상한 성벽 때문에 인사말 몇자 적는 정도일 뿐이지 편지랄 수는 없다. 그런데 심지어는 자기 이름 석자도 손으로 쓰지않고 인쇄된 채 보내오는 연하장도 드물지 않은 것을 보면 이러다가는 편지라는 단어가 옛말 취급을 받을 날도 멀지않겠다 싶다.
아무튼 편지는 우리 생활에서 한 걸음 물러선 퇴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요즈음 채팅이나 전화 문자 송신으로 서로 통하는 세대들이 밤잠 설치며 썼다 버렸다 하며 연애편지 쓰던 우리들 세대의 느낌을 알 턱이 있을까? 조금만 수 틀리다 싶으면 참을성 없이 서로 갈라서고 마는 요즈음 세대들의 조급한 마음도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던 우리 세대의 느긋함이 없어진 까닭인지 모른다.
나는 해외 건설 경기가 우리나라 외화보유액을 좌우하던 70년대 말 일년 남짓 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에 근무한 일이 있다. 서울 집을 떠나 먼 중동까지 가게 된 연유는 내가 겪은 특별수사대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내가 그 곳에 불려간 이유는 전적으로 내가 맡은 자금, 회계, 세무 이런 업무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서 요행으로 무사히 풀려나오기는 했지만 이런 내 생각들은 그 일 자체에 대한 회의로 연결되었다. 고심 끝에 나는 그 때 막 활발히 시작되었던 해외 건설 현장에 자원하여 그 곳에 부임하게 되었다.
현지에 도착해 보니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가 거처한 곳은 사무실이자 숙소였고 또 식당이었다. 그래서 4층에서 자고 2층에서 밥 먹고 1층에서 일하는 일과가 반복되었고 특별히 갈 곳도 따로 놀이도 없는 그 곳 생활은 우리를 쉬 지치게 했다. 또 집 떠나 혼자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괜히 나를 외롭게 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으로 편지를 쓰는 일 뿐이었다. 처음에는 며칠에 한번씩 쓰던 편지가 점점 잦아져서 마침내 매일 쓰게 되었다. 결국 일기 대신 편지를 썼다고 생각하면 된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편지는 누가 읽을 것을 전제로 하되 일기란 아무도 보지않는다는 점 정도이다.
뭬 할 말이 그리 많았을까 내 자신도 모르겠지만, 매일 편지를 쓰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그 날 있었던 일을 일기 쓰듯 적어 놓았다가 며칠 모아지면 봉투에 넣어 부치면 됐다. 오랫동안 연락 않고 지내다가 어쩌다 생각이 나서 편지라도 한 장 쓰려면 할 얘기가 막막한 경우가 있는데 매일 편지를 쓰다 보니 말이 막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총무를 담당하던 요르단 직원이 하루는 누구에게 그리 편지를 자주 붙이느냐고 물었다. 한국에 있는 아내라고 대답했더니 혹시 우편배달부와 정글게 되는 게 아니냐고 농담까지 했다. 나중에 정말 이런 스토리를 주제로 한 영화가 나왔다고 하던가?
아내도 꼬박 일년 가까운 기간 남편에게 매일같이 편지 받았다는 사실이 은근히 자랑인 듯하다. 편지 얘기가 나오면 빠지지않고 한마디 거드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본디 본때 없는 내 성격에 뭐 다정한 말마디를 거기다 쓰지는 않았겠지만 그 커다란 공간적 공백을 비워두지 않고 가늘지만 끊이지 않게 이어준 에너지는 편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또 한차례, 우리 집 아이들이 군에 입대했을 때 편지를 쓸 기회가 있었다. 큰 놈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 2학년을 마친 둘째 놈과 함께 한 달 차이를 두고 군에 입대하였다. 밖에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얘기도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면서 자란 놈들이었다. 막상 그 아이들이 집을 떠나자 갑자기 집안이 텅 빈 듯 쓸쓸하였다. 두 놈이 한꺼번에 집을 비운 적막감을 메우면서 평소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한 마음도 알리는 방법은 편지 밖에 없었다. 훈련 받는 동안 두 놈에게 번갈아 편지를 쓰는 일에 나는 바빠졌다. 이번에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편지를 썼다. 아내는 컴퓨터로 쓰는 편지를 성의가 없다고 영 못 마땅해 했다.
첫째는 훈련을 마친 후 카투사로 복무하게 되어 주말마다 집에 드나들게 되어 중단되었지만, 둘째 놈은 특공대로 뽑혀 힘들게 군 생활을 하게 되는 바람에 이 년 남짓 내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 때까지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얘기를 몽땅 편지에 담아 자주 편지를 썼다. 비록 컴퓨터로 쓴 글이기는 했지만 그 편지의 힘은 적지 않았다. 아버지와 저 사이에 큰 거리가 있다고 생각해 온 둘째가 제대 후 바뀐 모습에서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 애의 변모가 꼭 편지 덕이라고 만은 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편지도 큰 역할을 하지않았나 생각된다.
휴가 나온 그 녀석이 한다는 말이 내게서 편지를 받으면 온 내무반이 돌려가며 그 편지를 읽었는데 병영 친구들이 그것을 그렇게 부러워했다 한다. 또 편지가 올 때가 됐는데 오지 않으면 아버지 어디 가셨냐고 묻는가 하면 어느 친구는 너희 아버지 작가냐는 질문까지 했다 한다. 그 놈에게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그게 그렇게 위로도 되고 자랑도 되었나 보나. 이 가운데 47통이나 되는 편지가 아직까지 내 디스켓에 보관되어있는 걸 보면 내가 쓴 편지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실 시간으로 전달되는 거의 무료에 가까운 매체가 있는데 다시 편지를 쓰자고 얘기하면 자동차 대신 말 타고 다니자는 얘기 같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지만, 내게는 다른 어떤 통신 수단에서도 편지에서 느끼는 체온이 남아있는 듯한 정감을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편지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펜으로 직접 쓰는 일이 어렵다면 컴퓨터에 입력시킨 뒤 프린트를 뽑아 마지막에 자기 이름 석자 자필로 적어 넣더라도 봉투에 담겨 우표딱지 붙여 우체부 손에 들려 배달되는 편지를 받아 보고 싶다. 이렇게 편지를 기다리는 나 같은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이 가을이 다 가기 전 누구에게라도 한 통의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아니면 혹 편지 동호회 같은 거라도 만들어야만 이 바람이 이루어질까? 요즈음 세계를 휩쓰는 탄저병 공포가 이마저 발 목 잡는 건 아닐까?
( 2001.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