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땅콩에 등장하는 '한 아무개'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 한 건수임. 쇠주 한 잔도 못하고 입맛까지 까다로워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가끔 가다 우리를 웃기는 때도 있음. 담임 선생님은 얼마전에 작고하신 이풍기 선생님 이었음.
- 아직 수능시험 보는 얘들 가진 동창은 많지 않겠지만, 혹 있으면 위로와 응원을 함께 보냄.
- 이 글은 동창을 상대로 쓴 글이 아니기 때문에 동창 독자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표현도 있을 것임.
시험 이야기
서울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어렸을 적 시골에는 유치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유치원에 다니지 못했다. 요즈음 책에 나와 있는 대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말이 맞는다고 가정하면 유치원 못 다닌 게 걱정 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시절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남들은 거치지 않은 면접시험을 보았다. 당시 이름 공주사범부속국민학교, 무엇을 물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면접시험을 보고 합격하여 그 학교에 입학하였다. 물론 떨어진 애들도 많았다. 이리하여 다른 사람보다 한발 앞 선 내 시험 인생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학교는 시험에 합격해야 들어갔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면 힘들었겠지만 시골에 있는 중학교는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입학 시험을 거쳐 공주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이른바 일류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어머니와 선생님의 주장에 밀려 나는 서울까지 시험을 보러 왔다. 내가 진학한 서울사대부고는 경기, 경복, 서울과 더불어 당시 세칭 일류 고등학교 중 하나로 전국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중학생들이 입학하기를 선망하던 학교였다. 나를 아껴주시던 수학선생님이 바로 이 학교를 추천하셨다. 선생님이 가르치신 제자들 가운데 경기, 서울, 경복에 합격한 학생들은 여럿인데 서울사대부고는 하나도 합격시키지 못했다는 게 추천 이유였다. 시험에 합격해서 선생님 한을 풀어드렸고 이것이 내 서울 유학생활의 시작이었다.
서울 학교에 진학해서도 시골에서와 같이 얼렁뚱땅 공부하다 보니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이른바 일류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돼먹지않은 우월감으로 대학시험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않았다. 그러다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 가운데 하나라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대학 시험에서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그 시기에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문과반과 이과반으로 나뉘었다. 그나마 좀 자신이 있는 과목이 수학이어서 나는 이과반에 들었다. 공과대학 건축과로 진학하려는 게 그 때 내 계획이었다. 1학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담임선생님과 진학 상담이 이루어졌다. 담임선생님은 내 성격에 건축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의과대학에 시험을 보라고 추천하셨다. 그러나 의과대학은 내가 싫었다. 평생 아픈 사람만 만나며 살아가는 일이 싫었다. 한걸음 더 나가 아픈 사람들 낫게 하는 보람을 생각했더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낙착된 곳이 상과대학 경제과였고 여기는 수학2를 선택과목으로 택할 수 있어 큰 문제도 없을 듯 싶었다. 이과반에서 문과반으로 옮기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열 차례나 되는 모의고사 평균성적으로 최종 지원할 학교를 정했는데 나는 턱걸이로 서울대학 상과대학을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뭘 몰라서 였겠지만 그리 떨리지도 않았다. 정말 얼마나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던지 나는 입학시험 당일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다. 선택과목이 같아 한 교실에서 시험을 보게 된 한 아무개와 시험 당일 그 때 내가 머물던 왕십리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약속하였다. 아침마다 전차를 타려고 큰 길에 나와보면 택시가 줄줄이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렸고 그래서 거기서 만나 택시를 타고 시험장에 가려던 참이었다.
약속시간에 그 친구를 만나기는 했으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택시는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평소에 그렇게 많던 택시는 모두 어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빈 택시는 오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당시 서울상대가 있던 종암동 방향으로 걸어 가면서 택시를 잡자고 했다. 마침내 마장동 어느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있는 택시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달려가 주유가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한 어른이 나타나 그 택시는 자기가 이미 잡아놓은 차라며 우리를 밀쳤다. 수험표를 보여주면서 사정해보았지만 자기도 기차시간에 늦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시험시간에 늦을 상황이었다. 우리는 상대 캠퍼스를 바라보며 그 쪽으로 뚫린 길을 따라 무작정 뛰었다. 학교에 당도해 보니 상과대학 뒷담을 끼고 도는 골목이었다. 얼마를 돌아야 정문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담을 뛰어 넘었다. 그리하여 숨도 고르지 못한 채 겨우 시작 시간을 맞춰 교실에 닿을 수 있었다. 입학시험 얘기만 나오면 꼭 생각나는 이 일은 순전히 내 철없는 생각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시험 날에는 다른 수험생도 택시를 탈 것이라는 삼척동자도 할 수 있는 생각도 못하고 하마터면 실력 좋던 한 아무개까지 동반 낙방을 유도할 뻔했던 잊지 못할 일이다.
담까지 넘어 숨을 헐떡이며 첫 시간 국어시험을 치른 뒤 나는 앞이 캄캄하였다. 뭐 제대로 답할만한 문제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자신이 전혀 없는 문제들 뿐이었다. 혹 입시에 실패하면 학교까지 달리기도 하고 담까지 넘어와서 정신이 없는 가운데 첫 시간 시험을 망친 때문이란 핑계를 대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이 의리(?) 없는 친구 한 아무개는 달리기, 담 넘기 사태를 가볍게 무시하고 버젓이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그래서 나는 시험에 떨어진 이유까지 뺏겨버리고 말았다.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떨어진다는 게 뭔지 느낌을 알았다. 그러나 실감은 나지 않았다.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뒷바라지하신 어머니, 그것도 시골에서 서울 일류 고등학교에 턱 합격한 사실에 고무되어 공부하면 당신 아들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계실 어머니에게 뭐라고 드릴 말씀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친 김에 2차 시험 한번 봐서 합격해 놓고 재수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래서 H대학 건축과를 지망하였다. 수험과목이 달라 보나마나 한 시험이었는데 이 무슨 무모한 도전이었는지 모르겠다. 결과는 역시 불합격이었다. 2차 시험까지 떨어진 이 얘기는 친구들에게도 창피스러워 하지 못했다. 돼먹지않은 엉터리 자존심 때문이었다.
연거푸 두 차례나 시험에서 떨어진 나는 정신이 펄쩍 들었다. 아마 이것이 철부지에서 한 걸음 벗어나는 계기였을 게다. 학원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 때 유명하던 D학원은 입학 시험이 만만치 않아 사실 또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 시험도 못 봤다. 대학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학원 시험마저 떨어진다면 내 스스로도 그런 나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듯한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자각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 재수한다고 떠돌아 다닌 기간은 공부하는 기간이 아니었고 방황의 기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세월을 보냈는지 모른다. 공부도 놀이도 아닌 잡념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어김없이 다시 시험 때가 돌아왔다. 또 한번의 실패가 두려워 서울대 응시를 주저하고 있던 시기에 아주 친한 선배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서강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 선배를 따라 학교에 가보았더니 이곳이야말로 천국 같았다. 크지는 않았으나 아담하고 깔끔한 캠퍼스와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매혹적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거기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대학에 들어 간 다음 이곳이 천국이 아니라 시험 지옥이란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업시간 수시로 5분 정도 짤막한 퀴즈를 본다. 퀴즈가 짧은 시험을 뜻한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그리고 이것을 성적에 반영한다. 성적이 나쁘면 한번 경고(Scholastic Warning)하고 그 다음에도 또 성적이 향상되지 않으면 아주 학교에서 쫓아내버렸다. 한 학기에 두 번씩이나 집으로 성적표가 보내지고 거기에 찍힌 빨간 스탬프는 우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서강국민학교라고 불평하면서도 각종 시험에 시달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남들 보다 일찍 시작된 시험인생이, 친구들 모두 여기서 해방되어 자유를 만끽하고 있던 대학 시절까지 이어졌다.
시험과 싸우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학교 시험 말고도 유학시험, 언어 능력 시험, 취직 시험, 등 시험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날이 없었고 시험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사처럼 반복되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시험에서 나는 또 한번 낙방을 겪었다. 바로 산업은행 입사 시험이었다. 대학 4학년 말 해외 유학을 포기하고 준비 없이 갑자기 취업시험을 보았다. 물론 낙방이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시험은 어렵든 쉽든 떨어지는 게 당연한데 그것을 아는 데 나는 여러 차례 중요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다. 드디어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합격함으로써 내 시험인생이 막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승진시험, 운전면허 시험, 자격 시험, 대학원 시험 등 무수한 시험이 그 뒤에도 잇달았다.
운전면허 시험만 해도 그렇다. 남들은 한번 합격해서도 차만 잘 몰고 다니는데, 나는 무려 세 번이나 시험을 치렀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에서, 그리고 80년대 초 대한민국에서 심지어 5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 뉴욕 스테이트에 이르기 까지. 사실 20년이 넘는 운전경력 보유자에게 뉴욕주정부가 요구하는 운전면허 시험이란 가소롭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제대로 준비 안된 중요시험에서 떨어졌던 악몽이 떠 올라 거금 100 달라를 투자하여 운전교습을 받는 웃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운전을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있겠는가. 그러니 준비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나 말고 50대 중반 넘어 운전면허 시험 본 사람은 아마 그리 흔하지 않을 게다.
생각해 보니 시험 보다가 세월이 모두 흘러갔나 보다. 이젠 끝이 난 걸까? 천국 입장 시험이 아직 남은 마지막 시험인가? 누군가는 시험 봐서 된다면 대통령도 문제 없다고 했다던 데 나는 어림없다. 만일 천국도 입장 시험을 본 다면 떨어질지 모른다. 중요한 고비마다 낙방한 내 수험 경력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다행히 시험보고 천국 갔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 했다. 그렇지만 천국 입장도 결국 무수히 많은 퀴즈 시험을 거쳐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지금 내 앞에 놓인 하느님의 퀴즈에 내가 어떻게 답변하는지, 그리고 매 순간순간 다른 문제로 다가오는 퀴즈에 어떻게 응답해 나 갈지가 결국 천국문을 열기도 닫기도 할 것만 같다. 아직도 내 시험인생은 끝이 나지않았다.
(2001. 10. 24.)